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공대생의 심야서재 Feb 15. 2017

삶과 죽음의 경계

나는 경계 위에 설치된 어설픈 무대에서 연기를 펼친다.

삶과 죽음은 분명치 않은 경계선을 사이에 두고 대치중이다. 경계선을 마주한 나는 무너지기도, 살고자 하는 본능으로 일어서기도 했다. 나는 경계 위에 설치된 어설픈 무대에서 연기를 펼쳤다. 그 위태로운 무대에서 생존하고 싶다면, 진실을 감출 수 있는 적당한 가면이 필요했다.

아침마다 가면을 찾았다. 오늘은 더 안으로 숨고 싶은 날이었다. 음산한 날씨 탓이었을까? 얼굴뿐만 아니라 몸 전체를 둘러쌀 천 쪼가리가 절실했다. 나는 자신감을 잃어가고 있었다. 가면 없이는 밖으로 나갈 용기가 없었다. 오늘은 조금 두꺼운 철판을 얼굴에 썼다. 가면 때문이었을까? 나는 냉정하고 건조했다. 내가 존재하는 모든 공간에서 나는 차가운 손님처럼 행동했다. 나는 사람들과 일정한 거리를 유지하려 했다. 

나는 깃털 같은 존재였다. 어디든 의지한 채 날아갈 수 있는 자유를 지녔지만, 세속과 영원히 등질 수도 없는 허무한 운명을 동시에 타고나기도 했다. 내가 가야 할 곳은 어디일까. 회사에서 필요한 나의 위치를 어떻게 찾아야 할까... 

퇴근길의 사건


퇴근길의 일이었다. 어제와 다름없는 하루를 마친 후, 쌓인 피로와 어깨동무하며 걸어가는 길이었다. 횡단보도 앞에서 몽롱한 시선을 반대편으로 떨어뜨리고 있었다. 정면을 향했으나 의식은 점차 사라지고 있었다. 생각은 있었으나 무의미한 것들로 머리가 가득 채워지고 있었다. 세상에 대한 분노는 마음속에 가라앉았다가 다사 떠오르는 반복을 되풀이하고 있었다. 

머리는 중력을 이기지 못하고 바닥으로 추락했다. 콧속으로 기분 나쁜 바람이 들어왔다. 휘날리는 차가운 바람에 눈꺼풀이 어지럽게 춤을 췄다. 도로 옆 길가에는 부서진 구조물이 아무렇지도 않게 나뒹굴고 있었다. 

어디론가 날아가는 듯 자유롭게 낙하하는 눈송이의 운명과 육체라는 틀에 사로잡힌 영혼의 굴레가 동시에 보였다. 나는 여전히 무겁게 바닥을 짓누르고 있었다. 생(生)과 사(死)를 함께 맞이한 눈송이의 마지막을 묵도했다. 누군가 내 어깨를 갑자기 잡아끌었다. 도로 한가운데로 내팽개쳐질 듯한 끔찍한 생각에 사로잡혔다. 그때, 신호등 불빛이 청록색의 빛깔을 내비쳤다. 잠시 내일에 대한 생각, 사랑하는 사람에 대한 그리움, 삶의 비릿한 운명 같은 생각에 잠겼다. 생각은 다시 현실로 전환됐다. 마음속으로 박자를 셌다. 시선은 정면으로, 발걸음은 무겁게 앞으로 내디뎠다. 앞 쪽으로 무게 중심이 쏠렸다가 뒤쪽으로 몸이 후퇴하는 걸 느꼈다. 


몸을 겨우 앞으로 내밀었을 때, 불길한 기세에 말려들어가는 듯한 혼돈에 빠졌다. 몸 앞으로 자동차 한 대가 바람을 일으키며 지나갔다. 광풍을 휩쓸고 지나갈 듯한 무지막지한 에너지를 느꼈다. 공기가 강렬한 파장을 일으켰고, 고막을 찌를듯한 소음이 포말(泡沫)을 일으켰다. 내 온몸의 털이 곤두섰다. 

그 순간, 나 스스로를 침착하게 바라봤다. 나는 다행히 무사했다. 내 눈은 마치 카메라처럼, 내 육신과 자동차의 맹렬한 질주를 중계하고 있었다. 시간이 슬로비디오처럼 느리게 지나갔다. 영혼의 시스템이 작동하고 있었던 걸까? 삶의 마지막이었을지도 모를 순간을 저장하기 위해 영계(靈界)의 시스템이 작동했을지도 모른다. 오늘 무대가 마지막이 될 수도 있었다. 무대의 주인공이 사라질 수 있었다. 내 삶의 마지막 혁명이 일순간에 소용돌이쳤다. 시간은 마비되었고, 힘없는 육체 하나만이 하염없이 지나간 순간에 묻혀 과거를 더듬고 있었다. 

영혼은 말이 없었고 생생한 표정을 잃었다. 멀리 사라지려는 검은 자동차의 뒷모습만 허망하게 쳐다봤다. 창백한 얼굴이 보였다. 믿기 힘든 현실을 애써 분별하려는 슬픈 몸짓이 나타났다. 단지 백지 한 장 차이의 두께로 산 자와 죽은 자의 경계가 나뉜 순간이었다. 육신은 감각적으로 사고를 알아차렸으나, 영혼에게 신호를 전달하기에 턱없이 부족했다. 영혼은 이해할 수 없었다. 다행히 내 몸은 충돌을 모면했고, 위기의 순간에서 어쨌든 살아남았다.

시간은 놀랍도록 빠르게 평정을 되찾았고 사람들은 거리를 유지했다. 아무 일도 없던 것처럼 세상은 기억을 잊어버렸고, 범인은 어둠 속으로 자취를 감췄다. 손을 내밀어 가슴을 쓸어내렸다. 공짜로 삶을 다시 한 번 살아갈 수 있는 기회를 얻은 것 같았다. 두 갈래의 가파른 길은 과거로 지나갔다. 

“만약 1초만 빨리 걸어갔더라면 나는 이 세상에 없었겠지...”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