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후(ลาหู่)

'꾸이싸'의 숨결과 색동의 미학으로 빚은 ‘사람'의 노래

by 태국학연구소

라후(ลาหู่) – 이싸(กุ้ยชา, G'ui Sha)의 숨결과 색동의 미학으로 빚은 ‘사람’의 노래


가장 존엄한 선언: 우리는 ‘사람’입니다

동남아시아의 서늘한 안개가 감도는 산악지대를 걷다 보면, 맑은 눈망울을 가진 이들이 스스로를 '라후(ลาหู่, Lahu)'라 소개하는 것을 듣게 됩니다. 이 짧은 단어는 단순히 한 민족을 지칭하는 명칭이 아닙니다. 라후의 언어로 그것은 곧 '사람(คน)'을 의미합니다.

그들에게 이름이란 국가나 혈통의 증명이 아니라, 이 거친 대지 위에서 한 명의 인간으로 존재한다는 고결한 감각 그 자체입니다. 문자를 남기지 않았던 이들은 자신들의 역사를 종이 위에 가두지 않았습니다. 대신 끝없는 이동의 발자국과 마음으로 부르는 노래, 그리고 신성한 의례 속에 새겨왔습니다. 그래서 라후의 과거는 건조한 연대기가 아니라, 삶의 체온이 느껴지는 이야기(혹은 전설)의 형태로 우리에게 다가옵니다. 승리의 서사가 아니라 떠남과 상실, 그리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끝내 사람으로 남았다는 숭고한 증언의 형태로 말입니다.


꾸이싸(กุ้ยชา)의 선물과 붉은 사슴의 여정

라후족의 모든 영적 세계는 창조신 꾸이싸(กุ้ยชา, G'ui Sha)로부터 시작됩니다. 꾸이싸는 고독한 절대자가 아닙니다. 남성성과 여성성이 완벽한 조화를 이룬 존재로, 라후족이 지향하는 양성평등의 원형이기도 합니다.

신화에 따르면 꾸이싸는 인류에게 땅을 나누어 줄 때, 라후족에게는 기름진 평야 대신 도끼 한 자루를 선물했습니다. 밭을 가는 쟁기보다 숲을 헤쳐 살아갈 도구를 택한 이 선택은, 라후족이 정착의 안락함보다는 자유로운 숲의 주인이 되길 원했음을 상징합니다.

학자들은 이들의 기원을 약 2천 년 전 티베트-칭하이 고원에서 유목 생활을 하던 고대 강(羌)족으로 거슬러 올라간다고 봅니다. 라후족의 구전 전승에는 붉은 사슴을 쫓다가 풍요로운 초원을 발견했다는 이야기가 전해집니다. 이는 낭만적인 설화인 동시에, 중국 세력의 확장 속에서 생존을 위해 남쪽으로 내려와야 했던 필사적인 이동의 기록이었습니다. 살윈강과 메콩강을 따라 이어진 그들의 발걸음은 오늘날 중국 윈난성, 미얀마 북부, 태국 북부, 라오스로 이어지는 산악지대에 멈춰 섰습니다.


소매 끝에 흐르는 무지개, 색동(แถบผ้าสี)의 미학

태국 북부에서 마주하는 라후족, 특히 적(붉은)라후(ลาหู่หนี่) 여성들의 복식은 한국인 여행자들에게 묘한 기시감과 벅찬 감동을 안겨줍니다. 검은 바탕 천 위로 강렬하게 대비되는 색동문양 때문입니다.

이는 일찍이 태국 북부의 치앙마이와 치앙라이에서 라후족과 깊이 교류했던 고(故) 김병호 박사가 추적했던 주제이기도 합니다. 박사님은 라후족의 복식과 풍습에서 고구려의 흔적을 발견하고 그들이 '고구려의 후예'일지도 모른다는 대담한 가설을 던지기도 했습니다. 그 매혹적인 가설은 지금도 많은 사람들이 흥미로와 하는 지점입니다.

그러나 제가 주목하는 지점은 이들의 옷감에 새겨진 '아시아 민족 조형의 근원적인 뿌리'에 있습니다. 이는 어느 한 왕국의 후손인가를 따지는 증명을 넘어, 유라시아 대륙을 가로질러 이어져 온 거대한 미적 유전자의 흐름을 마주하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라후에게 이 색동은 '꾸이싸가 인간에게 허락한 무지개'입니다. 빨강, 노랑, 하양, 초록의 색 띠는 태양, 땅, 구름, 그리고 생명의 숲을 상징하며, 기하학적 사선 문양은 그들이 넘어야 했던 수많은 산맥을 의미합니다. 옷을 입는 행위 자체가 조상의 역사를 몸에 두르는 신성한 의식이자, 우리가 같은 아시아의 형제임을 말해주는 보이지 않는 연결고리인 셈입니다.


잃어버린 도시의 전설

라후의 구전에는 한 도시가 등장합니다.

파쩨-나쩨(พะเจ–นะเจ, Pa-je–Na-je).

라후가 군사적·경제적으로 자치권을 누렸던 전설 속의 도시입니다.

이 도시에서 라후는 쇠뇌를 무기로 삼아 중국군에 맞섰다고 합니다. 그러나 무너진 것은 성벽이 아니라 신뢰였다고 하지요. 전설에 따르면 중국군은 전투 대신 음악을 택했습니다. 호리병박 피리인 쩡넝(จ๊องหน่อง) 소리로 성 안의 아이들과 여인들을 유인했고, 쇠뇌의 핵심 부품과 그 소리를 맞바꾸며 도시의 방어를 무력화시켰습니다. 전사들은 성 밖에서 약속했습니다. "우리는 돌아올 것이다." 그러나 그 약속은 지켜지지 않았고, 도시는 사라졌으며 사람들은 흩어졌습니다.

이 이야기는 역사적 사실이라기보다 라후족이 겪은 패배와 흩어짐의 기억을 담은 서사시에 가까운 것 같습니다. 중요한 것은 라후가 이 패배를 수치가 아니라 "우리가 누구였는지를 잊지 않기 위한 이야기"로 남겼다는 점입니다.


작은 오해가 불러온 분열

흩어진 라후는 또 한 번 갈림길에 섰습니다. 기근의 땅 머꼬(เหมาะโก)를 지나 사슴과 신비한 나무가 나타난 풍요의 호수 널러-널래(เหนอเลาะ–หนอแล)에 도착했을 때, 99가구로 나뉘어 고기를 공평하게 나누었다고 전해집니다. 그러나 고슴도치 털 하나에서 비롯된 오해는 결국 아우파(อาอูพา, Au-pa)와 아우누마(อาอูหนูมา, Au-nu-ma)라는 두 씨족의 분리로 이어졌습니다. 라후의 분열은 배신이나 권력 다툼이 아니라, 작은 불신이 공동체를 어떻게 갈라놓는지에 대한 교훈으로 남아 있습니다.

오늘날 라후족은 흑라후(ลาหู่หนา, Lahu Na, 라후나), 적라후(ลาหู่หนี่, Lahu Nyi, 라후니), 황라후(ลาหู่ชิ, Lahu Shi, 라후씨), 백라후(ลาหู่ปู, Lahu Hpu, 라후뿌), 라후쎌레(ลาหู่เส่แล, Lahu Shehleh, 라후쎌레) 등으로 나뉘어 있습니다. 이 구분은 전통 의상의 색깔에서 비롯되었지만, 이들은 부족이나 씨족이 아니라 지역적 차이를 나타낼 뿐입니다. 가족 이상의 혈연 집단은 존재하지 않으며, 라후족은 양측 모두에서 혈통을 인정하는 양계 사회를 유지해왔습니다.


문자 없는 사회의 지혜

라후에게는 문자가 없습니다. 그래서 오랫동안 "미개하다"는 평가를 받아 왔습니다. 하지만 문자가 없다는 것은 기록하지 않았다는 뜻이지, 규범이 없었다는 뜻은 아닙니다.

라후 사회에는 분명한 질서가 있었습니다. 마을은 세 사람에 의해 유지되었다고 합니다. 카쎄(คะแซ)는 마을 대표이자 외부와의 조정자였고, 또보(โตโบ)는 의례와 금기를 관리하는 인물이었으며, 대장장이인 창띠렉(ช่างตีเหล็ก)은 생존 기술의 중심이었습니다. 이 셋이 있어야 마을은 완전했습니다.

이들은 권력자가 아니라 역할자였습니다. 누구도 절대적인 힘을 갖지 않았고, 균형이 깨지면 마을은 스스로 조정했습니다. 라후가 중요하게 여긴 것은 법이 아니라 관계의 온도였습니다. 이를 그들은 쭈이-마이(จูหยี่–หม่าหยี่), 즉 공동체의 지혜라 불렀습니다. 벌보다 중요한 것은 수치와 책임이었고, 통제보다 중요한 것은 나눔과 절제였습니다.

라후족 사회에서 노인에 대한 존경은 기본적인 도덕 원칙이었습니다. 노인의 침대는 가장 따뜻한 화덕 옆에 놓였고, 식사 때는 중앙에 앉았으며, 새해 첫날 길어온 물로 노인이 먼저 세수했습니다.

"노인이 태양과 달을 먼저 보았고, 곡식을 먼저 심었으며, 산의 꽃과 야생 과일을 먼저 발견했고, 세상에 대해 가장 많이 안다"는 말이 라후족의 지혜를 잘 보여준다.


신과 정치 사이

라후족의 삶이 평온할 때 마을은 지혜로운 장로들에 의해 운영되지만, 외세의 침략이나 가혹한 기근처럼 공동체의 존립이 흔들리는 위기의 순간에는 마해(มะแฮ)라는 인물이 역사 전면에 등장합니다. 마해(มะแฮ)는 창조신 꾸이싸로부터 특별한 계시를 받았다고 믿어지는 종교적 권위자입니다. 이들은 단순한 무당이나 주술사를 넘어, 라후족의 도덕적 타락을 경고하고 꾸이싸의 가르침으로 돌아갈 것을 설파하는 '선지자'의 역할을 수행했습니다. 그들은 "하늘의 쌀"이 내릴 것이라거나, 고통 없는 낙원으로 민족을 인도하겠다는 약속을 통해 흩어진 라후족의 마음을 하나로 묶었습니다.

18세기와 19세기, 중국 청나라의 압박이 거세지던 시기에 등장한 마해들은 종교적 지도자를 넘어 정치적·군사적 구심점이 되었는데, 외세에 저항하는 강력한 라후 자치조직을 이끈 ‘뿌쩡마해(ปู่จองมะแฮ)’나 사람들에게 영적 영감을 주고 저항의 의지를 북돋웠던 흑원숭이 은자로 불린 ‘머나또보(เหมาะนะโตโบ)’ 같은 인물들이 유명합니다. 그들은 왕이 되려 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다만 라후족이 '사람(즉, 라후)'으로서의 자부심을 잃지 않고, 꾸이싸가 허락한 자유를 지키며 살 수 있도록 이끄는 등불이 되고자 했습니다.


신화가 말하는 것

라후의 신화(ตำนาน)는 승리의 기록이 아닙니다. 오히려 대부분의 이야기는 잃어버린 것들에 관한 기억입니다. 잃어버린 도시, 잃어버린 무기, 잃어버린 약속.

신화 속에서 신은 라후에게 가장 좋은 땅을 주지 않았습니다. 대신 도끼를 주었지요. 밭을 가는 쟁기보다 숲을 헤쳐 살아갈 도구를 택한 선택은 이들의 삶을 상징하고 있습니다. 라후족은 호랑이를 사냥하는 기술로 유명했으며, 윈난성 서부의 아이라오산과 우량산의 울창한 비탈을 배경으로 수렵과 채집 생활을 했습니다.

라후의 신화는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기지 못했지만, 사람으로 남았다고.


변화하는 삶의 방식

전통적으로 라후족은 화전 농업에 종사했지만, 20세기 중반 이후 외부의 정치적·경제적 압력으로 정착 농업으로 전환해야 했습니다. 오늘날 라후족은 주로 산비탈에서 쌀과 옥수수를 재배하는 자급 농업을 하며, 일부는 양귀비 재배에서 벗어나 과일과 채소 같은 환금작물로 전환했습니다.

라후족 사회는 세계에서 가장 양성평등한 사회 중 하나로 평가받고 있습니다. 많은 라후족 공동체에서 여성 쪽 거주 방식을 따르며, 양측 모두에서 혈통을 인정하고 있습니다. 재산 상속에서도 아들과 딸 모두 권리를 가지며, 남편을 잃고 시부모를 돌보는 며느리도 상속권을 갖습니다.



오늘날의 라후

오늘날 태국 북부에서 만나는 라후는 전통의 옷을 입고 관광객을 맞이하기도 합니다. 라후족 여성은 검은색과 빨간색이 돋보이는 독특한 재킷과 치마를 입으며, 남성은 헐렁한 바지를 입습니다. 노래를 부르고, 춤을 추고, 사진 속의 '소수민족'이 됩니다.

새해 축제인 낀워(กินวอ)가 돌아오면, 그들은 여전히 찹쌀을 찧어 카우뿍(ข้าวปุก)떡을 빚고 둥글게 원을 그리며 춤을 춥니다. 그들에게 축제는 단순히 즐기는 시간이 아니라, 흩어졌던 마음을 다시 '사람(라후)'이라는 이름 아래 하나로 모으는 신성한 매듭입니다.

그러나 그 이면에는 여전히 토지권 문제, 국적 문제, 교육과 언어의 단절이 존재합니다. 라후족 마을은 라후 생활 방식을 유지하려는 강한 의지 때문에 도로와 마을에서 멀리 떨어진 곳에 위치합니다. 국가는 라후를 보호한다고 말하지만, 보호란 종종 통제의 다른 이름이 되기도 합니다. 숲에서 살아온 사람들에게 숲을 떠나라고 요구하는 보호는 과연 누구를 위한 것일까요.

종교 또한 꾸이싸 신앙 위에 불교와 기독교가 덧입혀졌습니다. 그러나 라후는 여전히 같은 이야기를 기억하고 있습니다. 도시를 잃고, 가족이 나뉘고, 문자 없이도 사람으로 살기 위해 이동했던 이들. 그럼에도 라후는 여전히 아이들에게 이야기(전설)를 들려줍니다. 문자가 아닌 목소리로, 역사가 아닌 기억으로.



경계에 선 사람들

국경이 생겨도, 문자가 없어도, 패배를 겪어도. 라후는 스스로를 이렇게 불러왔습니다.

라후 – 사람

라후의 이야기는 '소수민족의 역사'라기보다 사람이 어떻게 사람으로 남는가에 대한 질문에 가깝습니다.

오늘날 라후족은 중국, 미얀마, 태국, 라오스, 베트남이라는

여러 나라의 '소수민족'으로 나뉘어 기록되고 있지요.

그러나 라후의 기억 속에서 그들은 한 번도 여러 민족이었던 적이 없습니다.

국경은 그들을 나누었지만, 이야기(혹은 전설)와 의례, 노래는 여전히 이어져 있습니다.

라후는 사라지지 않았습니다.

다만 늘 경계에 서 있을 뿐입니다. 그리고 그 경계에서, 여전히 사람이라는 이름으로 살아가고 있습니다.


"우리는 라후 – 사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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