완벽함 대신, 완전함을 배우는 중

by 삶 집착 번뇌

오랜만에 대기업 동기들과 통화를 했다.

예전에는 사소한 농담도 쉽게 나누었지만, 이제는 서로의 일정을 맞추는 것조차 쉽지 않았다.

그들은 보통 밤 8시나 9시쯤 퇴근한다고 했다. 회사 밖의 시간은 거의 삶이라기보다 회복의 시간에 가까웠다.


나는 그들과 다른 리듬으로 살아가고 있다.

출근은 자유롭고, 출근한 지 한 시간 만에 퇴근하는 날도 많다.

사무실과 같은 건물에 거주 공간이 있으니 이동 시간조차 없다.

어쩌면 하루 중 23시간이 나에게 주어진 시간일지도 모른다.


그렇다 보니 가끔 문득 생각이 든다.

그들은 지금의 나를 이해할 수 있을까?

아니, 어떤 의미에서는 나조차 내가 서 있는 이 삶을 완전히 이해하지 못할 때가 있다.


그 중 한 친구는 예전부터 나를 유심히 바라보던 사람이었다.

그는 내게 두 가지 상반된 특징이 있다고 말하곤 했다.


첫째, 나는 공격적인 사람이라는 점.

틀렸다고 판단되는 말 앞에서는 타협이 없고, 이해되지 않는 일에는 관심조차 두지 않는다.


둘째, 동시에 나는 비범한 사고를 가진 사람이라는 점.

사고의 속도와 방향이 남들과 다르고, 그 차이는 오래전부터 느껴졌다고 했다.


지금의 나는 굳이 그 비범함을 입증할 필요는 없다.

이미 남들이 쉽게 도달할 수 없는 곳까지 왔다.

그냥 지금처럼 살아도 충분하다.

하지만 문제는—나는 그런 삶에 안주하지 못하는 사람이라는 점이다.

나는 여전히 완벽을 요구하는 사람이고, 그 요구는 대부분 나 자신을 향한다.


오랫동안 나는 비합리와 불합리를 견디지 못했다.

논리가 무너지는 구조, 비효율적인 방식, 책임이 불명확한 문화.

그 모든 것이 나에게는 무능함의 다른 표현처럼 보였다.


그래서 교회라는 공간은 처음엔 이해할 수 없는 세계였다.

비합리의 결정체 같았고, 진지하게 받아들일 가치조차 느끼지 못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며 그곳의 의미가 조금씩 바뀌었다.

교회는 효율이나 논리로 움직이는 세계가 아니라,

부족한 사람들이 서로를 지탱하는 세계였다.


“교회는 사회와 다르다”는 한 목사의 말이 그제야 이해됐다.

수익이 없고, 효율도 없고, 구조도 완벽하지 않다.

그러나 그 허술함 속에 이상하게도 남는 무언가가 있었다.


책임을 맡은 순간, 나의 완벽주의는 다시 고개를 들었다.

답답했고, 분노했고, 왜 이렇게 해야 하는지 끝없이 따지고 싶었다.

그런데 어느 순간 알게 되었다.


불합리와 비합리는 내가 버려야 할 결함이 아니라,

내가 배워야 할 세계라는 것을.


이성만으로는 인간이 완성되지 않는다.

받아들일 수 없는 것을 받아들이는 만큼 성숙해지고,

논리로 설명할 수 없는 것을 품을 수 있을 때 관계는 이어진다.


그래서 나는 바란다.

쇼펜하우어나 칸트처럼,

논리만 남기고 고독 속에서 사라지는 삶이 아니라,


이해할 줄 알고, 연결될 줄 아는 사람으로 살아가기를.


나는 완벽한 사람이 되고 싶은 것이 아니라,

이제는—

완전한 사람이 되고 싶다.


그리고 어쩌면,

지금 내가 교회에서 느끼는 이 불편함과 충돌 속에서

무언가를 배워야 할지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아마 그건, 지금까지 내가 놓치고 살아왔던 어떤 삶의 조각일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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