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실 직면의 끝과 도피의 시작

by 삶 집착 번뇌

회사가 점차 시스템화되면서 내가 직접 해야 할 일의 양이 눈에 띄게 줄어들고 있다. 가장 부지런한 사람이 도달해야 하는 사업의 끝, 즉 완벽한 시스템화의 문턱에 발을 들인 것이다.


시스템의 실마리가 보이고, 엔지니어처럼 구체를 손으로 다듬어 가다 보면 어느 순간 낙원으로 가는 문이 보이기 시작한다. 시스템이 완성되면 리스크 회피, 공격적 확장, 내부 자정작용, 경쟁사 견제까지 스스로 이루어지는 유기체가 된다. 그 유기체는 결국 또 다른 나의 분신이 되어, 나 없이도 일하는 존재가 된다.


책에서만 읽던 장면이 실제 내 눈앞에서 펼쳐지고 있다는 사실이, 신기하면서도 묘하게 불안하다.


아이러니하게도, 사업가의 끝에 있는 기업가의 의식에 도달하기까지 이제 얼마 남지 않았다. 하지만 천국의 문턱 앞에서 나는 이상하게도 불편함을 느낀다.

천국 안의 게으름은, 지옥 안의 부지런함보다 더 괴롭다.

지금 나는 현실 직면의 끝에서, 오히려 새로운 현실 도피의 그림자를 보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종종 교회의 성직자들을 관찰하다 보면, 현실 도피의 결과로 성직이 선택된 듯한 인상을 받을 때가 있다. 교회 안의 안락함에 기대어 신학교에 입학했지만, 정작 마주한 것은 ‘현실’이라는 점에서 많은 신학생들이 그 문턱에서 탈락한다.

신도에게 인간적으로 다가가야 하지만, 동시에 신도는 곧 ‘고객’이라는 사실을 받아들여야 하는 이중적 현실. 이상과 현실이 충돌하는 그 지점에서 많은 이들이 흔들린다.


결국 현실 도피의 끝에는 다시 현실이 기다리고 있다.


나는 요즘 이런 생각을 한다.

성역 안에는 지옥이 있고, 지옥 안에는 성역이 있다.

성역을 꿈꾸며 그 안으로 들어간 사람은 지옥을 마주할 용기가 없고,

지옥 속으로 스스로 들어간 사람은 성역을 받아들일 마음이 없다.


이 모순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이 말할 수 없는 현실을 직면하는 것, 그 자체가 아마 성숙의 과정인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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