루마니아
부쿠레슈티에서 3시간 동안 기차를 타고 브라소브에 도착하면, 다시 1시간에 겨우 1대씩 있는 버스를 타고 들어간다. 가는 길엔 다져지지 않은 토지만 나오다, 드넓은 유채꽃밭을 지난다. 햇빛을 받아 더 노란 유채꽃밭 너머에는 희미하게 보이는 설산이 풍경에 걸친다. 그러다 다시 집 한 채 보이지 않은 푸른 들밭을 한참 지나니, 생기가 도는 한 도시에 도착한다.
드라큘라 백작 성의 모티브가 된 브란 성. 언덕을 오르고 높은 계단 층을 몇 번이나 더 올라야 겨우 입구에 도착한다. 보수 공사를 했다고 하나 다듬어지지 않은 날 것 분위기가 자아내고, 그렇기에 여기가 드라큘라가 탄생하기 가장 적합한 장소였다는 생각도 든다. 모티브가 된 블라드 백작이 이 성에 잠시만 머물렀다는 소문만 무성하다. 브란 성을 둘러보다 보면 소설에 과몰입해버릴수도 있다. 절벽 위에 홀로 있는 성, 좁은 계단을 올라가 연결된 방은 입자화된 여인들이 춤추고 있고, 탑 쪽에 가까운 방에서 드라큘라의 명령을 기다리는 늑대 조형물이 있다. 소설 속에선 근처에 묘지도 있고 아주 음산한 분위기를 자아내나, 현실에선 한 루마니아 가문이 소유한 세계에서 가장 2번째로 비싼 집이다.
내가 회귀한 걸까. 이 도시는 수도임에도 불구하고 꼭 2010년대에 시간이 멈춰 있 것 같다. 성인 두 명이 겨우 탈 수 있는 수동으로 작동되는 엘리베이터. 아주 작은 표지판 하나만 남겨있는 대기시간을 모르는 버스정류장. A4용지에 인쇄되어 기차 창문마다 테이프로 붙어있는 행선지와 열차번호. 수기로 적는 대표적인 랜드마크의 입장권. 충전이 가능하다며 자랑스럽게 콘센트 위에 스티커를 붙여놨지만, 이제는 박물관에서만 볼 수 있는 핸드폰과 노트북 기종.
그렇지만 이 도시에는. 환전을 하지 못해 현금이 없어 한 시간에 겨우 한대 있는 버스 앞에서 발을 동동 구르던 나에게, 흔쾌히 본인들이 차비를 대신 내주겠다는 한 커플. 도시 마라톤에서 연로한 꼴찌 할아버지에게 가장 큰 환호와 박수를 보내는 이들. 부족한 영어에도 나에게 버스정류장 위치를 열심히 몸으로 설명하던 한 건물의 경비 아저씨. 그런 도시이다.
"인생은 찰나의 순간인가 봐. 봄꽃이 피는 동시에 여름 날씨야. 오늘 봄비가 내린다. 조금 있으면 얼굴 볼 수 있겠네. 건강히 있지?"
엄마, 분수 광장 한 벤치에 앉아 햇살을 만끽하며 엄마가 어제 보낸 메시지를 곱씹고 있어. 찰나라는 게 뭘까. 불교에서 사용하는 아주 최소의 시간 단위라는데. 그런 사전적일 의미 다 제쳐두고. '헉' 하는 순간이 아닐까. 내가 어제저녁에 문득 지나가다가 색색의 조명이 켜진 이 중앙 분수광장을 봤던 그 순간 말이야. 그건 마치, 부다페스트에서 조명이 켜진 국회의사당을 봤을 때, 아이슬란드에서 블랙홀 같던 굴포스를 봤을 때, 그리고 네덜란드에서 수 헥타르(ha)의 튤립이 심어진 튤립 밭을 봤을 때와 같았어. 중앙에 가장 높에 솟아 있는 원형의 중앙 분수와, 그 주변을 에워싸 하나의 광장을 이루는 게 분수 군단 같았어.
"언제 들어오게? 아직도 갈 곳이 남았어?"
아빠도 이미 알겠지만 나는 원체 어릴 때부터 욕심이 많던 지라. 그 찰나도 내 눈으로 직접 보고 싶은걸. 그래서 내가 이렇게 바삐 움직이고 있나 봐. 어떤 프레임이던 내가 본 이 풍경을 생생히 담을 수 있을까. 도시에 녹음이 드리워지고, 햇볕은 제법 뜨겁기도 하지만 바람은 아직도 차. 날아다니는 꽃가루들이 계절이 저물고, 또 새로운 계절이 오고 있다는 걸 알려주는걸. 솔직히 의외였어. 뭘 할지도, 딱히 가볼 것도 없던 도시에서 그 찰나를 발견했다니 말이야. 이번 여행은 꽝이네라고 판단할 뻔한 순간, 또 하나를 발견한 거야. 이러니 내가 직접 다 가봐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