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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공대생의 심야서재 Dec 20. 2021

50대가 뭐 어때서?

여전히 철 없고 싶은...

이 작가는 공대생 출신이고 모 기업 기술연구소에서 이사로 재직 중이다.


4살 어린 아내와 서울 강동구에서 자가로 살고 있으며 딩크라 아이는 없다. 연봉은 1억 정도 되며 실수령액은 650~ 700만 원 정도 된다. 차 살 돈은 있지만 필요성을 느끼지 못해 뚜벅이로 살고 있다. 가끔 보너스는 나오지 않으며 다만 나왔으면 하고 바랄 뿐이다. 주식은 전혀 하지 않으며 과거에 코스닥에 투자했다가 피본 기억은 있다. 아, 주식 예측 프로그램을 개발해서 돈을 약간 쥐어본 기억은 있다. 연금과 보험 상품에 투자하여 60세부터는 매달 약 500만 원의 연금 생활자가 되길 바란다. 마지막으로 글쓰기 모임을 운영 중이며 큰돈은 벌지 못하지만 함께 성장한다는 가치, 함께 재미있게 글을 쓴다는 의미는 마음속에 깊이 새기고 있다.


(이상 서울 자가에 대기업 다니는 김 부장 이야기 패러디. 내용은 믿거나 말거나)




내년이면 50 하고도 정확하게 2라는 숫자가 나이에 더 추가된다. 살아온 날보다 살 날이 더 희박한 개념으로 변하게 된다는 얘기다. 나이 먹는 게 자랑은 아닌데, 이렇게 나이를 공개하는 일이 얼마나 유익한 일이 될지는 모르겠지만, 그렇다고 부끄러운 일도 아니기에 이렇게 자랑스럽게(?) 늙어 간다는 사실을 널리 관심 종자라는 단어를 빌려 시험해본다.


나는 50대가 정의하는 범주에서 벗어나려고 고집하는 편이다. 그런데 50대의 범주가 얼마나 넓은지 잘 모르겠다. 그런 면에서 본다면 '라테가 말이야',라고 떠드는 꼰대들과 어떤 차이가 있는지 모르겠지만 그 고집이라는 것이 그나마 미래지향적인 축에 속한다고 억지 주장이라도 펼쳐보는 것이다.


강물은 위에서 아래로 흐른다. 나이 역시 일정한 방향으로 흐른다. 강물이든 나이든 거꾸로 돌이킬 수는 없는 것이다. 하지만 나는 그 흐름을 늦출 수는 있다고 믿는다. 그러니까 이것은 믿음의 영역이다. 순리의 영역이지만 내가 어떻게 생각하느냐에 따라 급물살을 탈 수도 0.5초만이라도 한 시점에 정체될 수 있는 것이다.


50대의 평범성은 무엇으로 정의되는가? 나는 어떤 모습으로 남들에게 묘사될까? 50대의 평범성이 무엇인지는 어렴풋이 알고 있기 때문에 그나마 나에게는 가능성이 있는 걸까? 지금처럼 버티면 50대라는 평범성을 영원히 거부할 수 있을까?


30대의 옷차림은 40대까지 이어지고 40대의 옷차람 역시 50대와 별반 다를 바 없다. 물론 특정 시점에 입은 옷들이(면티와 청바지 따위들) 낡아빠질 때까지, 그러니까 단물이 쏙 빠질 때까지 입는다는 건 아니다. 내가 그렇게 구질구질하고 지저분한 인간은 아니다.(나름 향수도 쓰고 귀도 열심히 닦는다.)


하지만 나에게 패션이라는 단어는 일종의 캐주얼이라는 상징으로 해석되는 편이다. 말하자면 30대의 옷차림과 지금 50대의 옷차림을 비교해보면 크게 달라진 부분이 없다는 얘기다. 물론 이 말이 어떤 확고한 가치관을 뜻하는 것은 아니다. 어쩌면 나도 모르게 30대 혹은 40대의 삶을 그대로 유지하고 싶은 욕망의 결과일지는 모르겠지만.


몇 달 전쯤에 어느 출판사 대표와 아주 작은 언쟁이 있었다. 사실 언쟁도 아니고 일방적으로 내가 훈계를 들은 편이었지만... 아무튼 그 대표의 주장은 이런 것이었다. '작가님 제발 글에서 나이를 드러내지 마세요' 글에서 나이를 드러내는 문장을 쓰지 말라고? 왜? 내 나이가 어때서? 늙어간다는 사실이 어때서? 내 몸의 세포들이 차례차례 사멸한다는 사실이 나뿐만 아니라 50대에게 강력한 인장이라도 찍어준다는 이야기인 건가?


글에 나이를 드러내지 말아라. 그래, 나는 그 문장을 받아들이고 싶지 않았지만 작가로서는 성공하고 싶었기 때문에 싫어도 어금니로 곱씹고 또 곱씹으며 억지로 소화시키며 살았다. 대체로 그 엄격한 규정을 지키기 위해서 노력을 모두 가동했다. 뭐 일정 부분 성공을 거두기도 했다. 오프라인에서 나를 보는 사람이 동안이라는 찬사를 쓴 것만큼 내 문장도 그와 다르지 않은 평가를 받았기에. 


그런데 지금 이 글에 내 나이를 공개했다. 그렇다면 나는 작가로서 더 이상 성공하고 싶지 않다는 것으로 해석해도 되나. 아니다. 이렇게 해석되기를 바란 것은 아니었다. 나는 물론 성공을 바란다. 그리고 부와 명예, 출세를 바란다. 속물이라고 욕해도 어쩔 수 없다. 솔직하게 털어놓는 마당에 굳이 나의 욕망을 숨길 필요는 없다. 다만, 나는 바른 길을 통해 그 위치에 서고 싶다. 나를 굳이 감추면서까지 얻어내고 싶지는 않다는 얘기다.


하지만 나는 지금도 계속 낡아가고 있다. 낡아가고 있으니 어제 버려진 20년 묵은 애쉬로 만든 가죽 소파처럼 언제든 퇴물 취급을 받을 신세다. 그럼에도 나의 인생의 축은 꽤 견고하다고 믿는다. 과거 30대, 아니 20대의 지점에서 거의 변화되지 않고 미래도 계속 이어나가고 있다고 믿는다. 육체와 정신은 그런 면에서 서로 다른 길을 걷는 중이다.


그렇게 될 수 있는 믿음의 근거는 어디에서 올까? 근거 없는 자신감은 대체 어디서 생산되는 걸까? 나는 50을 훌쩍 넘겼으나 여전히 철이 없다. 그 사실에 대해서는 아내가 증인으로 나선다. 그러니 객관성을 어느 정도 확보한 셈이다. 문제는 철이 없는 걸 넘어서 아직도 과거 어린(?) 시절 사고뭉치, 말썽꾸러기의 범주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한다는 사실이다. 때로 장난꾸러기와 같은 발상을 하고 어디선가 배운 재미있는 수법(?)을 써먹는다. 그 무대는 주로 내가 운영하는 모임의 채팅방이다. 문우들이 내 실험 대상이 되는 것이다. 이 자리를 빌려 사과의 말을...


그런데 정말 심각한 문제는 이 증세를 고칠 수 없다는 데 있다. 아니 나는 이 병세가 호전되기를 바라지도 않는다. 나이를 먹을수록 병을 받아들이는 거다. 병과 함께 살아가는 거다. 아니, 함께 늙어가는 것이다. 


변화는 충격에서 시작된다고 한다. 나는 충격파를 느끼고 싶지 않다. 느린 시간을 빠르게 돌릴 필요성도 느끼지 않는다. 굳이 정체된 이 흐름이 가파르게 어디론가 흔적 없이 쓸려나가지 않기를 바랄 뿐이다. 그러니 나는 자꾸만 태엽 시계를 거꾸로 감는다. 모래시계를 자꾸만 뒤집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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