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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고산 Jan 28. 2020

아인슈타인의 시간은
거꾸로 흐른다_다섯번째 이야기

고산의 과학 에세이

숨겨진 천재, 에밀리 뒤 샤틀레       

   

이제 젊은 아인슈타인은 에너지와 질량과 광속이 어우러진 전혀 다른 세계에 발을 들여놓기 시작했다. 하지만 아직 아인슈타인에게 부족한 것이 있었다. 패러데이가 확립한 에너지, 라부아지에의 질량의 문제, 맥스웰의 전자기파와 광속의 문제까지는 어우러졌지만, 제곱의 문제가 남아 있었다. 바로 E=mc2 에서 c의 제곱, 즉 광속의 제곱이다.


18세기 중엽까지 과학자들은 물체의 운동량을 계산하는 방법을 둘러싸고 논쟁을 계속하고 있었다. 물체의 운동과 에너지를 계산하는 방정식은 아직 정립하지 못하고 있었으며 수십 년 전 나온 뉴턴의 주장에 의존하고 있었다.

바로 ‘운동량=질량×속도’라는 것이다. 


뉴턴이 말한 이 운동량은 패러데이에 의해 모든 에너지는 옷만 바꿔 입은 것이니 결국 ‘운동량=에너지’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뉴턴의 공식대로 하면 E=mc가 된다. 뭔가 이상하다? c의 제곱이 아직 아니다. 


바로 이 문제에 결정적인 공헌을 한 사람은 전혀 뜻밖의 인물이었다. 프랑스 루이 14세가 아끼던 귀족의 딸 에밀리 뒤 샤틀레라는 여인이 바로 해답을 찾아낸다. 샤틀레는 여성의 역할이 오직 아내의 자리와 어머니의 자리를 지켜야 한다는 일반적인 생각을 뒤집은 사람이다. 남자와 결투를 벌이는가 하면 도박판에서 돈을 벌어 그 돈으로 책을 사 모으고, 여러 남성과 연애를 하는 등 자유로운 삶을 살았다. 이러한 그녀를 보고 그녀의 아버지는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내 딸이 이제 미친 게 아닌가 싶소. 지난번 도박판에서 돈을 모두 따, 그 돈으로 책을 사버렸지 뭐요? 신은 이렇게 책만 좋아하는 여자에게는 결혼의 축복을 내리지 않는다는데 말이오.”


그녀는 그 시대의 다른 여자들과 분명히 달랐다. 여자가 아닌 과학자로서도 매우 새롭다. 그녀는 당시의 유명한 사상가 볼테르와 함께 시레이의 별장을 고쳐 연구실로 사용했는데, 에너지의 크기에 대해 객관적인 근거를 찾아낸 사람으로 유명했다. 그 결과는 당시 최고의 과학자로 존경받던 뉴턴이 아닌 라이프니츠의 관점에서 본 것이었다. 문제는 이 라이프니츠가 당시 뉴턴의 최대 맞수라는 것이다. 가장 유명한 것이 바로 미적분학의 창시자를 두고 벌인 싸움이다. 동시에 영국과 독일의 대표적인 수학자였던 이들 둘의 싸움에 많은 학자가 둘로 갈라 서기도 했다. 결국, 당시 학계에서는 미적분학에 대해 뉴턴과 라이프니츠 두 사람이 동시에 창시한 것으로 결정지어 버렸다. 하지만 볼테르는 철저히 뉴턴주의자였다. 그러한 이유로 그녀는 볼테르 몰래 실험을 해야 했다. 

그렇다고 볼테르가 그녀의 길을 막았던 것은 아니다. 오히려 그녀가 자신의 길을 가는 데 가장 큰 역할을 했다. 계몽사상가인 볼테르가 있었기 때문에 여성이라는 이유로 차별받지 않고 독자적인 자리를 세울 수 있었던 것이다.

에밀리 뒤 샤틀레는 43세로 일찍 죽었지만, 그녀가 그 짧은 생애 동안 이룬 업적은 아인슈타인의 발견에서 아주 중요하다. 이제 18세기의 천재 여성과학자 에밀리 뒤 샤틀레를 만나보자. 


샤틀레는 역학에 대한 최고의 걸작으로 꼽히는 아이작 뉴턴의 자연철학 수학적 원리 ‘프란키피아’를 번역하는가 하면, 수많은 과학 논문을 발표했다. 샤틀레의 프란키피아 번역본은 오늘날까지도 프랑스에서 교과서로 사용하고 있다. 물론 뉴턴의 법칙을 허문 것도 그녀였다.

그녀가 뉴턴에 관심을 둔 것은 뉴턴에 대한 볼테르의 논문들 덕분이었다. 볼테르는 영국에 피신해 있는 동안 오직 뉴턴의 연구에만 관심을 두고 있었다. 볼테르는 영국에서 돌아와 조용히 연구할 곳을 찾던 중 그녀의 성에 머무르게 되었다. 

볼테르가 영국으로 건너가게 된 것은 왕실을 모독했기 때문이었다. 두 차례나 감옥에 갔고, 또다시 바스티유 감옥에 갇힐 위기를 맞았었다. 결국, 권력자의 분노를 사 영국으로 추방당했는데 그 시기에 뉴턴의 사상과 만나게 된 것이다. 이때 자신이 공부한 뉴턴 이론은 고스란히 샤틀레에게 전해주었다. 

그녀는 그것들을 충분히 받아들일 만큼 뛰어난 두뇌를 가지고 있었고, 철학이나 과학, 수학 외에 언어학에서도 두각을 나타냈다. 12살의 나이에 6개의 외국어를 할 정도였다. 


그녀는 열아홉의 나이에 원치 않았지만 부유한 프랑스 장교와 결혼을 했었다. 남편과의 결혼 생활은 행복하지 못했다. 남편이 대부분의 시간을 군대에 가서 생활하는 바람에 만날 기회도 많지 않았다. 

결국, 남편과 이상이나 기질이 너무 달라 합의 후 따로 살기로 하고 떠나게 되었다. 

세 자녀를 둔 어머니와 한 남자의 아내라는 굴레에서 벗어난 그녀는 스물두 살부터 고등 수학에 빠져들었다. 

당시 가장 저명한 수학자였던 모페르튀에게 수학 과외를 받을 정도로 열성적이었다. 모페르튀는 유럽 최고의 과학자라고 일컬어졌던 뉴턴의 중력 이론을 최초로 프랑스에 소개했던 사람으로 1736년에는 북극탐사대와 함께 위도 1도의 길이를 측정해 지구가 타원체임을 증명한 것으로 유명했다. 모페르튀가 북극으로 떠나자, 샤틀레는 볼테르와 만나기 시작했다. 샤틀레는 주변의 뛰어난 학자들로부터 영향을 받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자신만의 생각을 정립해 나갔다. 


그러던 중 그녀는 주변의 사람들을 놀라게 하는 일을 일으켰다. 당시만 해도 엄청난 권위를 갖고 있던 아이작 뉴턴의 이론에 의구심을 나타낸 것이다. 뉴턴은 다른 물체와의 충돌에서 생기는 힘을 물체의 운동량으로 표현하면서 운동량=질량×속도라는 비교적 단순한 공식을 내놓았다. 에밀리 뒤 샤틀레는 조금은 다른 이론을 내놓았다. 과학에 대한 편지를 주고받으며 알게 된 독일 수학자 라이프니츠의 반론에 동조한 것이었다.      

라이프니츠는 움직이는 물체의 내부에는 웅크리고 있는 힘이 있다고 생각했는데, 그것을 라틴어로 ‘비스비바’, 즉 ‘활력’이라고 불렀다. 

수많은 과학자는 이 이론을 인정하지 않았지만, 라이프니츠는 물체의 운동량, 즉 에너지는 질량에다 속도의 제곱을 해야 한다고 확신했다. 고대 이후로 제곱을 이용한 곱셈 방식은 어디서나 흔하게 사용했지만 물리학에서는 아직 적용되지 않고 있었다.


뉴턴의 이론을 절대적인 것으로 받아들이던 당시의 사회 분위기에도 샤틀레는 자신의 믿음을 굽히지 않았다. 그러던 중 자신의 생각을 입증해 줄 네덜란드 과학자 빌 스흐라베산더의 실험 소식을 듣게 되었다. 

그는 실험을 통해 공이 떨어질 때의 충격이 정확히 속도의 제곱과 맞아떨어진다는 사실을 보여주었다. 그 실험은 진흙으로 만든 판에 놋쇠로 만든 공을 떨어뜨려 그 파인 깊이를 재는 것이었다. 만약 뉴턴의 법칙이 맞다면 첫 번째 공을 떨어뜨려 파인 깊이보다 두 배 더 빠른 속도로 떨어뜨린 공의 파인 깊이는 두 배가 되어야 했다. 그리고 그 속도를 세 배 올린다면 파인 깊이가 세 배여야 했다.


그런데 샤틀레가 증명한 실험에서는 전혀 다른 결과가 나왔다. 두 번째 놋쇠공이 파인 깊이는 두 배가 아닌 네 배였다. 세 배 빠른 속도로 떨어진 공은 아홉 배나 더 깊이 진흙으로 파고들어갔다.

라이프니츠가 얘기한대로 속도의 제곱을 해야 한다는 것을 증명했다. 움직이는 물체의 에너지는 제곱으로 커진다는 사실을 확인한 것이다.


만약 차를 시속 30킬로미터의 속도로 가다가 멈추면 어느 정도 미끄러지다가 멈추게 된다. 시속 90킬로미터의 속도로 달리다가 멈춘다면 어떻게 될까? 이때 미끄러지는 거리는 세 배가 아닌 아홉 배가 된다. 

샤틀레가 새롭게 알아낸 에너지를 구하는 공식은 뉴턴이 이야기한 ‘에너지=질량×속도’가 아니라 ‘질량×속도2’이었다. 그녀는 놋쇠 공 뿐 아니라 상아로 만든 탄환, 진자, 그 밖의 여러 물체를 가지고 실험을 했음에도 그 결과는 같았다.

이러한 결과를 에밀리 뒤 샤틀에는 1740년에 발표한다. 그것은 커다란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그녀의 이러한 열정에 감복해 볼테르는 ‘여자라는 것이 유일한 단점인 정말 대단한 사람’이라고 할 정도였다. 


하지만 영국의 분위기는 달랐다. 그들은 위대한 뉴턴의 이론에 이의를 제기한 사람이 영국인이 아닌 프랑스 사람이고, 게다가 여자가 한 일이라는 사실 때문에 오랫동안 이를 인정하지 않았다.


이제 프랑스 사회에서 세상의 흐름을 바꿀 위대한 과학자의 반열에 오른 그녀지만 그녀 앞에 기다리고 있는 무서운 종말은 피할 수 없었다. 그녀는 연하의 군인과의 관계로 넷째를 출산했다. 당시만 해도 43살의 나이에 아이를 낳는 일은 아주 위험했다. 의학 기술이 지금처럼 발달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녀는 임신기간 내내 자신에게 닥칠 죽음의 순간을 예감하고 있었다. 

샤틀레는 여성이 아무리 뛰어난 능력을 갖추고 있더라도 사회적으로 제약이 많았던 시절을 살아오면서 그것에 맞서 많은 업적을 이루었지만 인간이라면 누구에게나 오는 죽음이라는 운명은 피해 갈 수 없었다. 그녀는 넷째 아이를 출산한 지 엿새 만에 숨을 거두고 말았다. 에밀리 뒤 샤틀레를 더 없이 사랑하고 존경했던 볼테르는 그녀가 죽자 “내 존재의 의미였던 한 영혼을 잃었다.”라고 말했다.


그녀가 죽었지만, 물체의 에너지에는 속도의 제곱이 작용한다는 에밀리 뒤 샤틀레의 주장은 학계에 커다란 논쟁거리였다. 그래서 그녀가 죽은 지 100년이 지나서야 정식으로 인정받게 되었다. 아인슈타인은 이 공식을 밑거름으로 에너지와 질량과 빛의 속도가 잘 조화된 공식을 발견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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