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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공대생의 심야서재 Jun 11. 2017

적응

그리고 새로운 시작

아침에 출근하는데 아내가 자그마한 카드 하나를 손에 꼭 쥐여준다. 
급하게 흘러가는 시간이 잠시 동작을 멈추고 아내에게 시선이 집중된다.


"이거 없으면 집에 못 들어와. 잘 챙겨……"


옷자락을 붙잡고 소곤소곤 속삭이는 아내의 얼굴에 내 하루를 걱정하는 눈빛이 담겨있다. 아마도 아파트 출입을 위한 보안 장치일 거다. 열쇠 꾸러미에 새 카드를 끼우고 심드렁한 표정으로 집을 나서는데, 가방에 없던 공간을 새 물건이 차지해서일까. 이사한 지 며칠이 되지 않아 분위기에 적응이 덜 되어서일까. 익숙했던 모든 풍경이 오늘 아침에는 멀게만 느껴진다. 출구出口를 나서는데 건물도 길도 심지어는 바람조차 나를 이방인 취급하는 것 같아 낯설기만 하다.  


비어있는 곳으로 달려간다.


어떻게 시간을 흘려보냈는지 잊어버릴 정도로 바쁜 시간을 보내고 다시 퇴근 시간을 맞는다. 익숙한 곳으로 자꾸만 이끌려가는 내 몸속에 덩치가 큰 자석이 하나 들어있는 것 같다. 가지 말아야 할 곳을 자꾸 기억하고 회귀回歸하려는 내 의식이 신기하다. 오랜만에 다시 탄 지하철은 왜 이리 고요할까? 공간을 꽉 채우고 있었던 불순물不純物들이 모두 사라지고 빈자리를 순수가 대신 채우고 있는 것 같다. 바쁜 시간을 지나쳐 다시 아내에게로 돌아가는 지금, 모든 피곤함과 스트레스, 기우, 근심 따위를 마음에서 걷어내고 본연의 옷으로 갈아입는다.


목적지에 다다르자 없던 사람들이 쏟아져 마치 여름날의 뙤약볕을 식혀주는 분수처럼 솟아오른다. 나는 그 치솟는 물기둥에 잠시 취해 어디로 가야 할지 방황을 하다 물줄기가 이어지는 방향에 몸을 맡긴다. 부쩍 가벼워진 가방을 어깨에 메고 물에 젖은 허벅지를 좌우로 교차하며 나도 무리 속에 덧묻히기로 한다.  

얼마간의 침묵이 이어이자 아파트 입구에 도착했나 보다. 주섬주섬 가방에서 카드를 찾기 위해 뒤적거리는 순간, 누군가 나를 지켜보고 있었다는 듯 문이 자동으로 열린다. 나는 부끄러운 짓을 하다 들키기라도 한 사람처럼 애써 태연한 척 발걸음을 승강기로 옮긴다. 승강기에는 이미 버튼이 눌려있고 LED 숫자는 점점 나를 향하여 달려오고 있다. 내 눈앞에서 이동을 멈춘 승강기는 큰 입을 쩍 벌린다. 나는 밀리듯 에너지가 가득한 곳으로 빨려 들어간다. 나는 우두커니 서서 내가 사는 층의 숫자가 눌리는 것을 보고 아무것도 행동하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제멋대로 작동하는 체계에 수긍한다.


퇴근 무렵의 파란 하늘


수고스러움이 줄어들어서 좀 편해지긴 한 것 같다. 하지만 내가 할 수 있는 쉬운 일들까지 누군가에게 자리를 내어주는 것 같아 조금은 서운하다. 4차 산업혁명이 인류의 미래를 결정하는 시대에 살고 있는 우리는 이제 기억하고 처리해야 할 역할을 사람이 아닌 그 무엇에게 물려주고 있다. 그 세상이 게으른 인간에게 선물이 될까? 아니면 영화처럼 인류를 멸망시킬 작은 씨앗이 될까? 과연 인류가 염원하는 대로 기계와 인간이 평화롭게 공존할 수 있을까? 내가 현재 몸담고 있는 일들과 연관시켜서 이런저런 생각을 하게 된다.


잠시의 생각이 지나치고 승강기는 작동을 멈춘다. 
닫혀있던 문이 열리고 아내가 환하게 미소를 짓고 있다.
지금 이 순간, 나는 디스토피아 dystopia에서 벗어나 유토피아 Utopia 맞본다. 



얼마 전부터 자가출판한 책이 온라인에서 유통되기 시작했습니다.
브런치 프로젝트#3 에서 수상한 글들을 모아 정리하여 출간하게 되었습니다.
세상에서 빛을 보지 못할 글들이라 여겨 아무것도 하지 않을 바에야 
손수 제 힘이라도 나서야 할 것 같았습니다. 
그렇게 글자에게 빛을 잠시나마 보태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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