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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Diem Nov 19. 2023

여행의 이유

기대와는 다른 현실에 실망하고, 대신 생각지도 않던 어떤 것을 얻고, 그로 인해 인생의 행로가 미묘하게 달라지고, 한참의 세월이 지나 오래전에 겪은 멀미의 기억과 파장을 떠올리고, 그러다 문득 자신이 어떤 사람인지 조금 더 알게 되는 것, 생각해 보면 나에게 여행은 언제나 그런 것이었다.      


- 여행의 이유, 김영하 -


나는 여행을, 특히 해외여행을 즐기지 않는다. 10년쯤 전 한 달간 유럽으로 배낭여행을 다녀온 이후로 여행에 더 이상 큰 욕구를 느끼지 못하고 있었다. 여행에 있어 가장 큰 버킷리스트를 이뤘고, 더불어 해외여행이 주는 피로도와 만족도가 큰 차이가 없다 보니 굳이 다녀야 한다는 필요성을 못 느꼈다. 또한 여행 스타일이 혼자 일상에서 벗어나 조용한 곳에 머무는 형태가 많았기에 국내여행과 해외여행의 차이를 느끼지 못했으며, 비행기를 타는 과정이 너무 귀찮았다. 종종 연인이나 가족과 해외여행을 다녔지만, 이 마저도 그저 조용히 따라갔다 돌아오는 형태가 대부분이었다.


이렇게나 해외여행에 회의적이었던 내가 퇴사를 결심하고 거의 10년 만에 해외여행을 가기로 결심했다. 명목은 어학연수였지만, 사실상 여행이라는 느낌이 더 강했다. 또 여행을 계획한 곳도 내가 평소에 가고 싶다는 생각을 해본 적이 없는 동남아, 필리핀이었다. 개인적으로 우리나라보다 잘 사는 나라를 방문하는 것을 더 좋아했고, 싼 물가나 황제여행 등에는 크게 관심이 없었기 때문이다. 이번 여행은 모든 부분에 있어 기존의 나와는 전혀 거리가 먼 선택들의 연속으로 만들어졌다. 그렇게 내 인생에서 가장 값진 여행이 시작된다.


실존자로써 여행


이번 여행이 가장 값지다고 느끼게 된 부분은 내가 나를 이해한 채로 온 첫 여행이라는 점이다. 과거 여행을 다니던 시절의 나는 내 욕망을 정확히 인지하지 못하는 상태였다. 라캉의 '인간은 타인의 욕망을 욕망한다'는 말처럼, 그저 사회가 좋다고 하는 것들을 욕망하던 지극히 반응적이고 수동적이 삶을 살던 나였기에 외국을 나가도 '그냥 외국을 나간다, 새로운 곳을 가는 경험을 한다' 등이 여행의 주된 목적이었다.


하지만 근 5년 사이 나는 급격하게 스스로를 발견했고, 정의했으며, 세상을 보는 관점과 기준, 맥락이란 게 생겼다. 즉, 나는 실존하게 됐다. 이런 상태에서 접한 '완전히 다른 문화 환경'은 정말 많은 걸 느끼게 했다. 다름 속의 보편성을 생각하게 하고, 나의 사고를 확장하는 좋은 발판이 됐다. 카뮈가 이야기하는 '다양한 경험의 중요성'에 크게 동의하지 못했는데, 지금은 왜 다양한 경험이 중요한지 충분히 이해하게 됐다.


더불어 그간 회사생활을 하며 내가 얼마나 지쳐있었는지도 문득 깨닫게 됐다. 정확히는 회사생활이라기 보단, 한국사회생활이란 말이 더 정확할 것이다. 끊임없이 경쟁하고 비교하며 어떤 특정한 기준을 만족시켜야 한다는 압박감. 이런 압력에서 비교적 스스로를 잘 방어하고 컨트롤하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그럼에도 사회적 동물인 이상 완전히 자유롭지 못했던 게 사실이다. 이런 압박감에서 벗어나자, 훨씬 더 자유롭고 능동적이며 창의적이 사고가 가능했다. 이로 인해 내가 기존 가지고 있던 삶의 계획에 새로운 가능성을 추가하게 된다.


여행자에서 이주자로


종종 며칠간 해외여행을 다닌 적은 몇 번 있었지만, 관광지와 호텔은 어딜 가나 크게 다르지 않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소비자로서의 삶이란 어딜 가나 비슷하다. 단지 장소와 사람, 환대(서비스)의 방식이 조금씩 달라질 뿐.


하지만 장기간 한 곳에 머물다 보면 단순히 여행자가 아닌 이주자로서의 페르소나를 경험하는 순간이 온다. 나는 필리핀에서 3개월을 머무를 계획을 했는데, 사실상 첫 주는 한국 여행지에서 기분과 크게 다른 점을 느끼지 못했다. 아마 내가 1주일 정도만 필리핀에 머물렀다면, 아마 내 소감은 기존에 동남아에 가지고 있던 관념인 '후진국'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을 것이다.


이곳에서 '살아간다'라고 느끼게 된 기간은 여기서 만나게 사람들과 삶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기 시작한 순간부터였다. 기간으로 치면 대략 2주쯤 지난 후. 친밀감이 형성되고, 서로의 고민이나 가치관, 좋고 나쁨을 이야기하며(물론 영어라 아주 간략하게), 다른 문화가 구체적으로 어떻게 다른지 알게 되는 순간이 찾아온다. 이 순간부터가 내가 필리핀에 온 것을 '잘했다'라고 생각하게 된다.


여행의 이유


김영하 작가의 팬인 나는 '여행의 이유'가 출간되자마자 사서 읽었다. 문장력에 경탄했지만 크게 공감하진 못했다. 하지만 필리핀 생활을 2주쯤 하다 보니 이 책이 떠올랐고, 다시 읽으며 그 글이 내 삶과 체화되는 기분을 느꼈다. 기대와는 다른 필리핀에 실망했지만, 그 대신 전혀 기대치 못한 것들을 배웠고, 이로 인해 인생의 행로가 미묘하게 달라졌으며, 아마 먼 훗날 이 여행을 회상하며 나를 더 이해하는 계기가 될 것이란 확신이 든다.


그렇기에 이번 여행은 나에게 여행의 의미를 새롭게 정의할 수 있게 된, 여행의 이유를 찾은 여행이 됐고, 그간 읽어온 책들이 삶속으로 한발 더 들어오는 문을 만드는 계기가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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