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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고산 Jan 28. 2020

아인슈타인의 시간은
거꾸로 흐른다_세번째 이야기

고산의 과학 에세이

물질에 대해 탐구한 라부아지에      

    

아인슈타인의 놀라운 방정식은 앞에서 만난 패러데이의 발견에서부터 시작한다. 이제 사람들은 E=mc2 의 E가 무엇인지 알게 되었기 때문이다. 바로 세상의 모든 힘은 별개의 것이 아니며, 에너지라는 다른 형태의 하나의 존재라는 것이다. 패러데이의 전기와 자기의 힘에 대한 연구 결과로 엄청난 속도로 발전하게 된 에너지의 세계에서 아인슈타인은 어린 시절을 보낸다.

당시 도시의 어두운 가스등은 전기등으로 바꾸는 게 유행이 되었다. 여기에서 힌트를 얻은 아인슈타인의 아버지와 삼촌은 전기 공장을 하면서 발전기를 생산해 파는 일을 하고 있었다. 이러한 환경 덕분에 아인슈타인은 어린 시절을 전기 기계들이 어떻게 작동하는지 구경하며 지냈다. 모든 것이 호기심 투성이었다.


 그가 자연에 대해 의문을 품었던 가장 결정적인 것도 아버지가 선물해준 나침반이었다. 

아인슈타인은 나침반 바늘의 움직임에 너무도 신기해하며 그 세계에 깊이 빠져들었다. 나침반의 뒤에 숨어 있는 그 무엇인가가 그를 흥분하게 만들었던 것이다. 이것을 알고 싶었던 그는 10살 때부터는 혼자 책을 읽으며 호기심을 채웠다. 유클리드의 책을 보며 기하학을 익히는가 하면 온갖 과학책 속에 파묻혀 시간을 보냈다. 그의 호기심은 고등학교에 진학해서도 그치질 않았다. 

그에게 가장 흥미 있는 과목은 물리학과 수학, 철학, 그리고 바이올린 연주뿐이었다. 그 외의 어떤 것도 그의 마음을 끌지 못했고 그저 따분한 것들뿐이었다. 

특히 학교는 그 무엇보다 지루하기만 한 곳이었다. 엄격한 교육과 권위주의로 가득 차 있던 독일식 교육에 쉽게 적응할 수 없었던 것이다. 그의 학교생활에서 가장 큰 전환점은 1894년에 찾아왔다. 가족들이 독일을 떠나 이탈리아의 파비아로 이사를 하게 되면서 아인슈타인만 뮌헨에 홀로 남아 고등학교에 다니게 되었다. 그의 아버지가 급속히 산업화하고 있던 독일에서의 치열한 경쟁을 피해 다소 뒤떨어져 있던 이탈리아로 공장을 옮겼기 때문이다. 


이후 아인슈타인은 심한 갈등의 시기를 보내야만 했다. 군대식의 딱딱한 학교 교육을 버틸 수 없었던 그는 파격적인 선택을 했다. 학교를 자퇴하고 가족이 있는 이탈리아로 떠난 것이다. 그의 부모들은 당장 걱정이 앞섰다. 이러한 가족들을 어떻게든 안심시키기 위해 그는 파비아에 있으면서 유럽 최고의 학교인 스위스공과대학의 입학시험을 치렀다. 결과가 나올 때까지 아인슈타인은 아버지의 공장에서 일하며 전기를 배웠다. 공장은 그에게 호기심을 충족시켜주는 놀이터이자 실험실이나 다름없었다. 발전기를 작동시키면서 자신이 궁금해하던 것들을 하나씩 실험하며 이해해나가기 시작했다. 


그러던 중 입학시험 결과가 나왔다. 결과는 낙방이었다. 인문과목에서 낙제점을 받았기 때문이다. 새로운 길을 찾아야 했던 그는 아버지의 권유로 스위스 아라우에 있는 비교적 자유로운 분위기의 고등학교에 다녔다. 그의 인생에서 처음 느껴본 자유였다. 그곳에서 아인슈타인은 과학자로서의 본격적인 꿈을 키울 수 있었다. 

학교의 실험실은 책을 통해 알았던 다양한 지식을 체계적으로 정리할 수 있도록 도와주었다. 그는 특히 전기 실험에 더욱 많은 시간을 쏟아부었다. 나침반의 바늘에 전선을 달아 전지를 연결하면 자기장이 발생한다는 패러데이의 이론을 눈으로 확인하기도 했다. 또한, 전기와 자기는 전자기라는 한 가지 현상의 다른 모습이라는 것도 깨달았다. 그리고 자석과 쇳가루를 이용해 자기장에서 힘이 어떻게 움직이는지도 실험했다.


이제 실험을 통해 빛이 공간을 이동하는 전자기파라는 사실을 확신하게 되었다. 그는 패러데이와 앞선 시대의 과학자들이 이룬 업적을 자신의 것으로 받아들이기 시작한 것이다. 


그러면서 새로운 것에 도전하기 시작했다. 이전의 과학자들은 ‘에너지란 이미 발견된 것만이 전부’라고 믿고 있었다. 하지만 아인슈타인은 그것이 틀렸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한다. 그리고 그 생각을 계속 키워내 알 수 없을 정도로 방대한 에너지의 세계를 발견했다. 아무도 찾아내지 못했던 에너지의 근원이 존재할 것이라고 아인슈타인은 믿고 있었고, 결국 물질의 깊은 중심에서 이 거대한 에너지를 찾아낸 것이다. 

이 발견의 시작은 여러 실험이었다. 아인슈타인은 어떻게 평범한 금속판이나 용액, 자석과 같은 물질들에서 그와 같은 에너지가 나오는지 궁금했다. 물질을 이해하려는 그의 노력은 빛에 대한 호기심만큼이나 컸다.     


물질, E=mc2에서 m으로 표시되는 이것은 아인슈타인이 태어나기 100년 전에서야 그 존재에 대한 비밀이 풀리기 시작했다. 그 비밀을 찾기 위해 우리는 프랑스의 루이 15세가 집권하던 시절로 돌아가야만 한다. 

당시 프랑스의 귀족사회는 부패해 있었고 극심한 인플레이션으로 사람들의 생활은 피폐할 대로 피폐해져 있었다. 게다가 영국을 견제하기 위해 미국의 독립전쟁에 대한 엄청난 지원을 쏟아부으면서 국가재정은 파탄에 직면해 있었다. 앙시엥레짐으로 불리는 폭압적인 군주와 성직자, 귀족에게 백성이 강력한 도전장을 내밀 준비를 하고 있었다. 프랑스 대혁명이다. 이러한 일촉즉발의 위태로운 시기에 물질의 세계를 들여다볼 역사적인 발견의 기틀이 만들어지고 있었다.

계몽주의 시대였던 당시는 신이 아닌 인간의 이성으로 모든 것이 이루어져야 한다고 믿었다. 그 대표적인 것이 과학이었다. 과학지식이 인간을 행복한 세상으로 이끄는 견인차 구실을 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과학자들은 물질세계를 탐구하기 시작했다. 물질 간에 서로 어떻게 관계하는지를 알기 위해 각각의 물질들의 특성을 정리했다. 그것을 토대로 분류하는 것도 가능해졌다.


프랑스 파리의 세금 징수관이었던 앙트완 라부아지에가 최고의 과학자로 떠올랐다. 그는 우리 주변의 물질뿐 아니라 세상 모든 물질이 어떤 질서를 가지고 있다고 생각했다. 그의 생각은 바로 실험으로 연결되었고, 치밀하면서도 꼼꼼한 성격 덕분에 성공할 수 있었다.

라부아지에는 앞에서 말한 것처럼 직업적인 과학자는 아니었다. 유럽 사회를 180도 바꿔 놓은 프랑스 혁명이 일어나기 전 파리에서는 여러 공산품이나 생활용품, 술과 담배 같은 기호품이 있어야 했다. 그런데 세금을 거두는 일은 정부에서 관여하지 않고, 세금 징수원 조합이라는 부유한 사람들이 맡고 있었다. 그들은 국가에 매년 일정액의 돈을 지급하는 대신, 거둔 세금을 전부 자신들이 나누어 가졌다. 세금 징수원들은 더 많은 이익을 얻기 위해 파리를 빙 둘러 거대한 담을 쌓고 단속도 엄하게 하였으며, 탈세나 밀수가 드러나면 엄하게 처벌했다. 상인이나 일반 시민의 입장에서 그들을 미워할 요소는 충분했다. 라부아지에도 이 조합의 일원이었기 때문에 엄청난 재산을 모을 수 있었지만 이로 인해 프랑스 혁명기에 불행한 최후를 맞이했다. 


그의 직업이 비록 일반 사람들에게 아픔을 주는 것이었지만, 그가 연구한 과학의 결과물은 훗날 사람들에게 엄청난 선물이었다. 그의 이러한 성과 뒤에는 마리안느라는 현명한 아내가 있었다. 40년 연상의 백작과 결혼하려는 동료 세금징수원의 딸을 유혹해 결혼에 성공한 것이다. 마리안느는 남편을 도와 화학을 공부하며 틈틈이 영어 공부와 그림 공부도 병행했다. 영어를 공부해 최신 연구 결과들을 번역했고, 남편의 연구를 도우면서 연구 결과들을 그림으로 남겨 훗날 실험의 방법과 과정, 결과들이 프랑스 혁명의 와중에 사라지지 않고 남게 되었다.

라부아지에가 한 최초의 본격적인 화학 실험은 물과 흙은 서로 바뀔 수 있는가 하는 문제였다. 라부아지에는 절대 이러한 일은 있을 수 없다고 생각했다. 당시 과학자들은 물을 병 속에 넣고 오랫동안 끓였을 때 바닥에 흙과 같은 물질의 침전이 생기는 것을 보고 물을 가열하면 흙으로 변한다고 주장하고 있었다. 이것은 고대 그리스 때부터 전해져 내려온 아리스토텔레스의 ‘4원소설’을 바탕으로 하는 이론이었다. 


그는 이것이 사실인지 아닌지를 확인하기 위해 정교한 실험 장치를 고안했다. 이 장치는 물을 끓이면 그 증기가 나선형 덮개 아래에 붙어 있다가 식으면서 물이 되어 바닥으로 다시 떨어지는 장치였다. 

1768년, 그는 약 100일 동안 물을 끓여 실험했다. 그는 우선 깨끗한 물을 준비하고 그것의 무게와 실험 장치의 무게를 쟀다. 그리고 물을 실험 장치에 넣고 계속 끓였다. 시간이 지나자, 실험 장치의 바닥에는 고체 상태의 물질들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그러나 그것은 물이 흙으로 변한 것이 아니라 유리로 된 실험기구 일부가 녹아 생긴 것이었다. 

이 사실은 물이 들어 있는 상태에서 실험장치 전체의 질량, 바닥에 생긴 물질의 질량, 물을 제거한 후의 실험장치의 질량을 측정하여 알아냈다. 실험 장치 전체의 질량은 끓이기 전과 차이가 없었고, 유리로 된 실험장치의 질량은 전보다 줄어들었으며, 줄어든 질량은 바닥에 생긴 물질의 질량과 같았다. 그러므로 바닥의 물질은 물로부터 나온 것이 아니라 유리로 된 실험 장치에서 떨어져 나온 것이었다. 

여기서 그는 물은 흙으로 변환하지 않는 근본 물질일 것이라는 결론을 내렸다. 이천 년 가까이 내려온 아리스토텔레스의 4원소설이 틀렸음을 증명한 것이다. 


이 실험은 과학에서 질량 측정을 중요하게 여기는 계기가 되었다. 그는 화학자 중에서 처음으로 실험의 결과를 확인할 때 질량이라는 개념을 도입해 근대 화학의 기틀을 만들었다. 

1777년 라부아지에는 ‘연소’란 무엇인가에 대한 답도 내놓았다. 나무나 석탄에 들어 있는 ‘플로지스톤’이라는 물질이 불에 타 연기로 빠져나가고 재만 남는다는 기존의 생각을 뒤집었다. 

그는 연소물이 산소와 결합한 것이라고 주장했다. 플로지스톤 설은 약 100년 동안 과학계를 지배하고 있었는데 그의 실험결과로 무너진 것이다. 그야말로 화학의 역사를 다시 써야 하는 상황이 되었다.


그럼 플로지스톤에 대해 더 알아보자.

우리는 나무가 타거나 금속이 녹이 스는 것은 이것들이 산소와 결합하기 때문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다. 

그러나 라부아지에 시대의 사람들은 ‘연소’란, 물질을 불에 태우면 그 안에 있던 무엇인가가 빠져나가는 것이라고 믿었다. 나무나 석탄으로 불을 피우고 나면 원래의 나무나 석탄이 가지고 있던 형태나 성질은 거의 다 없어지고 재만 남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연소’라는 화학 현상은 이처럼 물질에서 플로지스톤이 공기 중으로 연기가 되어 빠져나가고 재만 남는 것이라고 자연스럽게 생각했다. 

그런데 라부아지에의 실험을 통해 플로지스톤 설은 무너지고 새로운 이론인 산소와 화합하는 ‘산화설’이 등장했다. 라부아지에의 산화설은 근대 화학의 시작을 알리는 첫걸음이 되었다. 


라부아지에의 연구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아인슈타인의 발견을 이끈 "질량보존의 법칙"이다. 그는 실험을 통해 이것을 증명했는데 지구는 외부와 에너지 교환을 하지 않는 닫힌계, 다시 말해 완전히 밀폐된 공간이라면 모든 물질의 질량은 어떠한 변화를 거치더라도 감소하거나 증가하지 않고 언제나 동일하다는 것이다. 아인슈타인은 이것에서 한발 더 나아가 질량이 사라지면 그 양에 빛의 속도를 제곱한 만큼 에너지로 변할 수 있다는 토대를 만들었다.


라부아지에는 아리스토텔레스의 4원소설을 무너뜨렸던 과정과 유사하게 실험을 진행했다. 먼저 일정량의 물을 담은 실험용 유리 용기를 지속적으로 가열해 수증기로 만들었다. 그런 다음 용기의 입구와 연결된 금속관으로 보냈다. 그 금속관은 석탄 속에서 벌겋게 달궈진 다음 반대편으로 보내는 것이었다. 그리고 금속관을 통과해 나온 수증기를 식혀 물이 양을 쟀다. 

라부아지에가 실험 후 잰 이 물의 양은 처음 유리 용기에 있던 양보다 약간 줄어들어 있었다.  

그는 이 실험으로 가연성의 기체가 새롭게 발생하고 금속관이 무거워진 것을 동시에 보여줬다. 그래서 증가한 금속관의 무게와 기체의 무게를 더하면 사라진 물의 양과 일치한다는 사실을 알아낸다.

물은 기본적으로 산소와 수소로 이루어져 있는데 금속관의 내부에 산소가 달라붙어 있고, 가연성의 기체 수소가 산소와 따로 떨어져 남아 있게 된 것이다. 화학변화를 거쳐도 질량은 변화하지 않는다는 것을 보여준 것이다.

물질이 변하는 과정에서 만들어질 수 있는 액체와 증기와 가루를 모두 꼼꼼하게 모을수록 질량은 감소하지 않는다는 그의 생각은 사실로 드러났다. 액체는 기체가 되고, 금속은 녹이 슬고, 나무는 재와 연기로 바뀔 수 있지만 물질, 즉 모든 물질을 구성하는 작은 원자는 절대로 소멸하지 않는다는 것을 증명한 것이다. 


그는 오랫동안 이러한 실험을 반복했다. 그 실험은 수천 번의 과정과 엄청난 정밀성을 요구하는 것이었다. 그러한 정밀성을 요하는 실험 기구의 가격은 만만치 않았다. 세금징수관이란 직업이 그에게 충분한 재력을 뒷받침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그런데 아쉽게도 그의 실험은 계속될 수 없었다. 프랑스 혁명 때문이었다. 많은 왕족과 귀족이 단두대의 이슬로 사라져갔다. 특히 실패한 과학자에서 과격한 신문 편집자로 변신해 프랑스 혁명의 지도자 중 한 명이 된 장 폴 마라와의 갈등은 그의 최후를 앞당기는 결과를 가져오고 말았다. 두 사람의 사이가 나빠진 것은 유명한 과학자로 알려졌던 라부아지에가 마라의 과학 연구에 대해 인정하지 않고 내쳐버린 것이 결정적인 요인이었다.

마라는 라부아지에가 세금징수원으로 일하면서 시민의 돈을 착취했다며 그를 민중의 적으로 규정했다. 결국, 라부아지에는 다른 세금징수원들과 함께 단두대에 서야만 했다. 


단두대 앞에 선 그는 스스로 자신을 변호하며 다음과 같은 말을 했다. 


‘나는 젊었을 때 화약 감독관으로 국가에 봉사했고 도량형을 개량하는 데도 많은 일을 했다. 또한, 시대는 나와 같은 뛰어난 능력이 있는 과학자가 필요할 것이며 널리 알려진 <화학 원론>도 내가 저술했다.’ 


그의 죽음을 안타깝게 여긴 몇몇 과학자들이 그의 사형 집행을 연기해 달라고 청원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당시 국가혁명위원회의 재판장은 그에 대한 재판에서 ‘공화국에는 과학자가 필요없다.’라며 청원을 기각해버린 것이다. 

라부아지에는 과학자로서 최고의 전성기를 누릴 수도 있는 나이인 51세에 단두대의 이슬로 사라졌다. 

당시 유명한 수학자 라그랑주는 그의 죽음을 애도하며 ‘그의 목을 자르는 데는 1초밖에 걸리지 않았지만, 그의 목을 만들려면 100년이 걸릴 것이다.’라는 유명한 말을 남겼다. 

비록 그는 단두대의 이슬로 사라졌지만, 그의 연구 결과는 과학계와 아인슈타인의 E=mc2의 발견에 크게 이바지한다. 그가 밝혀낸 물질의 세계는, 어떤 물질이든지 분리할 수 있고 다시 결합할 수도 있지만 어떤 상황에서도 그 물질의 질량은 감소하거나 증가하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프랑스 혁명 후 불에 탄 파리를 보자. 혁명의 결과로 아무것도 남지 않은 폐허가 되었다. 집을 지탱하는 나무나 가구나 그릇 등 생활용품들이 재와 흙이 되었고, 가로수와 많은 생명이 연기로 바뀌었지만 사라진 것은 없었다. 

파리의 상공에 아무것도 빠져나가지 못하게 거대한 돔을 씌워 연기와 파편과 재를 포함한 그 모든 것을 합한다면 원래의 파리의 모든 것을 합한 질량과 같기 때문이다. 결국, 파괴되고 불에 타도 잃은 것은 아무것도 없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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