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07.08에 쓴 일기
나는 항상 에너지 많은 사람들을 보면 항상 부러웠다. 열정으로 가득해 하고싶은 것은 주저 없이 해버리고 지치지도 않고 또 시도하는 모습이 정말 멋있었다. 나도 그렇게 되고 싶었다. 글도 쓰고 싶었고, 사진을 찍거나 그림을 그리고 싶고 항상 밝은 에너지가 넘치고 싶었다. 하지만 내 발목을 잡는 것이 있었으니 체력이었다.
나는 힘은 세도 체력이 많이 약했다. 창창하던 대학생 때 대상포진을 앓을 만큼 체력이 좋지 않아 쉽게 지치곤 했다. 남들보다 더 많이 자고, 더 많이 쉬어줘야 남들 하는 만큼을 겨우 따라갔다. 당연히 회사 다니는 것만으로도 너무 힘들어서 좀비처럼 걸어 다니곤 했다. 좌석버스에 1시간 이상씩 서서 서울을 오가는 경기도민은 어쩔 수 없다고 생각했다. 취침 시간이 보통 11시에서 12시, 정말 피곤할 때는 10시에는 잠이 들어야 적어도 '내일 일은 제대로 할 수 있겠구나' 싶었기 때문이다. 12시를 넘어 잠이 든 다음 날이면 영락없이 맥을 못 추고 모니터에 집중할 수가 없었다. 인간이란 본래 진화의 생물이라 활용하는 기능은 더욱 강력해지고 그렇지 않은 기능은 점점 퇴화된다. 집중력과 체력도 그렇다. 나는 쉬면 쉴수록 더 많은 휴식 시간이 필요했고 하루에 집중하는 시간이 줄어들수록 정신은 더욱 아득해져만 갔다. 내가 할 수 있는 것들은 줄어드는 것 같았다.
“아니. 왜 이렇게 점점 나빠지는 거야…?”
'입사는 스펙으로 될 수 있지만 퇴사는 실력이다.'
나는 이대로 멈출까 봐 너무 불안했다. 언제고 떠나고 싶을때 실력이 없어 내가 원할 때 퇴사할 수 없는 그 괴로움. 하기 싫고 보기 싫은 사람들과 어쩔 수 없이 버텨야 하는 그 현실을 상상하니 정말 악몽 같았다. 멀찌감치 떨어져 느슨해져있는 나를 바라보니 컴포트 존이 얼마나 위험한지 뼈저리게 알게 되었다.
상황을 바꾸는 것이 더 이상 불가능할 때, 우리는 스스로를 변화시켜야 한다.
-빅터플랭클-
늘어져있던 정신을 각성하고 나도 2019년 1월부터 데일리 리포트라는 걸 써보았다. '나름 잘하고 있지' 뇌피셜을 믿지 않고 한번 데이터를 믿어보기로 한 것이다. 역시 예상대로 처참했다. 업무 시간에도 내가 너무 작은 일에 많은 시간을 쓰고 있는가 하면 집중하지 못하고 중요한 일들을 습관적으로 요리조리 피하고 있었다. 내가 겨우겨우 데드라인을 맞추는 이유가 여기에 있었다. 업무 우선순위를 다시 설정하고, 힘 뺄 것들은 과감하게 미련을 버리고, 정말 중요한 것들은 잘 안되더라도 잡고 있으려 노력하기 시작했다.
다음 내 업무에 얼마나 실력이 있는지가 궁금해졌다. 나는 나름 다양한 분야를 소화하고 있다고 자부했고, 이 장점을 어필한다면 어디서 건 내 실력을 매력적으로 느낄 것이라 생각했다. 저녁 퇴근 후 포트폴리오를 정리하기 시작했다. 분야별로 한 일들을 정리하며 어떤 작업을 포트폴리오로 쓸 수 있는지, 비슷한 직군의 다른 회사에서는 어떤 기준으로 업무를 분류하는지 검토해보았다. 이 또한 처참했다.(사실 이 부분에서 많이 심리적으로 무너졌다.) 생각보다 내 실력이라고 말할 것은 거의 없었고 반복되는 업무에 펑크 나지만 않을 정도의 실력이었다. 우리 조직에서나 이 아주 얄팍한 지식이었고 이력서에 한 줄 조차 쓸 수 없는 실력이었다. 그동안의 나의 허송세월과 실력이 없지는 않다고 자부했던 나의 교만과 오만, 앞으로 나의 미래는 이곳에서 잘리지 않고 버티는 것 그뿐인가. 정말 괴로운 시간이었다.
뭐부터 해야 할지 몰랐다. 누군가의 말처럼 이 괴로운 순간이 켜켜이 쌓인 나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뭐부터 시작해야 할지 몰랐다. 이 일을 계속 해야 하는지, 이 조직에 계속 있어야 하는지도 판단이 잘 서지 않았다. 내가 '언제고 해보리라' 맘 먹은 일들은 고사하고 일단 뭐든 열심히 해보자 싶어 책을 읽기 시작했다. 그러던 와중에 독서모임 '씽큐베이션 1기'를 지원했다. 1월부터 조금씩 읽었던 책들을 기반으로 부랴부랴 서평을 썼고 합격 가능성을 가늠하며 지원서를 제출했다. 내가 씽큐베이션에 들기 위한 가장 큰 목적은 '선순환'을 그리는 공동체 입성이었다. 내 혼자 힘으로 못 갔던 길을 강제로라도 끌려간다면 악순환의 고리를 끊어낼 수 있을 것이다. 선순환의 고리 하나만 우선 만들어보자. 그거였다. 그리고 정말 감사하고 다행히도 그 모임에 합류할 수 있었다.
그 과정은 정말 혹독했다. 가뜩이나 떨어져 있는 집중력으로 한 달에 한 권 읽으면 자랑스러웠던 독서를 일주일에 1권씩 읽어가며 서평까지 써야 하다니. 독후감이 아니라 서평 말이다. 그래도 나는 12개의 서평을 모두 제출했다. 6번의 오프라인도 단 한 번도 빠지지 않았다. 사실 이건 표면적인 성취이고 나는 정말 대단한 성취를 이루었다.
집중력이 매우 좋아졌다
진짜 '생각'을 하게 되었다. 여기저기 흔들리는 잡다한 생각 말고 정말 나한테 필요했던 생각들 말이다. 의미 없이 허공에 클릭하고 빠르게 정보를 훑는 것이 아니라 좀 더 오랜 시간 집중할 수 있게 되었다. 일할 때 말고는 책상에 한 시간 앉아있는 게 신기했고, 독서도 1시간을 넘기면 집중력이 흐트러지곤 했는데 정말 많이 좋아졌다. 아직 시간 가는 줄 모르고 몰입하지는 못하더라도 의식적으로나마 조금 더 버티고 앉아있을 수 있다. 버티고 앉아서 집중하면 어떤 보상이 따라오는지 알기 때문인 것 같기도 하다.
메타인지가 올라갔다
데일리 리포트와 포트폴리오를 추려보는 과정에서 이미 뼈저리게 느꼈지만 독서를 통해서 한 번 더 깨달았다. 나는 메타인지가 상당히 부족했던 것이다. 책에서는 그동안 내가 세상에 가지고 있던 궁금증과 삶의 복잡함을 해결할 답들이 모두 적혀있었다. 그만큼 회복탄력성도 높아졌다. 좌절하고 우울해져도 그 답을 알면 금방 극복할 수 있으니까! 읽으며 깨닫는 것이 많아질수록 겸손해지고 오만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세상에 정답은 없고 내가 갈 수 있는 길은 다양하며 그만큼 다양한 삶에 대한 존중도 늘어났다. 좀 더 솔직히 말하면 가끔은 책을 안 읽었을 때는 내가 무슨 생각으로, 무슨 말을 하면서 살았을까 싶기도 하다.
생각만 하지 않고 실제 행동했다
이건 정말 대단한 발전인데, 내가 행동하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나는 앞에서 말했듯 하고 싶은 것이 참 많았지만 실제로 하는 것은 하나도 없었다. 짧게 수채화를 그려보기도 하고 캘리그래피를 배우기도 하고 일기장에 짧은 글을 쓴 적은 있었지만 단순 취미를 벗어나지 취미라 할 만큼 오래도 하지도 못했다. '열심히 살았는데 남는 게 없어요.' 딱 그런 상황. 씽큐베이션을 하며 자연스레 '해야만 하는' 환경이 설정되니 행동하기 시작했다. 책을 한 권씩 읽어 내기 시작했고, 블로그를 만들어 글을 쓰기 시작했고, 계속 못하던 것들의 벽을 허물며 도전하며 그 보상을 맛봤다. 그러다 보니 점점 더 움직이기 시작했다.(이런 소외를 밝히는 글도 예전 같으면 생각에 그쳤을 일이다.) 안 하려는 의지를 깨부쉈다.
시간관리를 좀 더 체계적으로
독서 모임 자체가 일정이 엄청 빡빡하다. 일주일에 책 한 권을 다 읽을 수 있는 것도 엄청난 도전이었지만 내 생각을 담은 글을 써야 했고, 다른 그룹원들의 서평을 보고 의견을 주고받으며 토론도 해야 했다. 이 모든 것을 해내기 위해서는 일상의 시간들을 재배치할 필요가 있었다. 나는 이 과정에서 생각보다 잠을 조금 줄이는 게 체력과 집중력에 큰 문제가 없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일단 독서로 집중력이 많이 향상된 상태에서 오전 수영을 일주일에 2번 꾸준히 하다 보니 체력도 많이 올라왔다. 조금 졸렵기는 했지만 다음날 업무에 전혀 지장이 없었고 오히려 전투력이 상승하기도 했다. 뭐 어쩌면, 할 수 있다는 내 마음가짐 때문에 더 그랬을지도 모르지만.
왜 같이 해야 하는지를 온몸으로 느꼈다
사실 독서를 하고 글을 쓰는 건 혼자서도 할 수 있다. 최근 누가 독서모임에 대해 물었다. 굳이 독서를 그렇게 빡세게, 다 같이 해야 하냐고 말이다. 하지만 나는 말해주고 싶다. 정말 책을 제대로 이해하고 싶다면 사람들과 이야기해보라고 말이다. 내가 가볍게 지나간 부분에 엄청난 영감이 숨어있었고 하나라고 생각한 것이 사실은 열 개였다는 걸 알 수 있다. 또 다양한 사람들이 한 가지 사건을 다양한 관점에서 해석하며 나의 세계관 또한 더욱 커진다. 사람은 보고 싶은 것만 보지 않는가. 이런 틀을 깨주는 것이 독서모임의 힘이다.
또 한 가지 나에게 큰 역할을 한 것은 '함께 한다'라는 환경설정이다. 때로는 위로가 되고, 격려가 되고, 자극이 되며 이 힘든 과정을 끝까지 마칠 수 있는 힘이 되어주었다. 성장에 목적을 두고 있던 나에게는 혼자만 달리는 것 같아 회의감이 들 때 '우리가 있어'라며 든든한 친구가 되어주었다.
나는 독서모임을 하면서 새로운 세상에 발 들인 기분이다. 사실 그동안 이렇게 열심히 사는 사람들, 이렇게 대단한 사람들을 많이 볼 기회가 없었고 남 이야기인 줄로만 알았다. 이렇게 열의를 다해 남을 도와주고 응원하는 사람들을 본 적이 없다.
많은 사람들이 물었다. 왜 그렇게 열심히 살아야 하냐고. 그 질문을 3개월 동안 곰곰이 생각해보았다. 아직도 잘은 모르겠다. '열심히' 사는 게 '그냥' 사는 것과 어떻게 다른지. 그냥 내 삶에 적극적으로 임하는 것 아닐까. 내 삶에 충실해서 얻을 수 있는 기쁨과 보상은 '열심히 하지 않고'서는 알 수가 없는 것 같다.
나는 이 감동을 빡독(빡세게 독서하자) 행사에서 스피치 했다. 처음 100명 앞에서 스피치를 해야겠다고 맘 먹은 것은 내가 이렇게나 많이 변했는데 이왕 이렇게 된 거 도전 한번 더 해보자는 마음에서였다.(사실 스피치에 당첨 안될 줄 알았다.) 그런데 무대에서 서서 나의 3개월간의 여정을 소개하고 나니 나에게만 머물러있던 '나의 성장'이 누군가에게, 꽤 많은 사람들에게 동력이 되고 희망이 되는 것을 느꼈다.
'아.. 이런 거구나'
무대를 내려오고, 행사가 끝나 집에 가는 길에도, 일상으로 복귀한 후 SNS를 통해서도 나의 작은 도전은 많은 사람들에게 더 달릴 수 있는 동력이 되고 성장할 수 있는 힘이 되는 것을 느꼈다. 그리고 그 피드백이 나에게 다시 돌아와 계속할 수 있는 힘이 되어주었다. 함께하는 사람들과 선순환을 그리고 있는 것이다.
(덧. 나는 아직도 이 영상을 '보지'못했다. 오글거려서 도저히 못보겠어서 저 멀리 두고 오디오로만 들었다. 이 글에 영상을 첨부할까도 굉장히 고민했지만 나의 성장에 빠질 수 없는 순간이라 기록으로 남겨둔다.)
* 빡독: 씽큐베이션 독서모임을 운영하는 체인지그라운드가 주최하는 사회 공헌 행사로, 100여 명의 사람이 대강당에 모여 오전부터 오후까지 종일 책을 읽는다. 점심, 저녁까지 제공하는 이 무료 행사는 참여자에게 독서의 임계점을 넘어보는 경험을 선사해 벽을 허물도록 돕고 있다.
나는 여전히 초조하지만 대책이 있고 확신이 있다. 빨리 더 변하고 싶은 마음에 초조함은 느끼지만 이대로 멈출거 같은 불안함은 없어졌다. 물론 초조한 마음도 지난 3개월처럼 계속 한 걸음씩 움직인다면 걱정할 것 없다는 것도 잘 알고 있다.
나는 4월부터 시작한 3개월간의 모임을 끝내고 7월 씽큐베이션 2기 모임을 시작했다. 다시 9월까지 그 숨 가쁜 일정을 시작한 것이다. 씽큐베이션 1기에서 시간과 에너지 분배, 그리고 포기하지 않고 행동했을 때 오는 보상을 몸으로 느꼈다면 2기는 그 각오가 조금 다르다. 독서와 글쓰기에 질을 높이고 나의 일상과의 균형을 맞추는 것. 책을 읽고 글을 쓰는 것에서 그치지 않고 늘어난 집중력과 문해력으로 나는 더 많은 콘텐츠를 남겨볼 생각이다. 올 초 보여줄 것이 하나도 없어 좌절했던 나의 시간들을 실력으로 만들기 위해 하나하나 기록해볼 것이다.
벌써 씽큐베이션 2기 일정에 2권의 책을 읽고 2편의 서평을 썼지만 이번에도 만만치 않을 것 같다. 선정 도서와 그룹 운영, 분위기의 결이 1기와는 또 다르다. 잘 되었다. 아니 정말 딱이다. 더 다양한 이야기들이 방법들로 행복과 실력을 쌓을 수 있을 것 같아 정말 기대된다. 함께 하는 분들과의 또 다른 뜻깊은 시간들이 기대된다.
빨리 변화하고 싶고 성장하고 싶은 조급한 마음은 내려놓고 나의 다음 목표와 내 삶 전체를 관망하는 자세. 지금 불안하고 초조하다면 한 발자국 떨어져서 작은 것 하나에서 시작해보는 것도 좋을 것 같다.
-빅터플랭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