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정말 누구일까

흔들림 이전의 ‘나’에 대한 존재적 질문

by 지안

들어가는 말.


때때로 우리는 너무 쉽게 나를 정의한다.


“나는 소심한 사람이다.”

“나는 감정 기복이 심한 사람이다.”

“나는 사랑받지 못할 사람인가 보다.”


하지만 그런 말들 하나하나가 사실은 ‘상황에 반응한 나’ 일뿐, ‘진짜 나’는 아닐 수 있다. 그렇다면 나는 누구일까? 감정보다 깊고, 성격보다 본질적인 흔들림 이전의 나란 어떤 존재일까? 요가는 이 질문을 ‘아트만 (Ātman)’이라는 개념으로 풀어간다.





1. 요가에서 말하는 ‘나’


— '아트만'이란 무엇인가?


우리는 흔히 말한다. “나는 감정이 풍부한 사람이야.” “나는 소심하고 눈치를 많이 봐.” “나는 감정에 휘둘리곤 해.” 그러나 요가는 묻는다. “그 감정이 지나간 뒤에도 남아 있는 그대는 누구인가?” “감정은 그대의 일부일 수는 있어도, 그대의 전부는 아니다.”


요가 철학은 인간을 ‘겉으로 드러나는 나’가 아닌, 그 모든 감정과 생각의 움직임을 ‘알아차리고 있는 나’로 이해한다. 그 중심에 놓여 있는 것이 바로 아트만(Ātman). 흔들리지 않는 존재의 실재, 의식의 근원이다. 아트만은 감정도, 생각도, 성격도 아니다. 감정은 일어났다가 사라진다. 생각은 흐르고 바뀌고 흩어진다. 기억은 조각나고, 성격은 경험에 따라 변형된다. 하지만 그 모든 ‘변화’를 알아차리고 있는 ‘변하지 않는 무언가’가 있다. 요가는 바로 그 대상을 아트만이라 부른다.


예를 들어, 바쁜 하루 끝, 방에 혼자 누워 천장을 바라볼 때 아무 생각도 들지 않는데 문득 ‘나는 그냥 존재하고 있다’는 느낌이 밀려올 때가 있다. 또는, 한참을 걷다가 문득 발걸음을 멈췄을 때, 길가에 피어있는 풀꽃들을 바라볼 때, 산책하는 강아지나 길고양이들을 마주했을 때 그 순간에 온전히 존재하는 나를 느끼는 경험.


그리고, 사람들과 어울리다 문득 혼자가 된 순간, 갑자기 주변이 조용해지고, 마음도 말도 줄어드는 그 고요 속에서 스치듯 “이게 나였지” 하고 생각하게 되는 때도 있다. 또 어떤 날은, 갑작스레 들려오는 새소리, 걷다 멈춘 바람, 커피 한 모금을 마시며 멍하니 있을 때, 그 모든 외부가 흐르고 있는 와중에도 내 안은 멈춰 있는 듯한 순간. 그건 감정도 아니고, 생각도 아니다. 요가는 그 무언가를 아트만이라 부른다. 늘 존재하지만, 조용할 때에만 들리는 아주 작고 단단한 나의 중심.


바가바드 기타는 아트만을 다음과 같이 말한다.


“아트만은 죽지 않는다.

그것은 태어나지도 않고, 사라지지도 않는다.

칼에 베이지 않고, 불에 타지 않으며,

바람에 말라버리지도 않는다.” (2.20 요약)


이것은 단지 신비주의적 언어가 아니다. 요가는 말한다. “진짜 그대는, 조건 이전에 존재한다.” 아트만은 관념이 아니라, 자각의 자리다. 아트만은 철학적 추상이 아니다. 그건 깨어 있는 자각의 중심이며, 내가 아무것도 하고 있지 않아도 여전히 살아 있는 의식이다. 요가는 말한다. 아트만은 행위 이전의 나, 기대 이전의 나, 불안 이전의 나, 그리고 성취 이전의 나이다.


우리는 자주 “나는 무가치해” “나는 아직 부족해”라고 느낀다. 그러나 요가는 그것이 진짜 나의 정체가 아니라, 생각이라는 파도가 만든 허상일 수 있다고 말한다. 아트만은 ‘고정된 나’가 아닌 ‘지속되는 나’인 것이다. 현대인에게 아트만은 더 이상 종교적 언어나 영적 개념일 필요는 없다. 그것은 오히려 이렇게 다가올 수 있다.


하루의 끝에서, 모든 일이 흐릿해지고, 모든 감정이 지나가고 난 뒤에도 여전히 ‘나로 남아 있는 무언가’. 어떤 상황에서도, 어떤 평가 속에서도 “나는 이것보다 더 깊은 존재야”라고 속으로 속삭일 수 있게 하는 감각. 그 조용한 감각. 그게 바로 요가에서 말하는 아트만이다. 요가는 궁극적으로, 우리를 ’좋은 사람이 되게’ 만드는 수련이 아니라, ‘진짜 나에게 정직하게 돌아가게’ 하는 수련이다.


그러니 ‘나는 누구인가?’라는 물음은

우리의 부족함을 드러내는 질문이 아니라,

우리의 변하지 않는 가능성을 일깨우는 문장이다.





2. 장자의 나비, 그리고 나


“나는 진짜 누구인가?”


이 물음은 철학의 시작이자, 동시에 삶의 가장 오래된 혼란이다. 요가는 이 질문에 ‘아트만’이라는 고요한 대답을 제시한다. 그리고 동양의 또 다른 지혜, 장자는 그 대답조차 잠시 내려놓고 다시 묻는다. 장자의 제물론(齊物論)에는 유명한 구절이 있다.


“옛날에 나, 장주는 꿈에 나비가 되었다.

팔랑팔랑 날아다니며 기분 좋게 살았고,

내가 장주인 줄은 몰랐다.

그런데 문득 깨어보니 분명히 나는 장주였다.

그렇다면 나는 장주가 나비의 꿈을 꾼 것인가,

아니면 나비가 장주의 꿈을 꾸고 있는 것인가?”


이 질문은 단지 꿈과 현실의 경계를 넘나드는 이야기로 보이지만, 장자가 정말로 묻고 싶었던 것은 이것이다. “내가 믿고 있는 이 ‘나’라는 정체성은 정말로 분명하고 확고한 것인가?” 장자에 따르면, ‘나’라는 자아는 늘 어떤 상황 속에서 만들어지고, 그 상황이 바뀌면 ‘나’의 정체성도 쉽게 달라진다. 기분에 따라, 역할에 따라, 관계에 따라 우리는 달라진다. 그리스 가면극에서 사용됐던, 지금은 사회적 가면이라는 의미로 쓰이는 '페르소나'와 비슷한 개념이다.


장자는 이런 유동적인 자아의 상태를 자연의 흐름처럼 받아들이기를 권한다. 즉, 그는 ‘고정된 나’를 찾으려 하기보다 흐름 자체가 나임을 인정하라고 말한다.


“큰 깨달음을 얻은 자는

사물의 차별을 하지 않고,

나와 남, 삶과 죽음, 성공과 실패의 경계를 넘는다.”


요가 철학은 이 흐름과 약간 다르게, 흔들리는 자아의 껍질 너머에 ‘항상 존재하는 나’, 아트만(Ātman)이 있다고 말한다. 모든 생각, 감정, 기억이 바뀌어도 그 모든 변화를 지켜보고 있는 고요한 중심. 그것이 바로 아트만이다.


그러나 흥미로운 점은, 장자의 ‘무아의 자유’와 요가의 ‘진아(眞我)의 자각’은 정반대에서 시작해 결국 ‘고정된 자아에 휘둘리지 않는 자유’라는 같은 자리에서 만난다는 것이다. 장자는 고정된 자아의 허상을 깨뜨린다. 그는 우리가 붙들고 있는 모든 정체성을 의심한다. “나는 이런 사람이야”라고 말하는 순간, 그는 말없이 웃으며 “내일은 아닐 수도 있겠지”라고 응수한다. 그런 장자의 사유 속에서 ‘진짜 나’란 없다. 대신 그는 말한다.


“변화하는 것, 흘러가는 것,

그것들과 함께 바람처럼 가볍게 살라.”


그러나 요가는 이 질문을 다르게 완성한다.

“그 변화하는 모든 것을 바라보는 자는 누구인가?”


모든 흐름이 지나간 뒤에도, 슬픔이 사라진 뒤에도, 고요히 남아 있는 ‘의식의 자리’, 그것이 바로 아트만이다. 장자는 자아를 해체하며 자유로 나아가고, 요가는 자아의 중심을 인식함으로써 자유에 닿는다. 다르게 걸어가지만, 같은 결론에 닿는 두 여정이다. 그래서 우리는 이렇게 다시 질문하게 된다.


지금 내가 말하는 ‘나’는 내가 꾸고 있는 하나의 꿈은 아닐까? 어떤 조건과 감정이 만들어낸 일시적인 나에 불과한 것은 아닐까? 그리고 그 질문 앞에서, 장자는 슬며시 웃으며 말할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너는 바람처럼 자유로울 수 있어.” 이어서 요가가 조용히 대답할 것이다. “그 자유는, 그 모든 것을 바라보는 마음. 참나. 아트만. 고요한 중심에서 시작된다.”





3. 사르트르와 융이 말하는 나.


‘나는 누구인가’라는 질문은 단지 고대의 철학자들만의 고민이 아니다. 20세기의 철학자와 심리학자들도 이 질문 앞에서 깊이 머물렀다. 그중 한 명이, 사르트르(Jean-Paul Sartre)다.


사르트르 : 인간은 본질 없는 존재이다.


사르트르는 말한다.


“존재는 본질에 앞선다.”


즉, 인간은 태어날 때부터 어떤 정체성을 지닌 채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선택과 행동을 통해 스스로를 만들어가는 존재라는 것이다. 요가에서는 우리가 본래 가지고 있는 ‘변하지 않는 진아’(아트만)에 귀의하려고 하지만, 사르트르는 그런 본질은 애초에 없다고 단언한다.


그에게 있어 ’나는 누구인가?’라는 질문은 답을 찾는 것이 아니라, 답을 ‘만들어가는’ 긴 여정이다. 하지만 역설적으로, 이 사르트르의 철학은 요가의 자유 개념과 겹친다. 왜냐하면 요가에서도 ‘아트만’을 인식하기 위해선 끊임없이 나를 관찰하고, 선택하고, 실천하는 삶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아트만은 준비되지 않은 상태에서는 결코 드러나지 않는다. 수동적으로 발견되는 게 아니라, 의식적인 삶 속에서 자각되는 중심이다. 그러므로 사르트르가 말하는 “네가 누구인지, 너의 행위로 증명하라”는 말은 요가의 실천적 수련과 겹쳐지는 지점이 있다.


“진아는 완성된 형태로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반복되는 선택과 알아차림 속에서 서서히 드러나는 것.”



칼 융 : 페르소나와 자기를 구별하는 일


융(Carl Jung)은 한 걸음 더 들어가 인간의 내면 구조를 탐구했다. 그는 인간이 살아가면서 자신도 모르게 ‘페르소나(persona)’, 즉 사회적 가면을 쓰고 살아간다고 말했다. 우리는 누군가의 딸이자 아들, 누군가의 선생이고, 연인이고, 친구다. 그리고 그 관계 안에서 역할에 맞는 감정을 표현하고, 행동을 선택한다.


그런데 문제는, 이 ‘페르소나’가 나의 전부인 줄 알고 살아가는 데 있다. 융은 말한다.


“자기를 잊고, 가면에 몰입할 때,

인간은 자기 삶에서 멀어진다.”


요가도 같은 통찰을 품고 있다. 요가에서 말하는 아트만은 ‘가면 너머의 나’다. 그것은 누가 나를 좋아하든 말든, 어떤 평가를 받든, 어떤 역할을 하든 그 모든 껍질 아래에서 여전히 살아 있는 중심의식이다. 융은 이것을 ‘자기(Self)’라고 불렀고, 요가는 그것을 ‘아트만(Ātman)’이라 불렀다.


융은 심리의 통합을 통해 자기를 실현해야 한다고 말한다. 그건 억압된 감정을 인정하고, 무의식을 들여다보고, 페르소나 너머의 자기 내면을 받아들이는 과정이다. 요가는 식별과 관찰을 통해 아트만을 인식한다. 그건 감정과 감각의 파동을 조용히 바라보며 그 너머에서 살아 있는 존재를 기억하고 인식하는 일이다.


방식은 다르지만, 두 사람은 공통적으로 말한다.


“지금 너라고 믿고 있는 것이

진짜 너는 아닐 수도 있다.”


“진짜 너는,

더 깊은 자리에 고요히 기다리고 있다.”


사르트르는 말한다. “너는 본질을 만들어가는 존재다.” 요가는 대답한다. “그 만들어가는 삶의 가장 깊은 곳에, 사라지지 않는 너의 자리가 있다.” 융도 조용히 말한다. “가면을 잠시 벗고, 너의 안으로 들어가라. 진짜 너는 이미 거기 있다.” 이처럼, 사르트르와 융이 보여준 ‘나’에 대한 실존적·심리학적 사유는 결국 아트만이라는 요가적 개념과 다르지만, 동시에 그 가치를 비춰주는 거울이 되어준다.


우리는 고정된 나도 아니고, 완성된 나도 아니다. 그렇기에, 요가는 이렇게 말한다. “그러니, 다시 ‘너’를 바라보라. 그리고 그 모든 역할과 감정 뒤에 남아 있는 그 조용한 중심이 너다.”





4. 일상 속에서 아트만을 느끼는 순간들


“진짜 나는 어디에 있을까?”


우리는 대부분 나라는 사람을 감정이나 성격으로 정의한다. “내 MBTI는 뭐야.” “나는 늘 눈치를 봐.” “나는 외로움에 취약한 사람이야.” 하지만 그 모든 말은 사실 ‘어떤 상황 속에서의 나’ 일뿐이다. 요가는 묻는다. “그 상황이 사라진 뒤에도, 여전히 늘 거기 있는 '나'는 누구인가요?”


우리는 매일 ‘진짜 나’를 잊으며 산다. 해야 할 일, 잘 보이고 싶은 마음, 무언가를 이루려는 다짐, 그 모든 것들이 겹겹이 쌓이며 ‘진짜 나’를 덮는다. 하지만 사라지진 않는다. '나'는 언제나 우리 안에 고요하게 남아 있다.


진짜 나를 마주하는 순간들은, 언제나 조용히 찾아온다. 아침 햇살이 방 안으로 스며들 때 문득, 숨을 멈춘 듯한 조용함과 함께 “아, 나 여기 있었지” 하고 느껴지는 때가 있다. 누군가를 기쁘게 했을 때보다 누군가를 있는 그대로 바라봐주었을 때 “내 마음이 더 평화롭다”라고 느껴질 때도 있다. 수많은 생각을 하다 지쳐 말없이 창밖을 바라보는 순간, 머릿속도, 감정도 멈췄는데 마음만은 뭔가 살아 있는 느낌이 드는 순간. 그리고 아무도 없을 때 나는 아무 역할도 하지 않는데 존재 그 자체로 가만히 숨 쉬고 있는 나를 알아차리는 때. 그 순간들 속에서 우리는 감정도, 이름도, 성취도 없이 그냥 ‘존재하는 나’를 다시 만난다.


요가는 이 순간을 아트만을 알아차리는 순간이라 말한다. 그건 깨달음의 섬광이 아니다. ‘나’를 찾아야겠다는 의지의 결과도 아니다. 오히려 그 반대다. 애써 찾는 것을 멈출 때, 지켜보는 것을 포기하지 않을 때, 아무것도 되려고 하지 않을 때. 그제야 진짜 내가 조용히 고개를 든다. 그렇다면, 나는 어떻게 ‘진짜 나’를 다시 만날 수 있을까?


그 질문에 요가는 화려한 대답을 내놓지 않는다. 대신 이렇게 말한다. 침묵을 낼 수 있는 시간을 만들어보라. 말하지 않아도 괜찮은 순간,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괜찮은 공간 속에서 당신은 ‘존재’를 다시 기억하게 된다. “감정이 올라올 때, 반응보다 관찰을 선택하라.” 그 감정을 느끼는 나와, 그걸 바라보는 나 사이에는 틈이 있다. 그 틈을 찾는 것이 ‘나’를 만나는 첫걸음이다. “모든 것에 휩쓸리지 말고, 나에게 잠시 머물라.” 핸드폰을 내려놓고, 눈을 감고, 한 번의 숨을 끝까지 들이쉬고 내쉬는 것만으로도 당신은 다시 자기 안으로 들어올 수 있다. 요가는 말한다.


“그대는 부족해서가 아니라,

잠시 길을 잃었을 뿐이다.”


진짜 나는 사라진 적이 없다. 그저 일의 파도 속에서, 관계의 기대 속에서, 감정의 굴곡 속에서 잠시 ‘보이지 않았을 뿐’이다. 그래서 요가는 매일같이 우리에게 초대장을 건넨다.


“잠시 멈춰,

아무것도 되려 하지 말고,

그냥 네가 거기에 있다는 사실만으로

충분하다는 걸 기억해.”


“그때,

당신은 다시 ‘나’와 만날 수 있을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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