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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지안 Feb 02. 2024

월급 루팡을 아시는지요?

몇 개월 전, 알쓸별잡에서 소개된 책 ‘가짜 노동’을 읽었다. 저자 둘은 본인이 직접 겪고, 느꼈던 노동의 비효율을 소개하는 것과 더불어 비슷한 경험과 느낌을 가진 많은 사람을 직접 인터뷰하고 증명한다. 결론은 적어도 현시대를 살아가는 대부분의 직장인들이 직장에서 허위허식을 하며 삶의 소중한 시간을 축내고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 대가는 회사도 회사지만 당사자들에게 직격타로 찾아와 극심한 스트레스에 시달리고, 심하면 정신 질환까지 겪게 된다는 것이다.

거두절미하고. 본인이 조금이라도 직장에서 회의감을 느끼고, 번아웃을 느꼈다면 직접 읽어보길 추천한다. 이 책을 통해 해결책을 찾는 것도 뜻깊지만, 각자가 그동안 느꼈던 복잡 미묘한 답답함을 누군가 정성스레 정리한 글을 통해 본다는 것과 나만 느끼는 불합리가 아니라는 깨달음 만으로도 상당히 큰 해소감을 느낄 수 있기 때문이다.


출근을 하고 본격적으로 몰입해서 업무를 하는 시간은 얼마나 될까. 지난 두 달간 평균치를 내보니 하루 8시간 중 약 4시간 20분 정도였다. 솔직히 나머지 시간은 빈둥거리며 딴짓을 하는 시간이었다. 물론 직책과 업종에 따라 충분히 다를 수 있는 결과다. 그래서 지인들에게도 물었다. 10명의 지인은 각각 공기업, 대기업, 서비스업, 중소기업에 속해 있어서 나름 의미 있는 통계 표본이었다. 결론은 그들 모두 나와 비슷한 수준의 노동 시간을 가졌다. 다른 동료들을 봐도 본인들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는 말도 덧붙였다. 나머지 시간은 정말 회사에 있을 필요도 없는 시간이었다. 그야말로 월급 루팡을 하는 거다.


난 이 책을 읽기 훨씬 전부터 느끼고 있었다. 회사에서의 시간이 정말 무용하다는 것을. 도대체 내가 회사에 이렇게 오래 있어야 하는 이유가 뭔지 싶었다. 심지어 무척 한가한 날에 병가나 조퇴, 연차 쓰는 것에 왜 그렇게 눈치를 봐야 하는지 납득이 안 갔다. 첫 회사부터 지금 직장까지 여러 직종을 경험했는데 모두 같은 생각이었다. 여러 일을 하면서 공통적으로 중요한 능력이 있다. 바로 ‘바쁜 척 하기’다. 정말 하찮아 보이는 소일거리를 가지고 심각한 척 하기. 책상을 이미 처리한, 또는 기한이 한참 남은 일거리들을 쌓아 자신이 바쁜 사람임을 드러내기. 이곳저곳 들쑤시기. 심각한 표정 지으며 전화받기. 등등의 정말 같잖은 일들을 해내는 능력은 실제 업무 처리 능력만큼 중요하다. 혹시라도 여유를 느끼는 낌새를 상사에게 들통이라도 나면 정말 큰일이 난다. 매 번은 아니지만, 그날은 야근이 확정되는 날이 되기 때문이다.

특히 코로나 시기를 겪고 나서 가짜 노동의 폐해에 대해 절감하고 있다. 대표적으로 자택근무에서 출근으로의 회귀이다. 나뿐만 아니라 많은 직장에서 자택 근무의 효율성과 능률이 좋다는 사실이 증명됐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코로나가 끝나자 자택 근무도 종식 됐다. 난 이 사태에 대해 한 가지 생각 밖에 가질 수 없다. 바로 상사나 사장이 직접 자기 눈앞에서 일하는 꼴을 봐야만 직성이 풀리는 심보를 가졌다는 것이다. 이거 아니고서는 도저히 납득이 안 되는 상황이다.


내 경우에 비슷한 일례로 지금 직장에서 납득이 안 되는 점이 있다. 코로나 시국 때 여러 이유로 점심시간이 30분 늘었다. 그렇게 쭉 가다가 마스크 의무가 해제되고도 완전히 개편되고 정착된 것처럼 유지가 됐는데 그로부터 몇 개월 후, 다시 30분이 줄었다. 이유는 코로나가 끝났기 때문은 당연히 아니었다. 새로 오신 직위가 높은 어느 한 분이 뜬금없이 원래 점심시간은 한 시간이 맞는 게 아니냐고 건의를 했기 때문이다. 이게 참. 맞는 말이긴 한데. 굳이 그래야 하나 싶었다. 30분 늘어난 점심시간 때문에 업무에 차질이 생긴 적은 거의 없다. 적어도 내 부서는 그렇다. 그리고 30분이 늘어난 것 가지고 문제가 있었으면 코로나 시국이 끝나자마자 바뀌었어야 했다. 그런데 이제 와서? 어느 한 사람의 아니꼬움 때문에? 30분이 늘어났던 것만으로도 참 많은 편의를 느끼고 여유를 가졌다. 누구는 한가하게 커피를 마셨고, 낮잠을 자며 한숨 돌렸고, 누구는 잠깐이면 해결할 수 있는 일들, 예를 들면 병원이나 은행에 다녀왔다. 하지만 이제 이 모든 게 불가능해졌다. 좀 더 좋은 근로 환경이 다시 퇴화한 거다. 이로써 모든 직원들의 점심시간은 다시 한 시간이 됐고, 불만과 불행도는 높아졌다. 일부 직원이 이에 대해 건의를 했지만 변화는 없었다. 앞으로 다시는 돌아갈 수 없는 강을 건넌 거다.


누군가는 말 그대로 원래대로 돌아온 거고, 대부분의 직장뿐만 아니라 학교를 비롯해 기본적으로 한 시간이 통상 시간이니 크게 불만 가질 것 없지 않으냐고 할 수 있다. 하지만 내가 볼 때 이 문제는 그런 수준에서 논의될 만한 일이 아닌 것 같다. 다시 한번 말하지만 우리는 쓸데없이 회사에서 시간을 보내는 때가 너무 많다. 많은 직장인들이 그렇듯 바쁜 시기와 여유로운 시기가 구분되어 있다. 이제 주 근무 일수 논의를 넘어 일 근로 시간에 대해 본격적으로 논의하고 전면적으로 개편되어야 할 시대라고 생각한다.


수렵 채집 시대에서 농경 시대로. 농경 시대에서 상업, 공업, 산업 시대를 넘어 이제는 인공지능 시대를 맞이하고 있다. 이토록 상상할 수 조차 힘든 발전을 이룩했는데 그에 비해 개개인의 노동 처우나 환경은 어떤가. 영국에서 산업 혁명이 시작되고 노동자들이 어떤 환경에서 어떤 처우를 받으며 일했는지 굳이 말로 하지 않아도 알 거라 생각한다. 과학 기술 발전으로 하루에 한 건만 처리할 수 있는 일을 이제는 수 천, 수만 건이나 처리할 수 있게 됐다. 그로써 인간의 노동 시간은 단축되고 넉넉한 여가시간을 누릴 수 있기를 기대했지만 지금 우리는 어떤가. 일일이 수기로 그려내야 했던 건축 도면을 이제는 몇 시간 만에 캐드나 전문 프로그램으로 처리할 수 있게 됐음에도 우리의 근로 시간은 어떤가. 그렇게 삶과 생명을 갈아서 일했는데 그 대가는 제대로 받고 있을까? 그럼 그것은 모조리 어디로 갔단 말일까. 그로써 엄청난 경제 성장을 이루었다. 그런데 정말 그 부가 쏠릴 만한 곳에는 그만큼의 합당한 노동을 제공하고 있을까?


결국 부(자본)의 분배 문제를 거론해야 한다. 지금보다 적게 일하고, 일자리를 고르게 분배해야 한다. 그로써 줄어들 자기의 몫(임금)을 걱정해야 할 게 아니라 한 곳에 쏠리는 막대한 부를 고르게 분배해야 한다. 무조건 공평하게 n분의 1식으로 분배하자고 억지를 부리는 게 아니다. 적당한 수준의 분배 위해 논의가 필요하다는 의미다. 그래야 적당히 알맞게 일하고, 각자의 평안한 삶을 살 수 있다. 이는 결코 피할 수 없는 문제다. 언제가 됐든 어떤 방식으로든 반드시 마주해야 할 문제다. 그리고 최선의 방법을 추론해 해결해야 할 문제다. 여기서 한 가지 강조하고 싶은 점이 있다. 난 공산주의나 사회주의를 비호하고 자본주의나 자유주의를 부정하는 게 아니다. 단지 현세를 살아가는 사람들이 은연중에 느끼고 있을 분명한 불만족과 문제점을 직시하고 싶을 뿐이다.  


내가 이 책을 읽으면서 가장 놀랐던 점은 가짜 노동이 만국 공동이라는 점이다. 그리고 그들 모두 비슷한 이유로 아주 은밀하게 스며드는 고통을 겪고 있다는 것이다. 그렇다는 건 반드시 해결 봐야 할 문제라는 것이다.




추신. 이 글은 직장에서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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