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에 우성인자, 열성인자에 관해 이야기한 적이 있다. 우리 오빠는 엄마, 아빠에게서 좋은 것만 물려받았고 나는 나쁜 것만 물려받았다는 이야기였다.
그렇다. 우리 오빠는 참 잘났다.
오빠는 나의 우상이었다. 세 살 터울인 우리는 어릴 때는 종종 같이 놀았지만 나이가 들면서는 보통의 오빠와 여동생 관계가 그렇듯 따뜻하지도 냉랭하지도 않은 그런 정도, 만나면 장난을 치는 그런 정도의 거리였다. 하지만 오빠는 친구가 많고 운동을 좋아하고 공부도 잘해서, 친구가 적고 가만히 조용히 노는 것을 좋아하고 공부를 그다지 잘 못하는 나에게는 굉장히 대단해 보였다.
말린 오징어는 다리가 더 맛있다는 오빠의 말에 나도 오징어 다리만 먹었을 정도였다. 오징어 몸이 다리보다 맛있다는 건 누구나 아는 사실이건만 나는 오빠가 좋다는 건 다 좋은 줄 알았다.
오빠는 좋은 성적으로 좋은 대학에 가서 좋은 직장을 얻었다. 그 당시 한 번의 어려움은 있었다. 대학에서 일본어를 공부하고 싶다는 말에 엄마가 일본어 해서 뭐 할 거냐고, 선생 할 거냐고, 했었다. 그래서 경영학과에 갔다. 오빠는 그 일을 어떻게 기억하고 있는지 모르겠다. 하지만 나라면 엄마에게 화가 났을 것 같다. 몇 년 후 나에게도 비슷한 일이 있었고, 그때 나는, 슬펐다.
오빠는 그 일로 엄마를 원망했을까, 아니면 시간이 지나 그 일에 감사했을까.
아무튼 제삼자의 입장으로 보기에 오빠의 인생은 어려울 것이 하나도 없었다. 대학을 가고 군대를 다녀오고 좋은 성적으로 대학을 졸업해 남들이 부러워하는 직장에 취직했다. 직장에 들어가서도 탄탄대로를 달렸다. 좋은 사람 만나 결혼도 하고 딸도 하나 낳았다.
회사에서 유학비용과 체류비용까지 대주어 미국에서 MBA 학위도 받았다. 그야말로 부러울 것 없는 인생처럼 보인다.
하지만 나는 뭐랄까, 오빠에게 더 이상 할 말이 없다. 나를 영화관에 데려가주고 엄마를 농구장에 데려가주던 오빠는 이제 없다. 아빠가 어지러워 걷지 못해 119에 실려 응급실에 가서 입원했다는 소식에도 아빠 괜찮냐고, 말 한마디 묻지 않았다는 엄마 말에 나는 할 말을 잃었다.
나중에 후회하지 말고 엄마, 아빠 살아계실 때 신경 좀 쓰라고 몇 년 전 한마디 한 게 내가 마지막으로 전한 내 진심이었던 것 같다. 내가 멀리 사니 가까이 사는 오빠가 부모님을 조금이라도 챙겨주면 내 마음이 조금 편하겠다는 이기적인 생각이 드는 것도 사실이다. 내 마음의 짐을 오빠라도 좀 덜어주었으면 하는 그런 마음. 하지만 나도 내 마음대로 안 되는데 누굴 내 맘대로 하겠는가.
엄마, 아빠는 그래도 아들을 오매불망 기다린다. 차로 삼십 분 거리에 살지만 일 년에 한두 번 볼까 말까 한 아들이 갑자기 미국 연수를 간단다. 삼 개월이라고 하는데 사실 오빠가 전화를 하지 않았으면 우리는 오빠가 연수를 다녀온 줄도 몰랐을 거다. 삼 개월 정도 연락이 없는 건 흔한 일이기에.
오빠는 나의 우상이었고 부러운 존재였다. 내가 가지지 못한 것을 가진 자랑스러운 우리 오빠.
이제는 만나서 할 말도 없는 오빠지만 그래도 오빠니까, 엄마, 아빠 돌아가시고 나면 세상에 단 하나 남는 가족, 우리 오빠니까, 미워하지는 말아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