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마끼안: 왓 프라깨우의 비밀번호를 풀다

[프롤로그] 당신이 무심코 지나친 그 거인이 말을 걸어올 때

by 태국학연구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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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자책] 태국의 국민 서사시 라마끼안 | 배수경 | - 예스24



방콕 쑤완나품 공항의 출국장 한가운데, 무려 6미터가 넘는 거대한 키로 우뚝 서서 우리를 내려다보는 무시무시한 거인 석상을 기억하십니까.

화려한 금색 갑옷을 입고, 부릅뜬 눈에 송곳니를 드러낸 채 거대한 칼을 짚고 서 있는 그들을 보며 여행자들은 대개 이렇게 생각합니다.


"와, 정말 태국스럽네. 사진 한 장 찍고 가야지!"


하지만 그 거인, 즉 '약(Yak)'이라 불리는 이들과 눈이 마주친 그 찰나에 당신은 이미 천 년을 이어온 거대한 이야기의 첫 페이지를 넘긴 셈입니다. 그들은 단순한 장식물이 아닙니다. 그들은 지금 24시간 근무 중인 경비병입니다. 그것도 아주 슬프고도 위대한 사연을 품은 채, 신성한 장소를 지키기 위해 '종신 계약'을 맺은 전설 속의 주인공들이죠.


12가지 색깔에 담긴 비밀번호

잠시 카메라를 내려놓고 그들의 얼굴을 자세히 들여다보세요. 12명의 거인은 저마다 다른 색깔의 피부를 가지고 있습니다. 이것은 태국인들이 수백 년간 지켜온 '캐릭터 코드'입니다.

초록색 얼굴을 한 이 거인은 십만 대군을 이끄는 불멸의 악당 '톳싸깐'입니다.

보라색 얼굴의 거인은 잠의 마법을 부리는 '마이야랍'이고,

하얀색 얼굴의 거인은 우주를 호령하는 힘을 가진 '싸핫데차'입니다.

우리가 그들의 이름을 아는 순간, 무표정했던 석상은 당신에게 수줍은 미소를 띠며 자신의 진짜 이야기를 속삭이기 시작할 것입니다.


태국판 '어벤져스'의 상영관으로

이제 발걸음을 옮겨 방콕 여행의 필수 코스인 '왓 프라깨우(에메랄드 사원)'로 가봅시다.

사원을 감싸고 있는 긴 회랑의 벽면을 본 적이 있나요? 금박과 원색의 물감으로 촘촘하게 그려진 178칸의 거대한 파노라마. 많은 이들이 "그림이 참 화려하네"라며 지나치지만, 사실 그곳은 태국판 '어벤져스'가 상영되는 세계에서 가장 긴 영화관입니다.


중국에 '삼국지'가 있고, 서양에 '그리스 로마 신화'가 있다면, 한국인에게 '홍길동'과 '단군 신화'가 있듯, 태국에는 '라마끼안(Ramakian)'이 있습니다.


그 벽화 속에는 이런 질문들이 숨어 있습니다.

"왜 이 위대한 영웅은 신이면서도 인간의 몸을 빌려 태어나 고생을 사서 하는가?"

"입에서 별을 뱉고 하품으로 달을 만드는 하얀 원숭이 하누만은 어떻게 우리의 상상력을 지배하게 되었나?"

"사랑하는 아내를 구하기 위해 전쟁까지 치른 왕자는 왜 승리한 뒤에 아내를 의심하며 눈물을 흘렸나?"


스케치로 되살아나는 황금빛 판타지

이 책은 방대한 벽화의 홍수 속에서 길을 잃기 쉬운 당신을 위한 친절한 내비게이션입니다.

우리는 복잡하고 화려한 사진 대신, 정교한 스케치와 핵심적인 포인트 컬러를 통해 이 거대한 서사의 정수만을 골라냈습니다.

때로는 하누만의 하얀색 털 한 가닥에, 때로는 톳싸깐의 초록색 눈매에 집중하며, 박제되어 있던 인물들에게 숨결을 불어넣으려 합니다.

책장을 넘기는 순간, 왓 프라깨우의 벽화는 살아 움직이기 시작할 것입니다.

사랑에 눈이 멀어 전쟁을 일으킨 악마의 여동생,

형을 위해 인생을 바친 충성스러운 동생,

그리고 신조차 피할 수 없었던 지독한 질투와 후회까지….


태국인이 가장 사랑하는 황금빛 판타지, 그 장엄한 막을 지금 올리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