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형적인 문과생임에도 불구하고 나는 어릴 때부터 글 쓰는 것을 극도로 싫어했다.
여러 가지 이유가 있겠지만...
- 지독한 악필이었기 때문에 글자 쓰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다.
- 급한 성격 때문에 글보다는 말로 의사 전달하는 것을 선호했다.
- 글의 주제를 떠올리는 것이 항상 너무 어려웠다.
고등학생 때 대학 입시 준비를 위해 논술 학원을 3년 내내 다녔지만(물론 공부보단 연애를 하러 갔던 것 같다) 결국 나는 대학 논술 시험을 통과하지 못했고 그 이후로 글 쓰는 것을 기피해왔다. 경제학과인 덕에 긴 리포트를 제출하는 수업은 소수였고 그런 수업쯤이야 듣지 않으면 그만이었다. 교양도 긴 작문이 없는 수업만 골라 들었고 일기나 남자 친구에게 쓰는 편지 따위도 쓰지 않았다.
그랬던 내가, 어느 순간 글이 쓰고 싶어 졌다.
여기에도 여러 가지 이유가 있을 것 같은데... 친구들을 상대로 말을 하는 것과 혼자 앉아서 글을 쓰는 것을 비교해 보면 좋을 것 같다.
- 말은 쉽고 간편하지만(그리고 매우 후련하지만) 하면 그만이다. 내뱉는 순간 사라진다. 그리고 기억하려고 해도 희미해지거나 왜곡되어 버린다. 하지만 글은 지속성을 갖고 있어서 언제든 다시 펼쳐서 읽어볼 수 있다. 나의 몹쓸 기억력을 탓할 필요도 없고 내 구미에 맞게 왜곡할 가능성도 적다.
- 혼자 생각을 정리하기에 매우 적합한 방법이다. 글을 쓰는 것은 상대방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그렇기 때문에 나는 그 누구의 눈치도 보지 않고 내 머릿속을 차분히 정돈할 수 있다. 반면에 대화를 할 때는 신경 써야 할 것들이 매우 많다. 나의 표정, 내가 쓰는 단어, 상대방의 흥미 등... 결국, 아주 소수의 사람을 제외하고는 나는 말을 할 때 100% 솔직하지는 못하다.
- 그리고 가장 중요한 건, 나이가 들면 들수록 이런저런 생각은 많아지는데 내 생각을 가감 없이, 꾸밈없이 표현할 수 있는 대상은 반대로 적어지기 때문이다. 어릴 적에는 내 머릿속의 것들을 필터링 없이 입 밖으로 쏟아냈다면 지금은 내가 이런 말을 하면 상대방이 나를 어떻게 생각할까, 굳이 이 주제를 꺼낼 필요가 있을까, 상대방이 피곤해하면 어떡하지? 등등 온갖 (불) 필요한 점검들을 거친 후에야 말문을 연다. 그러고도 후회하는 경우가 다반사다. 결국 나도 남의 이야기를 듣는 것이 피곤하고 귀찮을 때가 있는 것처럼 상대방도 그럴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말을 아끼게 된다.
그 누구도 나를 온전히 이해할 수 없고 그럴 의사를 가진 사람도 없다는 사실을 가만히 곱씹다 보면 내 생각과 내 감정은 나 스스로가 잘 챙기는 수밖에 없다는 결론에 이른다.
그래서 나는 글이 쓰고 싶어 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