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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공대생의 심야서재 Jul 19. 2024

불면의 경계에서 두통과 예술을 상상하다

서늘한 여름밤, 의식의 흐름을 따라서

밤이 찾아왔다. 밤은 병약하다. 의지 박약한 영혼들이 전율하는 시간. 여름밤의 서늘함이 외부의 온도인지, 내면의 평온함인지 그 경계마저 모호하다. 이도 저도 아니라면, 나의 존재를 어떻게 정의할 수 있을까. 불안은 마치 검은 안개처럼 이 고독한 밤을 서서히 잠식해 간다.


며칠째 삶과 죽음의 경계를 헤맸다. 어쩌면 살아도 산다고 볼 수 없었다. 산 것이 아니라면 죽기라도 했단 말인가. 죽는 연기를 펼쳤단 말인가. 나는 거의 죽은 사람처럼 온종일 누워서 존재 없는 형체와 싸워야 했다. 그것은 다름 아닌 삶을 갉아먹는 우스운 병과 싸워야 했음을 의미했다. 하지만 어쨌든 난 살아남았다! 죽은 자가 살아남아서 그 수기를 쓸 수는 없는 노릇이니, 이 글은 픽션이거나 픽션을 가장한 미래의 불확실한 증거일까? 그 무엇도 아니라면? 


지난 일요일 밤 서글픈 서늘함이 찾아왔다. 그것은 마치 낡은 레인코트를 걸친 어눌한 노신사의 낯선 방문과 같았다. 그는 조용하게 내 영혼이 기거 중인 방에서 은밀한 대화를 나누고 싶어 했다. 대화를 막 시작한 순간이었을까. 여름밤 빗줄기가 세차게 내 방으로 쏟아진 순간이었을까. 아무튼 그 순간 긴긴 지옥의 두통이 내 의식을 침범했다. 


새벽 3시에 일어나 침대 옆, 책상 위에 올려놓은 체온계로 손을 뻗었다. 그리고 무의식적으로 마치 간호사가 매일 지루하게 반복하는 그런 귀찮은 작업이라도 되는 것처럼 체온을 확인했다. 37.3, 그리도 지독한 편두통, 앞쪽에서 뒤쪽으로 번져가는 두통, 숨을 쉴 때마다 기하급수적으로 증가하는 두통, 마치 헤파이스토스가 망치로 두개골을 수백 번 내리치는 것과 같은 두통. 나는 단테의 7 지옥에서 신음하는 자들과 비슷했다. 나는 스스로 목숨을 끊은 자가 아니다. 그렇게 되고 싶은 욕망조차도 없다. 그런데 마치 하르피아들이 날아와 내 머리를 쪼아대는 것 같은 고통을 느낄 때면, 내가 의식이 있을 때 나도 모르게 목숨을 버린 게 아닌가 의심이 들 정도였다. 


두 번째 코로나와, 귓속의 염증. 그것이 다음날 병원에서 내가 확인한 성적표였다. 나는 불성실한 학생이다. 나는 웬만하면 병원에 가지 않는다. 내가 병원에 제 발로 찾아갔다는 것은 그만큼 병증이 심상치 않다는 것을 의미한다. 기어가다시피, 물론 이 표현은 비유적이다. 헤파이스토스가 내 어깨 위에 앉아 지속적으로 두개골을 두쪽 내려고 작정한 상태에서 병원을 찾아간다는 건 목숨을 내건 미친 짓이나 마찬가지다. 물론, 이 표현도 비유적이거나, 개념적이다. 다른 뜻은 없다.


병원에서 처방을 받고 귓속으로 온갖 장치들이 헤집고 들어오는 순간, 어떤 설화가 떠올랐다. 까마귀가 인간에게 복수하는 이야기. 자신의 새끼를 죽인 인간이 열린 문지방 위에 앉아 귀를 긁는 순간, 어미 까마귀가 날아와 화살로 그의 머리를 관통시켰다는 무서운 이야기. 그 이야기가 귓속의 염증을 치료한 순간에 떠올랐는지는 모른다. 이야기는 기묘하게도 과거의 어떤 순간과 연결이 된다. 그것도 어쩌면 뇌의 신경가소성 때문일까? 인간에게 의식이 있다는 증거는 과거와 현재를 연상하고 또 현재를 통하여 미래를 예측하는 의미론적 능력이라고 하니, 그 기묘한 기억은 내 의식이 분명하게 존재한다는 걸 상징하는 걸까.


"나는 예술적 양심을 비롯해 어떠한 양심도 갖고 있지 않다. 내가 가진 건 오직 신경뿐이다." 아쿠타가와 류노스케가 남긴 단편 소설 <톱니바퀴>의 한 문장이다. 나는 염세적인 사람도 불안증에 시달리는 신경증 환자도 아니지만, 폭발적인 두통에 심취해 있는 나는 이 문장에 동화될 것 같다. 예술적 양심이란 무엇일까? 사회적 구속에서 자유롭고 윤리적인 판단에도 완벽히 해방되는 것, 오직 예술에만 진심을 기울이는 일방향적인 태도가 예술적 양심을 나타내는 걸까?


이런 생각을 하면 나는 실로 한심하다. 내 방은 지독하게 어지럽다. 어쩌면 엔트로피가 폭주하는 내방이야말로 두통을 더 심각하게 만드는 게 아닌지 의심스러울 뿐이다. 현재 자본주의 사회는 예술가의 잠재적 가능성을 파괴시키고야 마는 게 아닌가 싶은데, 그 이유는 명확히 진단하기 어렵지만, 어지럽게 널린 문명의 산물이 그것을 증명하는 것처럼 느껴진다.


3평 안팎의 내방엔 책상과 커다란 모니터, 원목 모니터 선반, 읽지 않은 책이 빼곡히 꽂힌 슬라이딩 책장, 언제 조립할지 모르는 레고 박스 더미와 크고 작은 스피커와 맥북, 아이패드, 아이폰까지, 도대체 한 곳에 몰입할 수 없는 구조적 취약성을 내방은 보이고 있는 것이다. 게다가 일은 어떠한가. 취향과 적성을 고려하지 않은 사회적 압박이 나를 막다른 골목으로 내몰고 있다. 내 방의 취약성을 바라본다면 내가 예술가가 될 가능성은 거의 제로에 근접한다.


하지만, 3일째 지속되는 두통은 내 불안한 신경증을 설명하지 못한다. 엔트로피가 최대로 집약된 내방도 역시 신경증을 설명하지 못한다. 이 세상의 어떤 문장으로도 한 인간의 복잡 미묘한 의식을 설명할 수는 없다. 의식이 과학의 영역이면서 주관적인 이유는 바로 그것이다. 나는 의식의 흐름대로 이 글을 작성 중이라는 사실만 이 순간에 자명할 뿐이다.


다시 한번 아쿠타가와의 문장으로 돌아와서 그의 예술적 양심이란 예술가로서의 악역을 마다하지 않는 그의 이상을 나타낸 것으로 해석하고 싶다는 생각이 든다. 진정한 예술가라면 예술을 지향하는 태도를 고집하기 위해 이따위 너저분한 방 따위는 내던질 수 있어야 할지도 모르겠다. 나는 그럴 수 없으니 방구석에 앉아서 두 손으로 머리를 싸매고, 물론 이것도 상징적이다. 머리를 두 손으로 감싸면 글은 쓸 수 없을 테니까.


"저는 태어나고 싶지 않아요. 무엇보다 제 아버지에게 물려받은 정신병만으로도 힘들어요. 게다가 저는 갓파라는 존재를 악하다고 믿고 있습니다." 역시 아쿠타가와 류노스케의 단편 <갓파>의 한 문장처럼, 나는 태어나는 걸 원했으니 이 세상에 존재하게 된 거라고 믿고 싶다. 이미 선택했으니 생명 유지 장치를 붙들어야 한다는 사실을 이해한다. 코로나와 두통 두 가지 주제를 놓고 이렇게 쓸데없는 소리를 지껄인 것 같아서, 이 글을 읽은 사람에게 미안한 마음도 들지만, 어쩔 수 없다. 쓰는 마음은 헤파이스토스의 망치질로도 막을 수는 없는 가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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