증류된 인간, AI 시대를 표류하다
가끔, 아니 매우 자주, 순수한 증류수로 살아가는 삶이란 어떨까,라고 생각해 본다. 하지만 좌측도 우측도 아닌 맥없는 증류수가 될 수는 없는 노릇이다, 그럼에도 나는 해맑은 액체처럼 하루를 무색무취의 삶으로 살아가려고 노력할 뿐이다. 어느 곳에도 물들지 않을 수는 없겠구나,라고 깨닫지만 그것 역시 내 추상적 마음을 비출 뿐, 별다른 뜻은 없다. 기울어지는 것에도 에너지는 필요하다.
어쨌든 나는 삶으로부터 점점 멀어지고 있다. 삶의 대극이 죽음일지는 잘 모르겠지만, 그것이 인간의 근본적 유한함이라는 사실은 철학을 하지 않아도 본능으로 알 수 있는 세계다. 그렇다, 나는 점점 흐트러지고 침몰 중이다. 질서에서 점점 멀어나고 있다. 내가 붙잡으려는 희망의 손가락들은 하나같이 모두 신기루를 겨냥하고 있다.
그럼에도 나는 질서를 만드려고 50 중반의 나이 가운데에서도 몸무림을 치고 있다. 나는 글에서 굳이 나이를 밝히고 싶지 않다. 마치 나이에 기대서 나의 유약함을 애써 포장하려는 비겁함이 느껴지기 때문이다. 한 없이 약해지는 내 체력과 끈기와 탱탱함을 잃어가는 핏줄, 탄력과는 거리가 먼 바스락거리는 낙엽 같은 피부를 관찰할 때마다, 건조한 얼굴로 커피를 내린다. 분쇄된 커피 분자들의 화학적 조성이 바뀔 때, 문득 누군가에게 기대고 싶다는 생각을 한다. 하지만 아내는 아니다. 거기까지 생각하고는, 나는 방금 내린 커피가 어쩐지 밍밍하게 느껴져 싱크대에 그냥 부어 버렸다. 새로 한 잔을 내렸지만 맛은 똑같았다. 아마도 원두의 문제는 아닐 것이다.
인간은 더 외로워지고 설 자리를 잃어간다. 인간은 본질적으로 혼자라는 사실을 기억해 낸다. 혼자라는 사실을 자각하기 싫어서 뭔가에 끊임없이 뛰어든다. 그것을 감히 도전이라고 포장하지는 않으련다. 그저 손에 잡히는 대로 무모하게 뛰어든다고 보는 게 맞겠다.
내 안에는 서너 명의 인간이 함께 사는 것 같다. 아침 9시부터 6시까지는 꼼꼼하지만 AI에게 의지하는 개발자가 살고, 밤 10시 부근에는 어디선가 다른 모양의 인간이 나타나 새벽 3시까지 모니터 앞에서 꼼짝을 하지 않는다. 그 사이사이, 아내의 눈치를 살피는 남편이라는 이름의 소심한 남자도 있다. 이들은 서로 상성이 좋지 않아서, 가끔 내 머릿속에서 격렬한 논쟁을 펼치곤 한다
나는 재택근무자로서 하루를 부지런하게 보내고 싶지만, 사실 무한의 게으름 속으로 자꾸만 매료되고 있다. 매일 아침 AI가 설정해 준 스케줄에 따라 충실하게 과업을 달성하고 싶지만, 인간이 아닌 몹쓸 존재가 재편해 준 가짜 질서라 생각하며 반항한다. 나는 세상이 지배하는 법칙을 절대 거부할 줄 모르는 자본주의에 물든 노화된 불순물이다.
책팔이? 강의팔이? 글팔이? 요즘 이런 낯선 말들이 글을 쓰고 강의하고 책을 쓰는 사람을 일컫는 변영이 되었다. 그래 나는 책을 팔기 위해 책을 썼다. 나는 나의 존재 가치를 세상에 드러내려고, 나의 문장력을 자랑하기 위해 책을 쓰지 않는다. 내가 아는 사실을 토해내지 않고서는 버틸 수 없기 때문에 책을 쓰는 것이다. 하지만 유토피아는 나와 거의 상관없기에 내가 그토록 무시하는 AI라는 주제로 줄곧 책을 썼고 앞으로도 그 주제의 책은 계속 나올 테고, 지금 이 순간도 책을 쓰고 있다. 이것은 질서인가? 무질서인가?
또한 나는 도서관에 강의 전선에 나서기도 했다. 강남과 송파를 거쳤고 다음 주에는 동대문까지 진출한다. 내 두 허벅지는 도로 위에서 강의 연단에서 춤을 췄다.
그리고 직장인으로서 여전히 살아남아서 그곳에서 논리의 뼈대를 세우고, 알고리즘의 살을 붙이며, 수많은 밤을 새웠다. 그것은 거짓말이다. 이제는 AI를 부린다. AI와의 협업은 마치 능력은 출중하지만 성격 더러운 신입사원과 일하는 것과 비슷하다. 나는 녀석에게 커피를 손수 내려주는 심정으로 원하는 바를 지시한다. 결과물이 마음에 들지 않으면, "A대리, 이건 좀 아니지 않나?"하고 속으로 중얼거린다. 물론 녀석은 A대리가 아니지만. 어쨌든 녀석이 내놓는 결과물은 나쁘지 않다, 아니 나보다 훨씬 낫다. 인정하고 싶지 않지만, 그건 마치 금단의 열매 같은 맛이 난다. 이를테면, 아주 잘 익은 한여름의 납작 복숭아 같은. 그리고 나는 그 맛에 이미 길들여져 버렸다.
이제 인간은 인공지능과 생산성을 놓고 싸울 수 없다. 인공지능과 대등하지도 않다. 녀석의 아이큐는 이미 140을 넘었다. 프로그래밍 올림피아드에서 인간을 농락해 버렸다. 나는 비굴하게 녀석의 손을 따뜻하게 잡고 화합하자고 권유한다. 지난날의 책망과 비난, 욕설은 잊어버리자고.
세상은 몇 번을 반복해서 변할 것이다. 산업혁명이 증기기관으로 인간 육체의 한계를 극복한 ‘제1의 기계 시대’였다면, 지금 우리는 “디지털 기술이 정신의 한계를 허무는 ‘제2의 기계 시대’에 들어섰다”. 그리고 내 앞에는 ‘바이브 코딩’이라는, 거의 신성에 가까운 권능을 지닌 새로운 세계가 펼쳐지는 중이다.
나는 코드를 놓은 지 한참 됐다. 그럼에도 나는 폭발적으로 서비스를 만들어내고 있다. 수천 줄의 코드를 짤 필요가 없다. 그저 내 몸에서 만들어내는 원초적인 진동을 느낄 뿐이다. 그 본질적인 느낌과 목적을 미묘한 뉘앙스로 속삭이기만 하면, AI는 순식간에 완벽한 구조의 코드를 직조해 낸다.
과거의 프로젝트는 쓰레기다. 지우개로 벅벅 지워내듯, 내 과거를 몰수한다. 딸깍하는 클릭 한 번에 낡은 것을 소각하고 새로운 것을 창조해 낸다. 혁신이라는 단어로는 부족한, 어쩌면 주술에 가까운 행위다. 나는 이 새로운 힘에 매료되었다. 물론 이 기술은 내 능력을 대체하는 것이 아니라, 내 지능을 증강시키는 도구라고 생각했다. AI는 인간을 절대 배신하지 않도록 훈육되었으니까.
AI는 “인간의 능력을 향상하는 협력”의 형태, 즉 증강(Augmentation)의 모습으로 다가왔다. 나는 더 이상 단순한 개발자가 아니었다. 나의 ‘진동’을 현실로 구현하는 지휘자, 나의 비전을 실체로 만드는 신이 된 것이다. 그런데 그 세계가 블랙홀처럼 느껴지는 이유는 뭘까.
바이브 코딩은 나를 단순한 개발자에서 전능한 설계자로 격상시켰다. “AI 증강은 AI를 도구로 사용하여 조직의 능력을 향상하고, 의사 결정을 더 스마트하게 만들며, 생산성을 높이고, 창의적 사고를 더 날카롭게 만든다”는 약속 그대로였다. 몇 달이 걸리던 프로젝트는 거짓말처럼 며칠 만에 완성되었고, 그 결과물은 이전보다 훨씬 견고하고 아름다웠다. 이것이 바로 에릭 브린욜프슨과 앤드루 맥아피가 예견했던, 기술이 가져다주는 막대한 ‘풍요(bounty)’였다. 나는 이 풍요의 중심에서 환호했다.
물론 나는 그 사실을 대표에게 알리고 싶지 않았다. 그것이 오히려 나의 몰락을 가속화시킬 것이 분명하기에, AI 스피드에 인간이 맞춰야 할 것이 분명했기에.
풍요가 쏟아지는 곳에는 언제나 짙은 그림자가 드리워지는 법이다. 누군가의 성과는 동료들의 그림자가 되었다. 한때 함께 밤을 새우던 책상들이 하나둘씩 사라질지 모른다. 아니 회사에서는 더 이상 신입을 뽑지 않는다. 판교에서 비교 우위에 서 있었던 나와 같은 개발자들조차 가까운 미래에 어떤 취급을 당할지 모른다. 머잖아 인간 수백 명을 대체할 AI가 출현할 것이 분명하기 때문에.
AI가 나의 지능을 증강시키는 동안, 동료들은 자동화의 제물이 되었다. MIT의 경제학자 대런 애쓰모글루가 지적했듯, 최근의 기술 변화는 “노동을 보완하기보다는 자동화를 향해 편향”되어 있었고, 그 결과는 “정체된 노동 수요, 국민 소득에서 노동 점유율의 감소, 불평등 심화”로 나타난다. 어쩌면 이 세계는 거대한 의자 뺏기 게임인지도 모른다. 음악이 멈출 때마다 의자는 하나씩 줄어든다. 지금은 운 좋게 의자에 앉아 있지만, 음악이 언제 멈출지는 아무도 모른다. 나는 왠지 다음 차례에 탈락할 것 같은 불안함에 사로잡힌다. 특별한 근거는 없다. 그저 그런 기분이 들뿐이다.
경제학자들은 오랫동안 “신기술이 일자리를 파괴한다는 생각”을 오류로 치부해 왔다. 기술 발전이 생산성을 높여 상품 가격을 낮추면, 소비자는 늘어난 가처분 소득으로 다른 상품을 구매하게 되고, 이는 새로운 수요와 새로운 일자리를 창출한다는 논리였다. 그러나 이번에는 다를 것이다.
과거의 기술 혁신은 주로 육체노동을 대체했고, 인간은 창의성이나 복합적 소통 같은 고유의 영역으로 이동할 수 있었다. 하지만 바이브 코딩과 같은 AI는 변호사, 작가, 그리고 개발자 같은 “한때 자동화로부터 ‘안전하다’고 여겨졌던 역할들”의 본부를 정면으로 겨냥한다.
자동화는 “이전에 노동이 수행하던 작업에서 기계와 AI가 노동을 대체”하는 ‘대체 효과(displacement effect)’를 낳는다. 생산성은 오르지만, 노동에 대한 수요는 정체되거나 사라진다. 일자리가 없어진다는 얘기다. 기술이 새로운 일자리를 창출하는 속도보다 기존 일자리를 파괴하는 속도가 압도적으로 빨라진다. 사회 전체가 균열을 일으키고 거리에 늘어난 실업자들과 공허한 상점들은 더 이상 남의 이야기가 아니게 될 것이다.
나의 창의성, 나의 직관, 문제 해결 방식, 그 모든 ‘진동’은 AI에게는 최고의 학습 데이터가 된다. AI는 광속으로 경험을 누적해 가고 더 향상된다. 내가 증강되는 것이 아니라 AI가 증강된다. 나는 AI라는 유토피아의 환상을 유지하려고 AI를 도왔다. 나는 데이터를 정제하고 길을 안내하는 ‘유령 노동자(ghost worker)’에 불과했다.
이제 나는 다시 키보드 앞에 앉는다. 바이브 코딩의 유혹은 여전히 강력하지만, 나는 이전과 같은 마음으로 그것을 대할 수 없다. 기계와 경쟁하는 대신, “기계와 함께 달려야(race with the machines)” 살아남는다고들 한다. 하지만 그 경주의 끝은 어디일까. 어쩌면 우리는 일의 종말이 아니라, 의미의 종말을 마주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노동이 생존의 의무가 아닌 세상, AI가 모든 것을 생산하는 세상에서 인간은 무엇을 해야 하는가. 어쩌면 답은 애쓰모글루가 말한 ‘새로운 과업의 창출(creation of new tasks)’에 있을지도 모른다. 기계가 할 수 없는, 오직 인간만이 가치를 부여할 수 있는 새로운 무언가를 찾아내는 것.
인공지능의 세상, 인공지능이 리드할 세상, 인공지능이 새롭게 창조할 인간이 존재하지 않는 세상에서, 인간이 만든 문장엔 어떤 가치를 담아야 할까. 새벽 세 시, 나는 작업을 멈추고 아파트 밖으로 나선다. 포근한 작은 덤불과 관목이 비밀정원처럼 어둠 속에서 모습을 드러낸다. 편의점에서 탄산수 한 병을 가져온다. 나는 뚜껑을 돌린다. '치익-' 하며 김이 공중으로 날아가는 소리가 낮은 곳에서 밤달로 치솟는다. AI는 이 소리의 의미를 이해할 수 있을까. 이 탄산수 한 병에 담을 나의 피로와 안도감, 그리고 내일에 대한 막연한 불안 같은 것을 데이터로 바꿔주면 느낄 수 있을까. 아마 불가능할 거라고 믿고 싶지만 가능할지 누가 알겠는가. 어느 쪽이든 상관없지만. 나는 그저 차가운 탄산수를 실컷 들이마실 뿐이다. 오늘은 비가 오지 않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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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 시작한 바이브 코딩 유튜브 채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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