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고산 Jul 31. 2019

한국인만 모르는 한국의 보물 '풍수'

고산/임마누엘 페스트라이쉬 교수의 한국문화 찾기

제국주의가 전 세계를 전쟁과 폭력, 공포 속으로 몰아넣었던 시기가 있었다. 당시 제국주의 국가들이 식민지에 대한 지배를 쉽게 하기 위해 꼭 필요한 일이 있었다. 바로 식민지의 문화와 역사, 사상에 대한 왜곡과 교육이다.  

한국도 35년의 일본의 식민지배를 받아야만 했던 아픔을 가진 나라다. 당시 일본은 한반도를 영구적으로 지배할 수단이 필요했다. 그들이 선택한 것은 한반도의 역사에 대한 왜곡과 은폐였다. 이를 통해 ‘자기비하’와 ‘일본에 대한 동경’을 심을 수 있다고 봤다.


데라우치 초대 조선 총독은 “조선인에게 일본의 혼을 심어줘야 한다. 그러지 않고 조선인의 민족적 반항심이 타오르게 된다면 이는 큰 문제가 될 수 있다. 영구적이며 근본적인 사업이 필요하다. 이것이 곧 조선인의 심리연구이며 역사연구이다.”라고 말하기도 했다.


한국인들의 민족 정체성을 없애기 위한 조작과 왜곡은 고조선부터 조선에 이르기까지 역사 전반에서 이루어졌다. 가장 대표적인 것이 ‘임나일본부설(任那日本府說)’이다. 이 가설은 일본의 야마토 정권이 4세기 후반 한반도의 남부 지역인 가야 지방에 ‘임나일본부’를 설치해 근 200년간 지배했다는 주장이다. 한국 사람들은 과거부터 의존적이었고, 문화나 사상 등 모든 부분에서 타율적으로 발전했다는 것이다. 

역사적 오류로 가득한 이 가설을 들고나온 이유는 하나였다. 그들의 지배를 정당화하기 위한 역사적인 근거가 필요했기 때문이다. 조선에 대한 지배는 어쩔 수 없는 시대의 흐름이라는 논리다. 조선의 발전을 위해 먼저 산업화에 성공한 일본이 도와야 한다고 말하고 싶었던 것이다. 

이러한 왜곡과 더불어 정당성을 확고히 하기 위해 먼저 조선의 지배층에 대한 백성들의 부정적 인식을 키울 필요가 있었다.


역사 왜곡의 핵심 역할은 이완용이 고문을 있던 〈조선사편수회〉가 맡았다. 그들이 제일 먼저 들여다본 것은 조선 시대 성리학과 유림 선비들의 고루한 사상과 당파싸움이었다. 무능한 지배층과 그것을 견제하지 못하고 오히려 분탕질한 선비들의 태도가 조선을 위태롭게 했다는 것이다.


조선 중기 이후 일부 당파가 명분만을 내세워 나라를 위기로 몰아넣은 것은 사실이다. 이들은 청나라가 중국을 통일하던 시기에도 ‘재조지은(再造之恩)’, 다시 말해, ‘나라를 다시 만들어 준 명(明)의 은혜’에 보답해야 한다며 명분만을 내세웠다. 그들의 이런 고집은 백성들을 병자호란의 소용돌이 속으로 몰아넣었다. 

전쟁 이후에도 그들은 수 세기 동안 권력을 놓지 않았다. 바른 생각을 하는 선비들의 외침은 철저히 막아버렸다. 조선이 멸망하는 과정에서도 이들은 깊숙히 관여했다. 이른바 조선에서 경화세족(京華世族서울에 살면서 화려한 귀족 생활을 하고 대를 이어 영화를 누렸던 계층의 사람들)이나 세도가로, 구한말에는 ‘을사오적’이라고 불리는 이들이다.

 이들은 훗날 일본의 역사 왜곡에 앞장섰고 그 상으로 귀족의 호칭과 돈을 챙겼다. 그러면서 나라의 잘못된 운명을 선비들의 책임으로 돌렸다.


결국, 백성을 도탄에 빠뜨린 선비 등 지식인을 대신해 일본이 조선을 바꿔보겠다는 것이다. 이러한 ‘민중개조론’은 은밀하면서도 치밀했다. 그리고 그 결과는 해방 이후까지 한국 사회에 깊이 뿌리내리게 된다. 

일본 식민지 시절의 교실 모습 (사진_국사편찬위원회)

2차 세계대전 이후 한국은 유럽과는 전혀 다른 길을 걸었다. 유럽이 나치에 대해 철저하게 죄를 물은 것과 달리 한국은 해방 이후 이들이 지배층에 다시 들어왔다. 이해하기 힘들고 기이한 역사다. 바로 잡는데 실패한 결과로 지금도 대다수의 한국인들은 왜곡된 역사를 배우고 있다. 

조선의 선비들을 나라를 절망에 빠뜨렸다고 믿고 있는 것도 그중 하나다. 이는 식민지배 시절의 사학자들이 해방 이후에도 한국의 사학계를 장악했기 때문이다. 왜곡된 역사관이 한국 역사의 주류로 남은 이유이다. 


일본이 역사 왜곡을 통해 조선 선비의 격을 떨어드리면서 동시에 문화적인 자존감을 훼손하기 시작했다. 일본 식민지 지배 정책을 완성하기 위한 정책이었다. 조선인들의 전통 사상과 문화 비하하면서 동시에 일본과 서구 문명에 대한 환상을 심었다. 그 결과 한국의 장인정신은 쇠퇴했고, 일부는 그 맥이 완전히 끊기기도 했다. 

교육에서도 한국 고유의 전통문화를 ‘부정적이고 낙후되어 극복해야 할 대상’으로 가르쳤다. 한국에서 불교, 유교, 도가 사상이 수천 년을 이어 문화를 생산했지만, 일본 식민지배 35년 만에 거의 소멸해 버렸다. 일본이 한국의 전통 사상을 사이비와 미신이라는 이름으로 지워나간 결과다. 


가장 심각한 타격을 입은 것 중 하나가 ‘풍수 사상’이다. 


풍수는 오늘날 한국인에게 대부분 미신으로 여겨지고 있다. 물론 원래 전통 풍수에 이런 면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다만 극히 일부 요소로 풍수 자체를 미신으로 낙인찍어버린 것이다. 

풍수는 원래 인간이 사는 공간의 물, 바람, 흙 지형과의 호흡을 분석하는 학문이다. 이는 도시 계획과 같은 분야에서 인간과 자연의 공존을 위해 연구하기도 한다. 그런데 한국에서의 풍수에 대한 오해는 식민지 시절 이를 부정하는 교육이 중요한 계기다. 복을 부르는 묏자리나 집의 배치 등 미신적 요소만이 풍수라고 심어놓은 탓이다. 풍수 사상에서 곁가지로 흘러나온 일부분을 지나치게 확대해 놓은 것이다. 


바람과 물의 이야기, 풍수


풍수는 공기의 흐름과 물의 흐름, 산과 식물, 강, 호수 등 모든 생태계를 다룬다. 이들이 서로 어떻게 상호 작용하는가를 정밀하게 분석하는 것이 풍수다. 또한 건물이 자연의 흐름 속에 통합될 수 있는 방법을 설명한다. 

풍수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인간과 자연과의 관계이다. 어떻게 이 둘이 공존할 수 있는지, 인간의 활동이 자연 세계의 순환과 흐름에 적절하게 어우러지는 방법을 찾아내는 것이 중요하다.


한국은 이러한 흐름과 순환의 학문을 대부분 잃었다. 하지만 삶 속에서, 그리고 여러 유산 속에서 여전히 남아 있다. 대표적인 것이 건축 유산이다. 한국의 건축 유산은 건축을 모르더라도 자연과 조화되는 모습에서 사람들에게 편안함을 준다.


한국의 건축가들이 좋아하는 건축이 하나 있다. 바로 근대 건축의 선구자로 불리는 미국의 건축가 프랭크 로이드 라이트의 〈낙수장(falling water)〉이다. 

‘낙수장’이라는 이름은 의미 그대로 맑고 깨끗한 계곡의 시냇물이 집을 끼고 흐르며 작은 폭포를 만들어 내고 있어 유래된 이름이다.

프랭크 로이 라이트의 낙수장

어느 건축비평가는 “궁극적으로 돌, 물, 나무, 나뭇잎, 안개, 구름, 하늘의 점증적 효과를 살린 결과물”이라고 극찬하기도 했다.


낙수장의 기둥은 모두 주변의 돌들로 만들어졌다. 1층 바닥에는 그곳에 자리하던 암석 등이 그대로 거실의 바닥을 이루게 해 친근감을 더했다. 자연 속에서 살아가는 모든 것, 바위 하나부터 물의 자연스러운 흐름까지 건물은 모두 품고 있다. 이 건축이 처음 등장했을 때 사람들은 각별한 사랑을 주었다. 누구나 꿈꾸던 집이었기 때문이다.


자연스럽게 자연환경에 녹아드는 집, 낙수장은 한국사람들에게 왠지 익숙하다. 낙수장이 자연과의 조화를 이루는 건축이라면, 이런 건축은 한국의 풍수를 적용한 건축들에서 쉽게 찾아볼 수 있다. 자연이 건물을, 건물이 자연을 닮은 듯, 서로를 배척하지 않고 어우러지는, 이런 풍수가 숨쉬는 건축이 한국의 건축이다. 


특히 드라마 〈미스터 션샤인〉 촬영 장소로 많이 알려진 ‘만휴정(晩休亭)’과 경주 안강에 있는 ‘독락당(獨樂堂)’은 이런 풍수적인 특성이 잘 살아 있다. 


‘늦은 쉼’을 뜻하는 만휴정은 조선 초 문신인 김계행이 지은 정자다. 그는 조선의 대표적인 청백리로도 잘 알려져 있다. 

나는 이 정자를 보면서 프랭크 로이드 라이트의 ‘낙수장’의 자연 속 집의 아름다움을 볼 수 있었다. 자연을 거스르지 않고 순응하는 건물, 바람이 쉬어가는 공간, 누구나 가슴 따뜻하게 품어줄 것만 같은 집이었다. 또한 오늘날 건축의 화려함과 돋보이려는 것 하나 없는 선비의 공간이었다. 

만휴정

정자 아래에 있는 폭포 앞 바위에 새겨진 ‘오가무보물 보물유청백吾家無寶物 寶物惟淸白(내 집에는 보물은 없지만 보물로 여기는 것이라면 청렴과 결백뿐이라네)’라는 문장은 조선 선비의 참 모습을 읽을 수 있다. 

이 정자에 앉아보면 대지의 물과 바람의 조화를 보게 된다. 병풍처럼 두른 산에 동화되어 바람의 길을 막지 않고, 흐르는 물을 따라 사람의 발걸음도 움직이게 한다. 자연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이는 모습에서 풍수를 거스르지 않는 장인의 손길이 따뜻하게 느껴진다. 


자연과 하나 되는 모습을 독락당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독락당은 ‘홀로 즐거움을 느끼는 집’이란 의미를 담고 있다. 무엇보다 이곳은 빼어난 한옥의 묘미와 풍수의 조화를 느끼기에 부족함이 없는 곳이다. 계곡에 바짝 붙어 있는 툇마루에 걸터앉아 흐르는 물소리를 들으며 불어오는 시원한 바람을 맞다 보면 그것이 바로 독락의 경지가 된다.

이곳은 이언적의 옛집 사랑채였다. 그는 관직에서 쫓겨나 이곳에서 학문 연구에 몰두했다고 한다. 독락당의 건물을 보면 만휴정처럼 한옥과 자연의 만남을 잘 보여주고 있다. 담장에 살창을 내어 집 안에서 바깥쪽 개울을 내려다볼 수 있게 만들어 자연과 더불어 살려는 의지도 엿볼 수 있다.

이 독락당은 풍수에서 말하는 공기와 물이 어떻게 조화를 이루는지를 말해준다. 그러면서 모든 자연과 생태계가 유기적으로 연결된 모습을 보여준다. 


자연과 순응하면서 이질적이지 않은 풍수의 이상을 보여준다. 풍수에서의 자연에 대한 겸손한 자세가 녹아 있는 건축이다. 물의 흐름이나 바람의 흐름을 막지 않고 자연스럽게 받아들이도록 지어진 집이야말로 사람을 가장 편하게 하는 공간이 될 수 있음을 알게 해준다. 


이런 자연과 하나 되는 공간, 이는 세계 모든 공간 디자이너와 건축가들, 도시 계획자들이 애타게 찾는 공간이다. 풍수의 공간, 즉 자연과의 유기적인 관계가 살아 있는 공간이 바로 인간을 자연의 하나로 건강하게 만드는 공간이다. 편리함보다 편안함을 추구하는 건축 공간은 현대인의 치유 공간으로도 연결될 수 있다. 풍수의 공간은 마음을 품는 공간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풍수는 물의 흐름과 자연의 모양을 받아들이며 정원 문화와도 연결된다. 한국의 대표적인 정원 ‘소쇄원(瀟灑園)’은 이런 물과 공기, 자연의 모든 만물의 흐름을 그대로 받아들이는 대표적인 풍수 정원이다.

대나무숲 사이로 펼쳐진 자연 속 옛 모습 그대로 남아 있는 정원. 여기에는 자연 속에서 겸손함을 유지하려는 풍수의 사상이 살아 있다.

소쇄원을 한자로 풀면 ‘瀟’는 ‘맑다’라는 의미를 지니고 있으며, ‘灑’는 ‘깨끗하다’라는 의미가 있다. 맑고 깨끗한 정원이란 뜻을 담고 있는 정자다. 속세의 때 묻은 세상에서 벗어나 맑고 깨끗한 세상에서 은거하며 살아간다는 선비의 정신이 들어 있는 이름이다. 

‘소쇄’라는 말의 어원은 남북조시대 문인 ‘공치규’의 <북산이문(北山移文)>에 나오는 말이다. ‘치개발속지표소쇄출진지상(恥介拔俗之標瀟灑出塵之想)’, 즉 ‘지조를 지키며 세속을 연연하지 않는 기풍과 한 점 티끌조차 없이 맑고 깨끗하게 세속의 때를 벗어버린 생각’에서 유래했다. 이 글은 산으로 들어가 같이 숨어 살기로 약속했던 ‘주옹’이 그 약속을 깨고 관리가 되어 다시 찾아온 것을 꾸짖으며 지은 글이다.


‘맑고 깨끗한 정원’ 소쇄원이 오늘날 사람들의 마음을 사로잡는 것은 교감의 정원이다. 삶의 지혜와 너그러움을 배우고, 찾는 사람들이 자연과 예술이 서로 만날 수 있게 하는 공간이다. 사람과 사람 사이에 다리를 놓는 한국의 공간이다.


풍수는 또한 산수를 그리는 화가들의 그림 속에서도 살아난다. 

풍수의 두 가지 핵심이 산과 물이다. 또한, 산수화의 핵심도 산과 물이다. 원나라의 4대 화가 가운데 한 명인 황공망(黃公望)은 산과 물을 이렇게 말하고 있다. “산언덕은 집을 앉힐 수 있는 지세여야 하며, 물 가운데는 작은 배를 띄울 수 있을 정도의 수량이 있어야 한다. 이와 같은 조건의 지세에서 생기가 있다(山坡中可以置屋舍. 水中可置小艇. 從此有生氣)”고 하였다.


그러면서 “그림에도 풍수가 있다(畵亦有風水存焉)”라고 말한다. 그래서 그의 최고의 걸작 〈부춘산거도(富春山居圖)〉는 자신의 풍수관이 반영된 작품으로 꼽힌다. 

부춘산거도(富春山居圖)

이런 풍수관은 한국으로 넘어와 완성되었다.

1000원권 지폐에 실린 겸재가 그린 〈계상정거도(溪上靜居圖)〉, 즉 ‘시냇가 위에 조용히 살고 있는 그림’이란 의미의 작품이 있다. 〈계상정거도〉에는 산이 감싸고 있는 언덕 위에 자리한 집과 그 아래 강에는 작은 배 한 척이 떠 있는 풍경을 그리고 있다. 

계상정거도(溪上靜居圖)

‘계상정거’라는 말은 퇴계가 쓴 시 가운데 ‘계상시정거 임류일유성(溪上始定居, 臨流日有省), ‘시냇가 위에 비로소 거처 정하고, 흐르는 물 바라보며 날로 반성하네’ 라는 문장에서 가져온 것이다. 


진경산수화가인 ‘겸재’가 그린 이 땅은 풍수가 살아 있는 땅, 사람이 살만한 땅이다.

이런 풍수에서 말하는 ‘사람이 살만한 땅’은 현대 사회에서 매우 중요한 것을 줄 수 있다. 또한 우리가 잃어버린 것이 무엇인지 도시건설 관점에서 살펴볼 수도 있다. 


풍수의 도시 서울 그리고 한강


도시 건설의 모델은 가까이 서울에서도 찾을 수 있다. 서울은 그야말로 풍수의 정수를 모아놓은 곳이었다. 처음 서울(한양)을 수도로 정하면서 산과 강이 잘 어우러지는, 바람과 물이 조화를 이루는 땅이었다. 특히 서울의 한강은 도시 계획에 있어 핵심이었다. 겨울의 차가운 북풍을 막는 산이 북쪽을 가로막고  있다. 그리고 햇빛이 풍부한 따뜻한 남쪽은 열린 곳이 바로 서울이다. 남쪽으로는 강이 흘러 농사에 절대 유리한 배산임수(背山臨水)의 땅이었다. 

서울은 사람들의 사랑을 받으며 600년 조선의 역사와 함께 오랜 세월 희로애락을 함께 해왔다. 그런데 오늘날 한강은 제 모습을 잃고 수로로만 남게 되었다.


조선 시대 가사의 대가였던 송강은 독서당(지금의 한남동)에서 한강을 내려다보면 호수처럼 넓고 아름답다 해서 그 동쪽을 ‘동호’, 서쪽을 ‘서호’라고 했다. 

독서당계회도

한명회에 의해 아우 성종에게 왕위를 빼앗기고 병을 가장하고 무심을 내세워 연명한 월산대군(月山大君)은 망원정(望遠亭)에서 내려다보는 한강의 아름다움에 취해 글을 남기기도 했다.


“추강에 밤이 드니 물결이 차노매라

낚시 드리우니 고기 아니 무노매라

무심한 달빛만 싣고 빈배 저어 오노매라”


달빛 어린 물결의 아름다움을 간직한 월파정(月波亭, 지금은 노량진 수산시장이 자리 잡고 있다)에 오른 다산은 달밤에 배를 띄우고 그 감회를 글로 남겼다.


“배에 올라 달이 뜨기를 기다렸다. 그저 만 길 금색 빛줄기가 수면을 쏠 뿐이었다. 눈 깜짝할 사이에 천태만상의 광경이 일렁이고 흔들거렸다. 움직일 때는 구슬이 땅에 쏟아지는 듯하고 고요할 때는 유리가 빛을 뿌리는 듯하였다”


“월파정 아래 조각배 대니, 마을에 연기 일고 해가 막 지네. 정자에 올라 술 마시고 내려와 노래하는데, 때때로 물결 위에 큰 고기 뛰노는 것 보이네”


수양버들 잎을 띄워 보내고, 백사장 모래밭 아이들의 재잘거림이 들리던 한강은 이제 없다. 지금은 아파트 숲과 8차선 도로에 가로막혀 접근조차 쉽지 않다. 도시화와 산업화로 아파트 가격은 상승했을지 모르지만, 사람들의 마음의 고향은 찾기조차 힘들다. 한강의 기억과 문화를 복원하기 위한 노력이나 수백 년 역사의 흔적을 찾지 않는다면 앞으로는 송강이나 월산대군, 다산이 노래한 한강은 다시 보기 어려워진다. 


한강을 잃는다는 것은 어쩌면 풍수의 도시, 서울의 정체성을 잃는 것일지도 모른다. 근대화의 과정에서 생기는 어쩔 수 없는 아픔이라고 말하는 사람도 있겠지만 잃은 것은 그것만이 아니다.


한국은 근대화의 과정에서 사람과 사람 사이의 공감을 잃었다. 사람과 그 주변 환경 사이에 담을 만들면서 자신을 고립했다. 가난한 사람과 부자는 같은 자리에 있지 못하는 사회가 되었고, 사람을 포근하게 감싸 안아주던 산과 강은 두꺼운 콘크리트 옷으로 가려버렸다. 


새로운 도시 계획의 모델


대도시의 폭발적인 성장은 오늘날 대부분의 아시아 국가들이 겪는 가장 위험한 변화 중 하나이다. 이런 변화 속에서 한국은 그 대안 모델을 풍수에서 다시 찾아야 한다. 사람과 자연의 어울림의 대화가 가능한 생태적 도시 개발이 바로 그 모델이다. 

이러한 시도는 아시아와 세계 모든 도시의 생태 환경 개발을 촉진하는 계기를 줄 수도 있다. 어쩌면 한국이 다시금 선도적인 문화를 만드는 국가로 오를 수 있는 길인지도 모른다. 그러한 생태학적으로 효과적인 도시를 만드는 데 매우 유용한 접근법이 ‘풍수’이다. 전통을 도시계획에 응용해 지속발전 가능한 환경을 창출하는 의미 있는 시도가 될 것이다. 


일반적으로 사람들은 도시계획이 과학적·합리적 접근법일 것으로 생각한다. 그러나 이러한 접근이 실제로 ‘합리적’인지 단정 지을 수 없고 능률적이라고 말하기도 쉽지 않다. 실제 현대적 도시계획은 풍수에서 설명하는 사람과 환경과의 조화에 대한 개념을 무시하고 있다. 


한국의 도시계획을 세우는 사람들은 이미 고도로 정교한 수준에 도달했다고 말한다. 하지만, 우리는 ‘사람과 자연공간의 조화’라는 근본 관점은 상실했다. 

대표적인 예가 바람 또는 물의 흐름에 대한 고려 없이 우후죽순 솟아오르는 고층 아파트 숲이다. 한국에서 아파트는 땅의 자연적 지세가 대부분 무시된다. 건축물을 좁은 땅에 최대한 올려야 하는 경제적인 관점에서 도시를 만들기 때문이다. 그러다 보니 이들 건물이 바람과 물이 지나는 자연스러운 길을 막아버린 것이다.

또한, 오늘날 도시 계획안을 보면 집, 공원, 거리 모두 직각을 기초로 하는 인공적 경관이다. 산과 계곡의 자연스러운 경관이 파괴된다. 자신이 상상하는 건물에 어울리지 않는다는 것이 그 이유이다. 그들이 상상하는 풍경에 맞추기 위해 자연미를 손상하며 지형을 바꾸는 것이다. 

인왕산에서 바라본 서울의 모습

한국도 급격한 근대화 과정에서 이렇게 직각을 디자인의 기본으로 받아들였고, 인간의 영역을 규정하는 가장 중요한 요소로 여겨왔다. 그런데 오늘날 이러한 도시 환경이 인간의 삶과 정서에 미치는 영향이 고려되면서 점차 변화하고 있다. 새로운 변화가 시작되고 있다. 

현대식 도시설계는 시대의 새로운 흐름에 맞춰 대안을 찾고 있다. 그 대안으로 풍수는 새로운 디자인을 제공할 수 있다. 

풍수는 자연과 인간의 건축물 간의 자연스러운 상호작용을 제공한다. 안과 밖의 공기와 물이 순환하는 ‘호흡하는 건물’을 짓는 새로운 설계 방법을 제시할 수도 있다. 이러한 건축물은 사람들에게 건강한 환경을 제공하기도 한다. 풍수 원리를 따라 숨을 쉬는 하나의 생태계를 형성하는 집과 건물도 지을 수 있다. 

자연의 흐름을 따라 지은 전망대(사진_노르웨이 국립 관광도로 건축 디자인전)

기후변화 시대에서 풍수의 지혜를 회복하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그 회복이 이루어지는 날 한국의 도시들은 다시 풍수의 도시, 생태 도시로 거듭날 수 있다. 또한, 한국의 풍수는 한류의 핵심이 될 수 있다. 이제 풍수에서 온고지신을 배울 때다. 


작가의 이전글 한국인만 모르는 한국의 보물 '한옥'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