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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가비 Aug 16. 2023

베트남과 나(Viet nam & I)3

베트남에서 사업 한 번 해보시려구요?

『연인』이라는 영화가 있었다. 한국에도 많은 팬을 확보하고 있는 프랑스 출신의 장 자크 아노 (Jean Jacques Annaud, 1943- ) 감독의 1992년 작품이자, 프랑스의 유명 작가인 마르그리트 뒤라스 (Marguerite Duras, 1914-1996) 자전적 이야기이기도 한 이 영화 속 배경이 과거에 사이공 (Saigon)이라 불리었으며 지금은 호치민시 (Hochiminh city)라고 불리는 그 곳이다.


'연인' 포스터


영화에 대한 이야기를 잠시 하자면, 시대적 배경은 1929년, 베트남이 프랑스 식민지였을 당시의 이야기이며 가난한 프랑스 소녀와 부유한 베트남 화교 남자의 사랑이야기이다. 이 영화는 당시 서방세계가 세계 최초로 베트남에서 촬영을 시도하는 것으로 화제를 남겼는데, 1930년대 전후의 호치민 시를 훌륭한 미장센을 통해 보여주고 있다. 감독이었던 장자크아노는 인터뷰를 통해 1989년 당시 영화 촬영을 하기 위해 방문하였던 호치민 시의 상황을 이렇게 말하고 있다;


절대로 이 곳에서 촬영을 하지 않을 것이라는 것을 나는 알았어요. 길도 없고, 전화도 없고, 정말 아무것도 없는 곳이었습니다. 화장실이 있으면 물이 안 나오고, 물이 있으면 흙탕물이었죠. 정말 숨이 막히는 것 같았습니다.
산소마저 부족하게 느껴졌죠. 

                                                                      -1992년 장자크아노 감독과 뉴욕타임즈의 인터뷰 중- 


영화 '연인'에서 보이는 사이공 항의 전경
영화 '연인'의 장면 밪은편으로 당시 프랑스 정부청사가 보인다.

비록 베트남이 전쟁에서 미군이 물러났다 하여도 결국 베트남이 승리한 것이 맞을까? 그 후 2000년 미국의 클린턴 대통령이 베트남과의 외교를 재개하기까지 그야말로 6.25전쟁 이후 한국이 겪어야 했던 극단의 가난을 아주 오래 시간 베트남은 견뎌내야만 했다. 함께 일하는 나의 베트남 친구는 1983년생인데, 어린시절 먹을 것이 없어서 쌀겨로 만든 죽을 먹고 자랐다고 하니 그 가난이 얼마나 길었을지 상상이 된다. (1차 & 2차 베트남 전쟁 1955년 11월 1일 – 1975년 4월 30일)




다시 영화 이야기로 돌아가서, 배경이 되는 ‘중국’이 오늘의 주제이다.


세상의 돈에는 큰 양대 산맥이 있다고 한다. 하나는 유대인의 돈이며 나머지 하나는 바로 화교의 돈이다. 

화교의 역사란 참 길고도 거대하다. 베트남의 역사 속에서도 중국과 화교는 중요한 부분을 차지하고 있다.


한국만큼이나 중국과의 수많은 전쟁과 지배/피지배 관계를 반복해왔고 특히나 프랑스 식민지시대를 거치면서 중국인들의 베트남으로의 이민이 엄청나게 늘어났다. 8세기부터 중국인의 베트남 이민은 이루어진 것으로 알려져 있지만, 특히 1920년에서 1940년까지 프랑스 식민정부의 적극적인 이민 정책으로 베트남 내의 중국인 이민은 베트남 전역으로 확장되며 그 정점을 이루게 된다. 이들 중국인  이민자들은 주로 자신들의 사업을 일구었으며 특히 쌀과 원단을 장악하며 무역으로 큰 부를 이루었다.


이들이 내는 세금은 프랑스 식민 정부에게 그야말로 큰 수입원이었으며, 중국인들을 통한 세금 수입에 재미를 부친 식민정부가 급기야 중국인들의 베트남으로의 이민을 장려하기까지 이르렀던 것이다. 

영화에서 보면 촐론(Cholon)이라는 구역의 구식 가옥에서 둘은 몰래 만나 사랑을 나눈다. 촐론은 초기 중국 이민자들이 사이공에서 모여 살던, 지금으로 치면 차이나타운 같은 곳쯤 되겠다.


영화 '연인'촬영 당시 5구의 촐론(Cholon) 거리


프랑스정부와 중국 화교들은 세금이라는 합법적인 제도와 ‘거간’을 통한 부동산사기로 식민지 수탈을 자행했다. 물론 세금을 내야하는 화교들의 입장에선 100% 행복한 일은 아니었겟지만, 그들은 그래도 일정부분의 공조를 통해 나름의 특권을 누리고 있었던 것이다. 


영화에서도 여주인공의 어머니가 부동산 사기를 당했다는 내용이 나오는데, 그 시대의 ‘거간’이라는 행태가 간혹 현재의 베트남에서도  일어나고 있다. 서양식 문물이 들어오고 인터넷이라는 곳에서 누구든 정보를 쉽게 공유하기 시작하면서 다소 줄어든 듯하지만, 수많은 중개업자들만이 존재하는 주인 없는 땅이나 집에 대한 웃을 수 없는 이야기는 아직까지도 있으니 조심하기 바란다. 


앞부분에 잠시 언급하였듯이 베트남내 중국이민자들은 주로 쌀 원단 그리고 무역업 종사자들이 많았는데, 이것을 달리 말하면 그들이 ‘지주’였다는 이야기이다. 베트남전에서 미군이 물러가고 전 베트남이 공산화 되면서 가장 큰 피해를 본 사람들은 당연히 이들 중국 이민자들이었으며, 1986년 베트남의 경제개혁 전까지 오랫동안 경제적인 박해와 수탈을 당하게 된다. 베트남전 이후 베트남을 탈출한 보트 피플엔 이들 화교가 상당부분 섞여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남아있던 중국인 이민자들은 베트남 사회로 편입하여 자신들의 뿌리를 유지하며 살고 있고 베트남과 중국과의 관계가 개선되며 그들의 경제적인 지위를 서서히 찾아가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아니 실제로는 중국인들의 경제적인 위상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 이상으로 베트남에서 크다고 보는 것이 맞다. 많은 기업들이 차이나 머니에 의해서 움직이고 있고, 또 실제 소유주가 중국기업인 법인들도 많다.


다낭시에서 한국인이 가장 좋아하는 리조트 중 하나인 이 곳, 한국의 대통령이 머물렀던 이 곳, S금융이 인수하지 못하나 이곳의 실소유주는 중국기업이다.


베트남친구들과 이야기를 하다 보면 중국과의 관계가 보이게 혹은 보이지 않게 그들의 경제에 얼마나 큰 영향을 미치고 있는지 알 수 있다. 마치 중국인을 좋아할 수는 없지만, 그들과의 경제협력이 절실한 한국인들처럼 어쩌면 베트남도 그렇게나 똑같을 수가 있을까?


한국과 아무리 수많은 MOU와 협약서에 날인을 해도, 베트남 정부는 오늘도 중국 정부와의 협상에서 아무런 성과 없는 하루를 보낸다. 무엇이든 다해 줄 것 같지만, 사실은 아무것도 해줄 수 없는 경우가 현실적으로는 훨씬 많을 수 있다는 말이다. 


그래서, 서두르면 손해보고, 보이는 것이 전부가 아닌 나라, 베트남이다.


-To Be Continu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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