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공대생의 심야서재 Jul 04. 2018

나에게 있어서 행복이란?

바로 지금 이 순간 그리고 노력

  나는 오늘도 누더기처럼 너절너절한 삶의 밑바닥을 더듬고 다닌다. 무엇에 집념하고 있는지, 집착하고 있는 에너지의 기원이 어디서 태동했는지 알 수 없지만…… 다만 확실한 것은 모든 사건의 문제점과 그것을 해결하려고 하는 의식이 나에게서 출발하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문제는 그것을 분명하게 자각할 수 없기 때문에, 누군가 진단한 결과이기 때문에 스스로가 환멸의 대상이 되기도 한다. 내가 지금 내리는 결정이 타인에게서 비롯된 것이 아니라고, 스스로의 의지대로 판단하고 자유로운 자아라며 강하게 부인을 하지만, 나의 자아가 타인의 최면술에 걸린 조작물이 아니라고 어찌 부정을 한단 말인가. 나의 생각이 만약 잿더미로 변한 참담한 건물 더미에서 쓸만한 물건을 찾고 있는 행동과 유사하다고 설명한다면, 그런 노력과 아우성 같은 마음의 연속적인 활동이 고유한 것이라 여길 수 있을까, 아닐까. 내가 따르는 가치관, 의견, 주장, 권리의 획득이 타인에게 오래도록 길들여진, 의미도 없는 그저 오랫동안 타성에 젖은 습관적인 활동의 결과라고 한다면, 그 오래된 경험과 미래에 대한 갈망조차 내 소유가 아니라는 것을 어찌 증명할 수 있을까. 

  나는 오늘도 어김없이 나에게 주어진 과업을 확인했다. 빠듯한 일정과 쫓길듯한 불안한 표정이 나를 견인했으며 재촉했다. 미래는 보이지 않기에 불안감은 계속된다. 불안한 미래가 현실이 되면 또 다른 불안이 미래를 잠식한다. 나는 불안이라는 정체 속으로 스며들고 하나의 모순 덩어리로 합체되어 떨기만 한다. 

  불안은 근거 없는 위안을 줄지도 모르겠다. 어차피 보이지 않는 것은 모두에게 공통적인 현상이니깐, 우리는 그런 합의문을 가진, 공동의 운명으로 서명된 계약 관계임을 인식한다. 내가 현재 글을 쓰고 있는 행위, 어쩌면 누군가에게는 전혀 쓸모없는 자아를 향해 달려가고 있다거나, 보이지도 않는 존재를 인식하는 과정이 타인에게 만족을 줄 수 있는 것인지, 누군가의 작은 불안이라도 떨쳐버릴 수 있는지,라고 생각한다면 지나친 희망일까. 이런 어두운 세계를 증거하는, 불안의 원인을 수집하고 분석하는 일이 소용이 되는 의미 있는 시간이 될 수 있을까. 적어도 나라는 존재에게 위안을 줄 수 있으니 긍정적이라 볼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우습게도 이런 잡스러운 생각을 싸질러놓은 글이 타인에게 읽혔으면 하는 바람도 있다. 아니, 단지 읽히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깨알처럼 작은 위로라도 안기거나, 이 글이 내가 밋밋한 인간이 아니라는, 나아가서 이 사람 글 좀 쓸 줄 아는구나,라고 착각이라도 주고 싶다는 어리석은 생각도 드는 것이다. 그래서 그런 경험이 나에게 행복이 될 수만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이런 고통스러운 경험조차 보람이 될 수 있다면……

  행복이라는 단어가 근래에 자주 등장하고 있다. <행복의 기원>에서 서은국은 행복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정의했다. 행복한 사람들은 더 외향적이며 그로 인하여 정서적 안정성이 높다고, 행복지수가 높은 사람들의 사회적 관계를 분석하면 그들은 인간관계에서 만족감이 훨씬 높다고. 행복에 있어서 필요조건으로 사회적 관계의 중요성을 설파했다. 그리고 내향적인 사람들이 외향적인 사람들보다 스트레스를 더 예민하게 느낀다며 행복한 사람들은 72%의 시간을 다른 사람과 보내지만 불행한 사람들은 혼자 있는 시간이 52%의 비중을 차지한다고 말했다. 나는 그야말로 내향적인 사람의 전형이다. 그렇다면 나는 불행한가? 어떤 면에서는 그렇기도 하다. 하지만 그의 이론에 동의할 수 없다. 내가 얼마나 행복한 인생인가? 이런 복잡한 생각을 글로 풀어낼 수 있는데, 어떻게 불행하다 쉽게 주장할 수 있을까. 사람의 마음을 통계적인 수치로 판단하려는 이론에 동의할 수 없다.

  나의 직업조차 내면에 보다 친밀하다. 혼자서 일을 계획하고 설계하고 코드를 짜다 마무리한다. 대부분의 일들은 모듈이라는 작은 단위로 분개하여 작업자에게 할당된다. 빡빡한 일정조차 무의미하다고 생각한다. 그 이유는 숙련자가 충분히 제어할 수 있을 만큼 경험이 쌓였기 때문이다. 나는 그런 숙련된 프로그래머라고 스스로 판단한다. 적어도 내세의 직장이라는 개념 하에서는. 나는 그런 식으로 나의 자아를 충분히 리드한다고, 그 과정에서 행복감을 느낀다고, 내가 넘을 수 없는 벽조차 기대어 쉬는 공간이라 여긴다. 그런 긍정적인 믿음은 곧잘 파괴되고 패배자라는 낙인으로 변질되기도 하지만……

  행복을 제대로 느끼려면 짐을 내려놓아야 한다. 짐은 욕망, 야심, 그릇된 바람 따위, 때로는 희망까지 포함된다. 욕망이 크면 클수록, 원하는 목표의 수치가 지나치게 추상적이며 근접하기 어려울수록 행복은 더욱 멀어지고 우리는 상대적으로 절망을 경험한다. 절망은 의욕의 수치를 떨어뜨리고 결국 우리는 권태를 느낀다. 권태는 실패에 대한 두려움과 용기에 대한 반사 감정이다. 무력감의 총아이며 무기력의 집합체다. 아침마다 잠에서 깨어날 때, 하루에 대하여 어떤 기대나 설렘을 더 이상 느낄 수 없다면 권태에 깊이 물들었다는 증거일 것이다. 

  가끔 하루가 예측할 수 없는 혼돈으로 빠지길 기대한다. 정해진 패턴대로 움직이는, 예측 가능한 인간으로 타인에게 비치는 것이 싫기 때문이다. 역설적이게도, 나는 무엇이든 예측하고 그것이 결과로 증명이 될 때 행복감을 느낀다. 그것이 부정적이든 긍정적이든, 예상한 대로 흘러가면 시간을 스스로 장악했다고 믿는다.

  행복은 일상의 사소한 일에서 느끼는 감정이라 부르기도 한다. 욕심을 낮추면 작은 것에도 만족할 수 있다는 얘기다. 하지만 욕심의 적정한 레벨은 무엇인가. 그것에 대한 정의는 누가 내리는 것인가. 나의 행복이 만약 바닥 어디쯤이라면 그것을 더욱 낮춰야 하는가, 높은 행복을 달성하기 위해서 더 올리도록 열심히 살아야 하는가.

  할 수 있는 것이 노력밖에 없다고 하는 것은 절망과 희망을 동시에 준다. 노력은 누구나 할 수 있는 가치고, 노력으로 덮을 수 있는 부정적인 감정들이 세상엔 많다고 생각하니까. 노력은 잊는 것이다. 단순하게 하나의 가치만을 생각하고, 그것으로 승부를 겨루는 자세다. 부단한 노력으로 얻은 산물이 만족이 될지, 실망이 될지는 모른다. 중간쯤에 운이라는 요소가 약간 양념이라도 친다면 더욱 풍성해지는. 

이 글은 원인도 없고 결론도 없는 글이다. 연속적으로 달아나는 생각 하나를 붙들어 본 것이라고 할까.

매거진의 이전글 이거 얼마에요?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