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안의 두 길, 어느 쪽으로 나아갈 것인가

16장

by 지안

1. 마음의 성품이 길을 결정한다.


신적인 성품이란 무엇일까. 자유로 이끄는 삶의 기반.


삶은 늘 갈림길 위에 있다. 우리는 매 순간 선택한다. 그 선택은 거창한 선언이 아니라, 하루를 시작하는 마음, 누군가에게 건네는 말 한마디, 불편한 상황에서 드러나는 태도 속에 조용히 스며 있다. 크리슈나는 아르주나에게 말한다.


“두려워하지 마라.

감각의 욕구를 절제하고,

진리를 향해 나아가라.

자비롭고, 인내심을 지녀라.

겸손하고, 집착을 버려라.” (16.1–3 요약)


크리슈나는 이 장의 서두에서 26가지의 덕목을 쏟아내듯 나열한다. 이 덕목들은 단순한 ‘좋은 성격’이 아니다. 그것은 곧 ‘해탈로 향하는 성품’, 자유를 향한 인격의 뿌리이자, 요가적 삶이 구체적으로 어떤 상태인지를 보여주는 ‘인간 존재의 지표’이다. 그런데 흥미로운 점은, 이 리스트가 이념적 완성이 아니라 실천 가능한 상태로 구성되어 있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보자.


아힘사(비폭력): 단지 ‘타인을 해치지 않는 것’이 아니라, ‘나 자신을 몰아세우지 않는 태도’

아르자밤(정직): 겉으로의 솔직함이 아니라, 내 마음의 흐름과 말과 행동이 일치된 상태

샨티(평정): 외부 자극에 무반응한 것이 아니라, 흔들리되 중심을 잃지 않는 유연함


이처럼 신적인 성품은 특정한 이상을 흉내 내는 게 아니라, ‘내가 무엇을 중심에 두고 살아가고 있는가’를 물음으로써 드러나는 삶의 결이다. 크리슈나는 여기서 ‘신적인 성품(divi-sampad)’이란 “타고난 것이다”라고 말하면서도(16.5), 그것이 “수행을 통해 완성될 수 있다”라고 동시에 말한다. 다시 말해, 누구에게나 신적인 성품의 가능성이 있으며, 그것은 훈련과 자각을 통해 살아 있는 모습으로 드러날 수 있다는 것이다.


여기서 중요한 통찰이 하나 있다. 그것은 “신적인 성품은 성공의 조건이 아니라, 자유의 조건”이라는 것이다. 사회적으로 성공하고, 존경받고, 부를 이루었다고 해서 신적인 존재가 되는 것이 아니다. 반대로 고요하고, 겸손하며, 내면에서 타인을 해하지 않으려는 태도를 지닌 사람은 외적인 조건과 관계없이 해탈의 상태에 한 걸음 더 가까운 존재가 되는 것이다. 크리슈나는 그래서 말한다.


“이런 자는 두려움 없이,

분노 없이,

자비와 절제의 마음으로,

나를 향해 걷는다.” (16.1–3 요약)


이 말은 결국 이렇게 바꿔 말할 수 있다.


“어떻게 살아야 자유로워질 수 있는가?”


그 해답은 삶의 태도에 있다.

‘성취’가 아니라, ‘성품’에 있다.





2. 악마적 성품이란 무엇일까.


— 무지와 탐욕이 이끄는 길, 스스로 파멸을 자초하는 삶


“위선, 자만, 오만, 분노, 거칠고 잔인한 말, 무지.

이런 성향은 악마적 존재에게 속하는 것들이다.” (16.4)


크리슈나는 ‘신적인 성품’과는 반대편에 있는 삶의 방향성을 ‘악마적 성품(āsurī-sampad)’이라 명명한다. 여기서 ‘악마’란 말은 기독교적 개념의 악령이나 범죄자를 뜻하는 것이 아니다. 바가바드 기타에서 말하는 ‘악마성’은 윤리나 도덕의 문제가 아니라, 의식의 상태, 그리고 그것이 초래하는 삶의 구조에 대한 철학적 분별이다. 악마적 성품의 특징은 대체로 다음 세 가지로 요약할 수 있다.


1) 기준 없는 무지(avidyā)


“그들은 무엇이 옳고 그른지도 모르며,

언제 행동하고 언제 멈추어야 할지도 모른다.” (16.7)


크리슈나가 말하는 무지는 단순한 무식함이 아니라, 행위의 경계와 분별이 무너진 상태다. 이들은 절제와 방종, 자유와 충동, 선과 악의 구분을 더 이상 하지 않는다. 욕망을 충족시키는 모든 것이 ‘좋은 것’이라 여기고, 자기감정을 거슬리지 않는 선택이 ‘진실한 것’이라 착각한다. 그런 삶에는 수행의 긴장감도, 깨어있는 성찰도 없다. 그저 즉각적인 반응과 감정의 흐름에 따라 움직일 뿐이다.


2) 삶을 보는 왜곡된 세계관


“세상은 우연히 생겨났으며,

진리도 신도 없다.” (16.8)


이 세계관은 영적인 법칙이나 궁극적 질서를 부정한다. 삶에 의미나 목적이 없다고 여기는 이들은 결국 모든 행위를 쾌락의 수단, 욕망의 도구로 환원시킨다. 이러한 사고는 개인주의나 실용주의와는 다르다. 그것은 삶 자체에 대한 근원적 불신과 허무, 그리고 그 허무 속에서 끝없는 자기 확장만을 추구하게 만든다.


3) 탐욕과 자만의 구조화된 망상


“나는 오늘 부를 얻었고, 내일은 더 벌 것이다.

나는 강하고, 성공했고, 나와 견줄 자는 없다.” (16.13–15 요약)


이들은 자기중심적 사고 안에 스스로를 가둔다. 끊임없이 ‘더 많이’, ‘더 높이’를 추구하며 비교와 경쟁, 소유와 통제 속에서만 자신을 확인한다. 그들에겐 삶은 곧 거래이며, 심지어 종교적 행위조차도 사회적 과시나 자아확장 수단이 된다. 헌신과 베풂은 그저 이름을 남기기 위한 전략일 뿐이다. 크리슈나는 여기서 단호히 말한다.


“이들은 수많은 갈망의 올가미에 묶여

탐욕과 분노에 사로잡히며,

망상의 거미줄에 걸려 결국 지저분한 지옥에 이른다.” (16.10–16 요약)


이 말은 단지 사후에 도달하는 종교적 지옥이 아니다. 그들은 이미 지금, 이 땅 위에서 고통을 자초하는 구조 속에서 살아간다. 삶이 끝없는 불만이고, 타인은 늘 비교의 대상이고, 조금만 실패해도 자기 존재가 무너지는 이들. 그들은 바로 현재의 지옥을 산다. 이 장에서 크리슈나는 독자에게 아주 중요한 질문을 던진다.

조용하고도 날카롭게.


“그대는 지금

어떤 성품을 따라 살아가고 있는가?”


바로 이 질문이, 16장 전체를 관통하는 물음이다. 성공이나 실패보다 앞선, 삶의 방향을 결정짓는 단 하나의 물음이다.





3. 탐욕과 자만의 구조화된 망상


— 경건함조차 이기심의 수단이 될 때


“그들은 자만심이 강하고 완고하며,

부(富)를 자랑삼아 자신을 뽐낸다.

그리고 형식적인 예배를 행하지만,

그 속에는 참된 목적이 없다.” (16.17 요약)


크리슈나는 말한다. 악마적 성품은 단지 충동적이고 감정적인 폭발이 아니라, 매우 정교한 자기 정당화의 구조를 갖는다. 그들은 ‘경건한 척’하며, ‘선행을 하는 척’하며, 그 모든 외형적 행위들을 스스로를 우월하게 만들기 위한 장치로 사용한다. 제사를 올린다. 그러나 그것은 신을 향한 헌신이 아니라, 사람들에게 보이기 위한 연극이다. 자선을 베푼다. 그러나 그것은 타인을 위한 것이 아니라, ‘내가 얼마나 훌륭한 사람인가’를 말하기 위한 수단이다. 형식은 있지만, 진심은 없다. 기억은 있지만, 자각은 없다. 행위는 있지만, 목적이 비어 있다.


“그들은 나를 욕되게 한다.

오만과 이기심, 폭력과 탐욕 속에서

자기 자신뿐 아니라 타인의 내면에 깃든 나를 더럽힌다.” (16.18 요약)


이 문장은 충격적이다. ‘자신뿐 아니라, 타인 안에 있는 나까지 더럽힌다.’ 자기만 타락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탐욕으로 타인에게 상처를 주고, 그로 인해 다른 존재 안의 신성함조차 위태롭게 만든다는 것이다. 그들은 더 이상 누군가와 연결되지 않는다. 자기중심적 욕망이 세계를 향한 모든 시선을 가려버렸고, 의례조차 자신을 위한 도구로 만들었으며, 심지어 신성함마저 자신의 욕망을 위한 수단으로 끌어내렸다. 이것이 악마성의 절정이다.


크리슈나는 여기서 ‘악마’라는 말을 신을 대적하는 특별한 악으로 쓰지 않는다. 그보다는 삶을 수단화하고, 자기 이익을 위해 모든 것을 도구화하는 자를 가리키기 위해 쓴다. 그런 사람은 종교를 해도, 수행을 해도, ‘나’라는 자아의 우상을 더 높이 쌓아 올릴 뿐이다. 바로 그 오만이, 스스로를 가장 깊은 어둠으로 데려간다. 그러니 묻는다.


“당신은 지금,

당신의 선행으로 무엇을 증명하고 싶은가?”

“당신의 수행으로 누구를 넘어설 생각인가?”

만약 그런 마음이 깃들어 있다면,

그 선은 이미 선이 아니다.





4. 어디로 가는가, 누가 끌고 가는가


— 무지의 삶이 반복되는 윤회의 회로

“나는 이 가증스럽고 잔인하고 더러운 인간들을

악마의 자궁 속으로 던져 넣는다.” (16.19)


바가바드 기타에서 가장 강한 어조 중 하나다. ‘던져 넣는다’는 표현은 단순한 문학적 수사일 뿐 아니라, 무지의 길을 끝까지 따른 자의 존재적 귀결을 가차 없이 보여준다. 크리슈나는 여기서 인과의 구조를 말하고 있다. 악마적 성품을 끊임없이 되풀이한 자는 마침내 스스로 선택한 무지의 구조 속에 갇히게 된다는 것이다.


“그들은 생을 거듭할수록 더욱 미혹되어,

지저분하고 어두운 길만 반복하여 따르게 된다.” (16.20 요약)


이는 단지 죽음 이후의 지옥을 묘사한 것이 아니다. 이 생에서도 이미, 우리는 지옥을 반복하며 살아간다. 무지를 버리지 않으면, 그 무지가 우리의 다음 선택을, 다음 생을, 다음 삶의 구조를 결정짓는다. 그리고 그 반복은 더욱 강화된다. 무지는 무지를 낳고, 그 속에서 의식은 점점 더 흐릿해진다.


악마의 자궁은 상징적인 표현이다. 의식을 더 깊은 어둠 속으로 태어나게 하는 토대. 스스로의 삶을 성찰하지 않고, 탐욕과 자만의 구조 안에서만 살아간 이들은, 결국 ‘더 어리석은 나’로 다시 태어나게 된다. 그것은 도덕적 심판이 아니라 존재적 연속성의 결과다.


크리슈나는 우리에게 묻는다.

“그대는 지금 어디로 가고 있는가?”

욕망이 이끄는 삶인가, 지혜가 이끄는 삶인가?


그리고 이렇게 경고한다.

“무지는 선택이다.

그리고 선택은 습관이 되고,

습관은 윤회의 구조가 된다.”


이 물음 앞에서 우리는 더 이상 ‘우연’이라는 핑계를 댈 수 없다. 누구도 우리를 끌고 가지 않는다. 오직 내가 선택하고, 내가 만들어낸 구조가 나를 이끈다. 구나처럼, 업처럼, 성품 또한 하나의 길이다. 그리고 그 길은 지금도 쌓이고 있다. 매일의 말과 생각과 행위 속에서.





5. 해탈의 길, 기준을 되찾는 실천


— 경전을 잊은 삶과 지혜로 나아가는 전환의 시작


“욕망, 분노, 탐욕은

지옥으로 이끄는 세 개의 문이다.” (16.21)


바가바드 기타는 윤회의 고리를 벗어나는 첫걸음을 ‘버림’이라고 말한다. 여기서 말하는 ‘버림’이란 도피가 아니다. 도리어 삶의 한복판에서, 무엇이 나를 파멸로 이끄는지를 자각하고, 그 고리를 하나씩 끊어내는 용기다. 욕망은 의식을 흐리고, 분노는 판단을 어지럽히며, 탐욕은 나를 중심으로 세상을 왜곡시킨다. 이 셋은 고통의 조건을 형성하는 가장 보편적인 뿌리다. 크리슈나는 말한다.


“이 세 가지를 버리면

그대는 영혼의 평화를 얻고,

지고한 길을 향해 나아가게 될 것이다.” (16.22 요약)


이 지점에서 바가바드 기타는 하나의 분기점을 그린다. 인간은 누구나 성향(다르마)을 따라 살아간다. 하지만 그 성향이 무지로 물들어 있다면, 그 삶은 도리어 해탈이 아니라 파멸을 향해 흐른다. 그러므로 반드시 필요한 것이 있다.


“경전의 가르침을 따르라.

하지 말아야 할 것과 해야 할 것을 분별하라.” (16.24 요약)


여기서의 ‘경전’은 단순히 종교 문헌을 뜻하지 않는다. 그것은 올바름을 향한 마음의 기준, 인간다움의 가늠자, 삶의 방향을 비추는 내면의 빛이다. 크리슈나는 말한다. 삶의 기준이 없는 사람은 헌신도, 성취도, 궁극의 기쁨도 얻을 수 없다. 기준을 잃은 삶은 방향 없는 배와 같다. 흔들리고, 부딪치고, 결국 좌초한다. 이 마지막 절은 우리에게 조용히 묻는다.


“그대는 지금,

무엇을 기준으로 살아가고 있는가?”

분별없이 흐르고 있는가,

아니면 다시금 중심을 잡고 있는가?


신적인 삶이란 특별한 수행의 결과물이 아니다. 바른 삶의 방향을 찾고, 그 방향으로 살아가려는 매일의 ‘작은 실천’의 누적이다. 경전을 읽는다는 것은 책을 펴는 일이 아니라, 나의 하루를 열고 돌아보는 일이다. 삶이 흔들릴 때, 이 기준으로 돌아오는 것. 그것이 바로 요가이고, 구원의 시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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