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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트윈픽스의 빗치 May 02. 2019

향수

2019.5.2.

우울해서 점심을 거르고 백화점엘 갔다.

기분 전환을 위해서는 좋은 향을 맡는 것만한 게 없다고 생각했다. 이런 차에 평소에 관심 있던 톰포드의 벨벳오키드와 블랙오키드를 시향해 보러 간 것이다.


결국 침울한 기분은 지름신을 불러냈고 시향했던 향수도 아닌 전혀 예정에 없던 향을 사 버렸다.

(벨벳오키드는 내가 좋아하는 연예인이 좋아하는 향수라고 해서 기대가 컸는데 되게 별로였다.)

그래도 기분은 좋아졌으니 현명한 소비였다고 할 거다. 며칠 지난 내 생일을 기념하기 위해 나를 위한 선물(매일 하는데!!!)도 줄 겸 했다고 자기합리화를 해 본다.




고등학생 때부터, 아니 중학생 때부터였나 향수를 써 왔다. 처음에는 하나같이 우아하고 예쁜 병에 매혹됐다. 그러다 뚜껑을 열고 향기를 맡은 순간 이 향을 내가 가지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향수를 내 몸에 뿌려도 지속력은 그리 오래 가지 않지만 아름다운 병을 갖고라도 있다면 이 좋은 냄새가 내 것이 될 것 같았다.


향수를 사 오면 책상 위에 올려 두고 한참을 감상했다. 가장 먼저 산 향수의 뚜껑 위에는 작은 요정이 앉아있었다. 향수병을 앞에 두고 그림도 그렸다.


지금까지 한 번이라도 뿌려봤던 향수를 세자면 20종류는 넘을 것이다. 하지만 아직도 나에게 완벽한 향수는 찾지 못했다.

한참 '프렌치 시크'라는 개념에 빠져 있을 때 읽었던 책 중에서 "프랑스 여자는 30살이 되기 전에 자기만의 향수를 찾는다"는 구절을 읽었던 기억이 난다. 나도 그러리라 다짐했지만 이미 늦었다.


지금까지 마음을 줬던, 혹은 샘플 말고 온전한 병으로 두고 썼던 향수들에 대해 간단하게 기록해 보려 한다. 이름까지 기억 나는 것들로만. 의 향수 방랑기.




1. 안나 수이 시크릿 위시

인생의 첫 향수. 향기보다 뚜껑에 앉은 팅커벨과 향수의 오묘한 색깔에 반해서 샀다. 학생 때 썼던 향수인데 딱 그 나이대에 과하지 않았던 향이었다. 달고 시원하고 가벼웠다.


탑노트: 멜론, 타제트, 레몬
미들노트: 블랙 커런트, 파인애플
베이스노트: 스킨 머스크, 앰버, 시더우드


2. 살바토레 페라가모 인칸토 샤인

분홍색을 좋아하지 않는 내가 대체 무슨 바람이 불었는지 병에 반해 이 향수를 샀다. 상큼한 복숭아 향이 났던 것 같지만 기억이 잘 안 날 정도로 매력이 없었다. 이 역시 학생이 쓰기에 무난했던 듯.


탑노트: 파인애플, 패션 프루트
미들노트: 프리지아, 복숭아
베이스노트: 시더우드, 앰버


3. 랑방 에끌라 드 아르페쥬

인생 향수를 찾았다고 생각했었다. 국민 향수라고 불릴 만큼 많은 사람들의 마음을 사로잡는 향이다. 이 역시 달달한 복숭아 향이 나는데 인칸토 샤인보다 조금 더 어른스러웠던 것 같다. 어릴 때 나는 복숭아 향에 빠져있었구나... 이 향수를 뿌리고 학교에 갔는데 내가 좋아하는 남자애가 "너한테 담배냄새 나. 담배 끊어."라고 해서 조금 충격 받았었다. 그럼에도 꿋꿋이 뿌렸고 3병 정도 비웠다. 하지만 너무나 대중적이어서 매력이 없어졌다.


탑노트: 그린 라일락, 시실리안 레몬
미들노트: 그린티 리브스, 피치 트리 리브스, 피오니
베이스노트: 레바니즈 화이트 시더우드, 화이트 머스크, 앰버


4. 더 바디샵 화이트 머스크

전국에 "이거 내 살 냄새야" 열풍을 불러일으킨 향수. 향이 너무 좋아서 내 몸은 물론이고 머리카락, 가방 안, 스카프, 책까지 온갖 곳에 다 뿌렸다. 당시 친구들은 머스크 향만 나면 "어 이거 너 냄새다" 했었다. 탑 미들 베이스 모두 머스크 향이 나는 머스크 칠갑 향수다.

그러나 가격과 비례하는 턱없는 지속력, 가격과 반비례하는 희귀성에 쉽게 질려서 집에서 방향제로 썼다. 같은 브랜드의 스모키 로즈도 샀었는데 나는 생각보단 로즈 향 취향이 아니어서 다 쓰지도 않고 방치.


탑노트: 머스크, 백합, 일랑일랑
미들노트: 머스크, 자스민, 백합, 장미
베이스노트: 머스크, 아이리스, 패츌리, 바닐라


5. 겐조 플라워 바이 겐조

정말 오랜 기간 동안 수 없이 많은 병을 비웠던 향수. 나에게 가장 완벽한 향수에 가까웠던 플라워 바이 겐조. 이 향수를 처음 사게 된 건 100% 서기가 나오는 광고 때문이었다.

나는 '대가리가 큰 꽃'을 좋아한다. 잔잔하게 여러 송이가 있는 꽃보다 강렬하고 거대한 한 송이가 화려한 꽃을 좋아한다는 뜻이다. 작약이나 양귀비가 대표적인데 하필 플라워 바이 겐조의 꽃이 양귀비였다. 새빨간 한 송이 양귀비 같은 서기가 빨간 립스틱을 바르고 빨간 드레스를 입고 파리를 꽃향기로 물들이는 몽환적인 광고와 감각적인 음악!

광고에 현혹된 나는 얼른 달려가서 겐조 향을 맡아봤고 취향을 저격하는 냄새에 두 번 반해서 바로 사버렸다.

(파우더리하고 플로럴한 향을 안 좋아하는 줄 알았는데 나는 플로럴에 미친 취향이었던 것이다)

http://youtu.be/JmbdQ_xZVWA


그 다음 겐조에서는 동그랗고 짤막한 병에 담은 플라워 인 디 에어를 내 놨으나 한 번 맡아본 결과 나는 역시 길쭉한 오리지널이 좋았다. 오리엔탈리즘을 자극하는 광고는 계속 업데이트 되고 있다. 가장 최근에는 한국 배우 김태리가 광고를 찍었다. 서기의 그 관능적이면서도 적당히 속세에 찌든 것 같은 묘한 분위기는 나지 않지만 그래도 내가 생각하는 겐조의 느낌은 그대로 잘 살렸다. (아 이건 음악이 대박이다)

https://youtu.be/Q3q6fy4H0wA


나는 내가 플라워 바이 겐조를 죽을 때까지 쓸 줄 알았다. 해외 출장이나 여행을 가면 면세점에서 무조건 이 향수를 구매해 뒀다. 지금까지 몇 병이나 썼는지 모르겠다.

그러나 이미지로 흥한 향수 이미지로 망한다(?)고, 겐조의 이미지를 뛰어넘는 광고를 보고 다른 향수로 갈아타 버렸다.


탑노트: 블랙커런트, 산사나무, 불가리안로즈
미들노트: 오포포낙스, 재스민, 파라마 바이올렛, 로즈, 화이트 머스크
베이스노트: 바닐라, 인센스


6. 크리스챤 디올 자도르

프랑스 여자 냄새가 나는 향수다. 하지만 젊은 여자는 아니고 나이가 좀 지긋한 섹시하고 원숙미 넘치는 프랑스 여자. 스프레이 형식으로 뿌렸던 다른 향수와 다르게 뚜껑 끝에 조그만 막대 형태의 뭔가가 달려서 손목과 귀 뒤에 톡톡 두드려주며 썼다. 그야말로 고오급진 향이 나는데 내가 쓰기엔 너무 무거워서 엄마를 드렸다.


향수병이 사람으로 환생한 듯한 샤를리즈 테론 언니님의 섹시한 자태. 광고에서 쟈도르 향기가 그대로 나는 듯하다.

https://youtu.be/4NXbiGTmbrc


탑노트: 코로모산 일랑일랑
미들노트: 터키와 불가리아산 다마스크 로즈
베이스노트: 인도산 삼박 자스민, 그리스 자스민


7. 크리스챤 디 쁘아종

영원히 쓸 줄로만 알았던 겐조의 아성을 무너뜨린 디올 쁘아종. 결정적인 이유는 나의 최애 배우 에바 그린 때문이었다.

언니 날 가져요

그러나 알고보니 에바 그린이 광고했던 이 '미드나잇 쁘아종'은 이미 단종되었다는 게 아닌가. 단종 전에 이 향수를 써 봤던 사람들이 구전하는 전설적인 향기 체험담만이 부질없이 인터넷을 떠돌 뿐.


지금 나오는 쁘아종 역시 병 모양이 같다. 뭔가 금단의 열매처럼 생겼다. 특히 내가 산 쁘아종은 짙은 보라색의 병 색깔이 가장 매력적이다. 베트남 출장길에 면세점에서 얼른 질렀는데 정말 쁘아종(poison)이 담겨있을 법한 짙은 녹색의 박스도 예뻐서 한참을 못 버렸던 기억이 있다.


향수를 한 번 사면 병을 비울 때까지 쓰는데 이상하게 쁘아종은 한참 남아 있다. 정말로 관능적이고 섹시하지만 너무 무겁다고나 할까. 겨울에도 매일 뿌리기에는 부담스럽다. 청바지를 즐겨입는 내 옷차림과는 잘 맞지 않는다. 어쩌다 구소련 느낌으로 빡세게 꾸미고 털코트까지 입을 때가 있는데 그런 날에만 어울릴, 쉽게 감당하지 못할 향이 난다.


노트: 앰버, 허니, 베리, 스파이스
(검색을 해도 잘 안 나온다. 얼마나 오묘하면)




이렇게 정리해보니 내가 어떤 계열, 어떤 노트의 향수를 좋아하는지 대강 보인다. 그 때 그 때 기분 따라 사는 줄 알았는데 뭔가 관통하는 특징이 있어서 재미있다.


향수를 꾸준히 사다보니 또 하나 신기한 것은 종이에 뿌려서 맡는 향과 내 살 냄새와 섞여서 풍겨나오는 향이 완전히 다르다는 것이다. 향수 말고도 바디로션이나 핸드크림을 쓰는데 그런 향과 섞이면 세상에 하나밖에 없는 새로운 향이 만들어진다.


향수 전문가들은 이런 저런 향수 여러 개를 잘 섞어서 천상의 향을 만들어낸다더라. 슈퍼주니어 이특 옆에 가면 그렇게 좋은 향이 난다던데, 그가 대표적인 향수 레이어링의 천재라고 한다. 하지만 나는 아직 향수 레이어링은 해 본 적이 없고 그 향수 본연의 향을 온전히 느끼고 싶어서 그다지 섞어 쓰고 싶지는 않다. 조향사는 분명 한 가지 향수에서 풍겨나오는 탑 미들 베이스노트의 순서와 균형을 무척 신경썼을 거고, 완성품을 두고 어떤 이름을 붙일지도 오래 고민했을 거다. 그걸 그대로 느껴보고 싶다.


오늘 산 향수는 당분간 비밀이다. 이게 그토록 찾아 헤매던 '완벽한 향수'라면 앞으로도 아무에게도 알려주지 않고 나만 쓸거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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