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기와 자유, 그 본질을 묻다.

18장 - 1

by 지안

1. 무엇을 포기할 것인가


— 산야사와 티야가의 구분


“오, 크리슈나여, 포기(sannyāsa)와

초연함(tyāga)은 어떻게 다릅니까?” (18.1)


바가바드 기타 18장은 이렇게 시작된다. 수행과 지혜의 끝자락에 선 아르주나는 이제 더 이상 ‘무엇을 해야 하는가’가 아니라, 정확히 ‘무엇을 놓아야 하는가’를 묻는다. 크리슈나는 여기에 명확하게 대답한다.


“욕망이 일으키는 행위를 포기하는 것을 산야사,

행위의 결과에 대한 집착을 내려놓는 것을 티야가라고 한다.” (18.2)


이 문장은 바가바드 기타 전체를 관통하는 ‘행위의 요가(Karma Yoga)’와 맞물려 있는 철학적 핵심이다. 크리슈나는 단순한 ‘무행위’가 아니라, ‘행위 속에서의 자유’를 추구한다. 그는 물리적인 행위를 그만두는 것을 진정한 포기로 여기지 않는다. 중요한 것은 행위 그 자체가 아니라, 그 행위에 얽힌 집착, 기대, 자아의 동일화를 내려놓는 것이다.


고대의 어떤 현자들은 모든 행위 자체를 포기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들은 세속적인 활동은 물론이고, 제사, 고행, 보시까지도 영적인 진보를 방해하는 속박이라 여겼다. 이에 대해 크리슈나는 단호하게 말한다.


“제사와 고행과 보시는 결코 포기해서는 안 된다.

그것들은 영혼을 정화시키는 길이기 때문이다.” (18.5)


여기서 주목할 점은, 행위를 포기하지 않되, ‘대가를 바라는 마음’을 포기하라는 말이다. 바가바드 기타는 철저히 ‘삶을 살아내는 방식’에 집중한다. 삶에서 도망치는 것이 아니라, 삶 안에서 자유를 발견하는 길. 그것이 바로 티야가, ‘초연함’이다.


그렇다면 왜 이처럼 행위를 완전히 멈추는 ‘산야사’가 아니라, 집착을 내려놓는 ‘티야가’가 강조될까? 그 이유는 명확하다. 인간은 살아 있는 한, 행위를 멈출 수 없기 때문이다. 먹고, 걷고, 말하고, 누군가를 만나고, 감정을 느끼는 것조차도 모두 행위다. 완전한 무행위란 존재할 수 없다. 크리슈나는 말한다.


“육체를 가진 자로서 어떤 행위도 하지 않고 산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18.11)


그래서 진정한 자유는 행위를 멈추는 데 있지 않고, 행위 속에서 묶이지 않는 데 있다. 마치 배우가 무대에 올라 기꺼이 그 배역을 살아내되, 그 배역이 곧 자기 인생은 아니라는 걸 아는 것처럼. 진정한 티야가는 삶이라는 무대를 온전히 살아내되, 그 무대의 결과와 평가에 얽히지 않는 지혜다.


18장의 도입은 바가바드 기타의 철학 전체를 ‘포기’라는 주제로 농축해 낸다. 크리슈나는 포기를 수동적이고 비현실적인 은둔으로 보지 않는다. 그는 말한다. “포기란, 삶을 살아내면서도 붙잡지 않는 마음이다.” 그렇다면 우리에게 물어야 할 질문은 이것이다. “나는 지금 무엇을 포기하고 있는가? 그리고 나는 지금 어떤 마음으로 살아가고 있는가?”





2. 포기의 세 가지 방식


— 구나에 따른 태도 차이


“포기에도 세 가지 방식이 있다.” (18.4)


크리슈나는 말한다. 그는 단순히 ‘포기했다’는 행위 그 자체보다 그 포기를 하는 사람의 태도와 마음의 상태, 즉 ‘기질(구나, guṇa)’에 따라 완전히 다른 결과를 낳는다고 강조한다.


1) 어두운 기질의 포기 — 무지에서 비롯된 도피


“의무를 포기하는 것은 미망에서 비롯된 것이다.” (18.7)


이들은 포기를 ‘피함’으로 이해한다. 자기에게 주어진 일, 지금 해야 할 선택, 그 모든 것을 ‘싫다’는 이유로 내려놓는다. 힘들다는 이유로, 복잡하다는 이유로, 자신의 무게를 스스로 감당하려 하지 않는다. 하지만 크리슈나는 단호히 말한다. 의무 자체를 버리는 것은 포기가 아니라 무지의 또 다른 이름이다. 이런 포기는 결국 더 큰 혼란과 후회를 낳는다.


2) 격정적인 기질의 포기 — 고통 회피의 포기


“괴로움을 두려워하여 행위를 포기하는 것,

그것은 라자스에서 비롯된 것이다.” (18.8)


이들은 손익 계산으로 포기를 선택한다. 그 길이 나에게 고통을 줄 것 같으면, 혹은 실패의 가능성이 있다면, 애초에 시작조차 하지 않으려 한다. 이들은 두려움과 계산에서 오는 포기를 선택한다. 하지만 크리슈나는 말한다. 이런 포기는 진정한 해방이 아니라, 오히려 또 다른 속박이다. 고통을 피하려는 마음이 결국 또 다른 두려움의 씨앗이 되기 때문이다.


3) 밝고 고요한 기질의 포기 — 초연함에서 비롯된 실천


“마땅히 해야 할 일을 행하되,

결과에 집착하지 않고 포기하는 것,

이것이 사트바에서 비롯된 포기다.” (18.9)


이것이 크리슈나가 말하는 ‘진짜 포기’다. 하기로 한 일은 한다. 하지만 거기에 스스로를 걸지 않는다. 성공해도 들뜨지 않고, 실패해도 무너지지 않는다. 그는 안다. 행위는 나의 것이지만, 그 결과는 나의 것이 아님을. 이러한 포기는 겸허하다. 책임을 회피하지 않되, 그 무게에 짓눌리지 않는다. 그는 자신의 의무를 숙명으로 여기되, 그 의무에 자신을 가두지 않는다. 그래서 그는 오히려 자유롭다. 이런 사람에게서 우리는 조용한 존엄을 본다.


크리슈나는 한 걸음 더 나아가 이렇게 말한다.


“포기한 사람은

싫은 일을 피하지 않고,

좋아하는 일에 집착하지 않는다.” (18.10)


좋아서 하고, 싫어서 하지 않는 것이 아니다. 그는 묻는다. “이 일이 내게 주어진 일인가?” 그리고 거기에 응답할 뿐이다. 사트바적인 포기는 그만큼 깊은 내적 분별에서 비롯된다. 좋고 나쁜 감정의 기복 위가 아니라, 더 깊은 다르마의 지점에서 움직인다.


우리는 흔히 ‘포기’라는 말을 무력감과 함께 쓴다. “난 그만둘래.” “도저히 안 되겠어.” 하지만 바가바드 기타의 세계에서 포기란 자유를 위한 선택이다. 도망치기 위한 게 아니라, 붙잡지 않기 위한 포기. 크리슈나는 그것을 통해 ‘진정한 티야기(tyāgī), 포기의 사람’이 되는 길을 보여준다. 그는 말한다.


“결과에 대한 집착을 버리는 사람은

행위의 열매에 얽매이지 않고

초월적 자유를 누린다.” (18.12)


여기서 크리슈나는 우리에게 한 가지 조용한 물음을 남긴다. “당신이 지금 내려놓고 있는 것은 도피인가, 자유인가?” 그 선택의 깊이에 따라, 우리가 걷는 길의 성격도 달라질 것이다.





3. 참된 포기의 열매


— 아무것도 바라지 않기에 얻게 되는 자유


우리는 종종 이렇게 말한다. “나는 내 역할을 다했으니, 그만큼의 보상은 당연히 받아야 해.” 하지만 바가바드 기타에서 크리슈나는 묻는다. “그대는 그 행위의 결과까지 정말로 그대의 것이라 말할 수 있는가?” 크리슈나는 이렇게 말한다.


“육체를 가진 자로서

어떤 행위도 하지 않고 살아갈 수는 없다.” (18.11)


이 문장은 중요한 진실을 담고 있다. 삶은 곧 행위다. 우리는 숨을 쉬고, 선택하고, 반응한다. 그러므로 해탈은 행위를 멈추는 것이 아니라, 그 행위에서 자유로워지는 것이다. 그렇다면 무엇으로부터 자유로워질까? 바로 ‘결과에 대한 집착’이다. 크리슈나는 말한다.


“행위의 결과를 바라는 자는

즐거움과 고통, 그 둘이 섞인 열매를 맛본다.

그러나 집착하지 않는 자는

그 열매로부터 자유롭다.” (18.12 요약)


여기서 말하는 ‘열매’는 단순히 성공이나 실패가 아니다. 그 결과에 매달리는 마음, 그로 인해 생겨나는 기대와 실망, 성과를 통해 자신을 증명하려는 집착. 이 모든 것이 우리를 묶어두는 줄이 된다. 그래서 크리슈나는 포기의 진짜 목적을 이렇게 밝힌다. “포기는 무력함이 아니라, 자유를 위한 선택이다.”


진정한 포기(tyāga)는 “내가 결과를 통제할 수 있다”는 착각에서 벗어나는 일이다. 그래서 포기한 자는 더 이상 흔들리지 않는다. 성공해도 교만하지 않고, 실패해도 자책하지 않는다. 결과가 뜻대로 되지 않아도, 그는 자기 길을 잃지 않는다.


크리슈나는 이런 이를 ‘티야기(tyāgī)’, 곧 ‘포기의 사람’이라 부른다. 그는 아무것도 바라지 않기 때문에, 어떤 결과도 받아들일 수 있다. 자신을 결과가 아닌 의미의 자리에 둔다. 그렇기에 그는 비로소 행위 속에서 자유롭다.


이러한 포기는 결코 도망이 아니다. 자신에게 주어진 다르마를 기꺼이 수행하되, 그 행위를 ‘자기 자신’과 동일시하지 않는 삶. 결과가 나를 결정짓지 않고, 세상의 평가가 나의 가치를 증명하지 않는다는 확신. 그것이 바로, ‘포기의 열매’로서의 자유다.


스스로에게 물어보자. “나는 지금 어떤 결과를 쥐고 살아가고 있는가?” “그 쥠이 나를 붙잡고 있지는 않은가?” 그 쥔 마음을 놓아버릴 때, 비로소 삶은 다시 흐르기 시작한다. 자유란, “원하지 않음”이 아니라 “붙잡지 않음”에서 온다. 그리고 그것이야말로 크리슈나가 말하는 참된 포기의 열매다.





4. ‘나’는 행위자가 아니다.


— 다섯 가지 행위의 구성 요소


우리는 종종 말한다. “내가 이 일을 했다.” “내가 그 선택을 했다.” “내가 잘못했고, 내가 해냈다.” 그런데 크리슈나는 이 장에서 그 ‘내가’라는 말에 질문을 던진다. “정말로 ‘너’가 행위자인가?” 그는 상키야 철학의 관점을 빌려 말한다.


“모든 행위는 다섯 가지 구성 요소로 이루어져 있다.” (18.13)


1. 행위가 일어나는 장소 — 몸(육체)

2. 행위를 수행하는 주체 — 행위자(자아)

3. 행위를 일으키는 기운 — 생명 에너지(프라나)

4. 감각기관의 작용 — 눈, 귀, 손, 발, 언어 등

5. 선택하고 조율하는 힘 — 의지력(분별의 능력, 붓디)


이 다섯 가지가 함께 작동하며, 하나의 행위가 탄생한다. 그중 하나라도 빠지면, 행위는 일어날 수 없다.


예를 들어 생각해 보자. 어떤 사람이 글을 쓴다. 그는 펜을 들고 종이에 문장을 써 내려간다. 그때 실제로 작동하는 것은 무엇인가? 그의 몸이라는 ‘장소’에서, 그의 손이라는 ‘감각기관’이, 그의 기운과 에너지를 통해 움직이고, 그 속에 담긴 생각과 의지, 그리고 그 선택을 가능케 한 내적 분별력. 이 모든 것이 함께 일어날 때, 비로소 하나의 ‘글쓰기’라는 행위가 완성된다. 그런데 그는 이렇게 말한다. “내가 썼다.” “내가 했다.” 하지만 크리슈나는 묻는다.


“그 모든 조건들이 충족되지 않았다면,

과연 너는 무엇을 할 수 있었는가?” (18.14–15 요약)


이 깨달음은 삶에 대한 완전히 새로운 관점을 열어준다. 우리는 수많은 행위 속에서 ‘나’를 중심에 두지만, 사실 우리는 수많은 조건과 구조 속에서 단지 흐름에 참여하고 있을 뿐이다. 그래서 크리슈나는 단호하게 말한다.


“행위의 구성 원리를 이해하지 못하는 자는

자신을 행위자라고 착각한다.” (18.16)


그리고 그는 아주 중요한 결론을 덧붙인다.


“자신을 행위자로 여기지 않는 자는

어떤 행위를 해도 죄에 물들지 않는다.” (18.17)


이 말은 무책임함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가장 깊은 책임의 자각이다. 그는 안다. ‘나’는 모든 행위를 지배하는 중심이 아니라, 그 흐름의 일부이며, 그 흐름 속에서 분별하는 존재라는 것을. 그는 자신의 에고를 내려놓았기에, 그 어떤 행위에도 휘둘리지 않는다. 그래서 비록 외적으로는 수많은 일을 하고 있어도, 그의 내면은 고요하다. 그는 흔들림 없이 머물 수 있다.


이 부분은 바가바드 기타 전체에서 가장 핵심적인 통찰 중 하나를 전해준다. “자신을 행위자로 보지 않는 자는, 자유롭다.” 이 말은 모든 책임을 외면하라는 것이 아니라, 행위 속에서 일어나는 자기 동일화의 속박을 벗어나라는 것이다. “내가 했다.”는 집착을 버릴 때, 그대는 결과에도 집착하지 않게 되고, 그래서 어떤 성취든 실패든 더 이상 그대를 흔들지 못하게 된다.


크리슈나는 조용히 말한다. “네가 하는 모든 행위 속에서도, 너는 ‘그 모든 것 너머에 있는 존재’다.” 그 말을 기억하며 오늘 하루를 살아간다면, 삶은 조금 더 가볍고, 조금 더 자유로워질 것이다.





5. ‘앎’은 보는 방식이다.


— 세계를 바라보는 눈, 나를 규정하는 시선


우리는 흔히 ‘앎’(jñāna)을 정보라고 생각한다. 많이 아는 사람이 똑똑한 사람이고, 지식이 풍부한 사람이 지혜로운 사람이라고 말한다. 하지만 크리슈나는 말한다.


“진짜 앎이란,

‘무엇을 보느냐’가 아니라

‘어떻게 보느냐’다.” (18.20–22 요약)


크리슈나는 세 가지 앎의 길을 말한다.


1. 사트바의 앎

“모든 존재 안에 하나의 실재(브라만)를 보는 것.” (18.20)

- 분리되어 있는 것처럼 보여도, 본질은 하나라는 통찰.

- 나와 너, 인간과 자연, 삶과 죽음조차 본래 하나의 흐름임을 아는 눈.


2. 라자스의 앎

“모든 것을 따로 구별된 존재로 보는 것.” (18.21)

- 너는 너, 나는 나. 성공과 실패, 강함과 약함, 끝없는 비교의 프레임.

- 이 앎은 쪼개고, 구분하고, 경쟁하게 만든다.


3. 타마스의 앎

“한 조각의 일부를 전체로 착각하는 것.” (18.22)

- 무지가 만드는 왜곡된 세계관.

- “세상은 원래 그래”, “내가 본 게 전부야”라고 말할 때의 경직된 인식.


크리슈나는 말한다. 진짜 지혜란, 모든 차이를 꿰뚫고 중심을 보는 시선이다. 많은 이들이 사람을 겉모습, 배경, 능력, 말투로 판단한다. 하지만 사트바의 앎을 지닌 자는 묻는다. “그 존재의 본질은 무엇인가?” 남과 나를 나누기 전에, 그 존재도 나처럼 고통을 겪고, 사랑을 원하고, 삶을 살아가는 존재임을 기억하는 것. 그 앎은 사람을 바꾸고, 삶의 태도를 바꾼다.


같은 상황, 같은 사람, 같은 세상을 두고도 어떤 이는 고통을 보고, 어떤 이는 가능성을 본다. 어떤 이는 남 탓을 하고, 어떤 이는 내 안의 선택을 본다. 그 차이를 만드는 건 시선이다. 바로 그 시선이 그 사람의 앎이다. 그러니 크리슈나는 계속해서 우리에게 묻는다. “그대는 지금, 세상을 어떤 눈으로 보고 있는가?”


사트바의 앎은 모든 것을 하나의 흐름으로 본다. 그래서 경쟁보다 연결, 분노보다 이해, 분리보다 공존의 길을 걷게 된다. 그 앎은 다른 사람을 위한 길이기도 하지만, 무엇보다 자기 자신을 위한 해방의 길이다. 왜냐하면, 이 세상은 ‘분리’의 프레임으로 보는 순간부터 고통이 시작되기 때문이다.


크리슈나는 단순한 철학을 말하지 않는다. 그는 삶의 방식, 세계를 이해하는 틀, 그 틀을 바꾸는 연습을 말한다. 이제 그 앎은 지식이 아니라 태도이며, 설명이 아니라 시선이 된다. 그러니 오늘 하루, 아주 작게 이렇게 시작해 보면 어떨까? 누군가를 보기 전에 한 박자 멈추고, 그 안의 고요를 떠올리는 것. 겉으로 드러난 말과 행동 뒤에, 그가 가진 이야기의 결을 상상하는 것. ‘저 사람은 원래 그래’라는 말 대신, ‘그럴 수도 있었겠구나’라고 말해보는 것. 이 모든 것이, 크리슈나가 말한 참된 앎의 시작이다.


사물과 사람을 바라보는 눈, 그 눈이 바로 지금 당신의 삶을 빚어내고 있다. 그리고 그 눈이, ‘포기’와 ‘자유’의 길에서 가장 먼저 깨어나야 할 곳이다.





6. 행위의 성격과 그를 따르는 사람들


— 삶의 방향을 정하는 태도


우리는 하루에도 수십 번의 결정을 한다. 말을 건네는 방식, 일을 대하는 태도, 누군가에게 등을 돌리는 순간까지. 그 모든 선택은 결과보다 먼저, 우리 안의 기질을 드러낸다. 크리슈나는 여기서 말한다.


“행위도, 행위자도, 그것을 보는 분별력도

세 가지 기질(구나)에 따라 다르게 드러난다.” (18.23–35 요약)


그는 이 차이를 통해, 우리가 지금 어떤 삶을 살고 있는가, 그리고 무엇을 향해 살아가고 있는가를 조용히 비춰준다.


사트바 — 조용히 나아가는 사람들


사트바의 행위는 ‘해야 할 것을 묵묵히 하는 것’이다.

좋고 나쁨, 이익과 손해, 감정의 기복에 흔들리지 않고

마땅히 할 일을 흔들림 없이 이어가는 태도. (18.23)


사트바의 행위자는 이기심이 없다.

그는 행위의 결과를 움켜쥐지 않고,

성공과 실패를 똑같이 받아들이며

오히려 과정 속에서 자유를 찾아낸다. (18.26)


이런 사람은 조용하다.

소란스럽지 않지만 단단하다.

세상의 판단보다, 자신의 내면 기준에 따라 움직인다.

그 내면이 곧 중심이 된다.



라자스 — 갈망으로 움직이는 사람들


라자스의 행위는 뜨겁고, 강렬하며, 목적지향적이다.

그들은 ‘원한다’는 마음에서 출발하고,

그 욕망을 실현하기 위해 온 힘을 기울인다. (18.24)


그들이 원하는 것은 결과다.

더 많이, 더 빨리, 더 높이.

그 행위자는 늘 비교하고, 경쟁하며,

세상이 인정해 주는 자리에서 스스로를 증명하려 한다. (18.27)


그런 삶은 한순간 찬란하지만, 쉽게 지친다.

쾌락은 사라지고, 만족은 오래가지 않는다.

행위의 외형은 커져도, 내면은 점점 텅 비어 간다.



타마스 — 무지로 내몰리는 사람들


타마스의 행위는 충동적이며, 무분별하고, 무책임하다.

무엇이 옳고 그른지를 따지지 않고

그저 눈앞의 감정에 휘둘려 움직인다. (18.25)


그는 고통을 주는지도 모르고,

자기 능력을 넘는 것도 모르며,

결과가 무엇일지도 생각하지 않는다.


타마스의 행위자는 게으르고, 무기력하며, 쉽게 포기한다.

무언가를 시작하지만 지속하지 못하고,

누군가를 원망하지만 정작 자신을 돌보지 않는다. (18.28)


이러한 삶은 외면하고 싶은 현실이지만,

우리 안의 그림자로서 늘 존재한다.



크리슈나는 우리에게 이렇게 묻는다. “그대의 행위는 지금 어디에서 비롯되고 있는가?” 결과를 쥐기 위해 몸부림치는가? 두려움과 회피로 피하고 있는가? 아니면, 조용히 그러나 단단히 자기 삶을 살아가고 있는가? 크리슈나는 말한다.


“앎, 행위, 행위자, 분별력, 의지력, 행복”

이 모든 것이 세 가지 기질 속에 물들어 있다. (18.18–35)


그러니 우리는 언제든 돌아보아야 한다. 지금 내가 말하는 이 말는 어디서 비롯된 것인가? 지금 내가 내딛는 이 발걸음은 어떤 방향을 향하고 있는가? 삶은 결과로 정의되지 않는다. 삶은 태도로 만들어진다. 그리고 그 태도는 곧, 내가 지금 어떤 성품을 따라 살아가고 있는지를 보여주는 가장 정확한 거울이다.

이전 19화삶은 하나의 제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