벽이 터진다. 천년의 벽, 무량수전의 벽이 부풀어 오르고 있다. 빛조차 숨을 죽이고 있는 전각, 그 안에 여자 하나 엎드려 있다. 어두운 윤이 나는 널마루, 검은 좌복. 그 위에 야윈 여자 하나, 오래도록 엎드려 있다. 갈퀴 같이 야윈 손을 위로 펴고서.
지난 추석, 어른을 뵈고 돌아오며 잠시 길을 휘어 부석사를 들렀다. 층층의 누마루와 크고 작은 전각을 지나 이름만큼이나 무량한 세월을 견뎌 온 아름다운 전각, 무량수전을 만났다. 하지만 전각은 어수선했고 근심으로 묵직했다. 벽체 한 면에서 배부름 현상이 나타나고 있었던 까닭이다.
혼잣말을 했다. ‘기어이 터져 버렸구나…! 천년이 넘도록 얼마나 많은 기도가 쌓이고 얼마나 많은 염원이 담겨왔던가. 여태 견딘 게 오히려 용하다.’
기도가 넘쳐나는 세상이다. 기도하지 않고는 견뎌내기 어려운 세상인 탓이다. 우리나라는 연말 연초면 기도전쟁을 치른다. 대입과 취업시즌인 까닭이다. 이 시기가 다가오면 나라 안은 온통 맹모들로 넘쳐난다. 어느 산천, 어느 신전을 막론하고 맹모들의 발길이 닿지 않는 곳이 없다. 그들의 기도는 전각을 채우고 골짜기를 메우고 바다를 덮는다.
의대지망생인 고3 아들을 둔 지인이 있다. 그녀는 지난 가을, 남해의 보리암을 시작으로 서울 대전 대구 부산 찍고 하는 유행가 가사처럼 소위 효험이 있다는 사찰들을 찾아 전국을 순례했다. 워킹맘인 그녀는 영험 있는 도량을 한 곳이라도 더 찾아가기 위해 귀한 휴일들을 아낌없이 투자했고 자신의 에너지가 방전이 되기까지 쉼 없이 기도했다. 그녀는, 찾아간 모든 신전에서 천배 만배를 하며 자식을 위한 어미의 마음을 간절히 아뢰었다고 했다.
이웃 종교라 하여 별 다를 것이 없다. 장소가 다르고 방법이 다르고 경외하는 신의 모습만 다를 뿐, 예배다 미사다 이름만 바뀌었을 뿐, 새벽마다 달려가고 밤을 새며 기도를 하는 모습들은 다 같다. 어느 신을 향하건 그 모두는 지향점이 같고, 간절함이 같고, 경건함도 같다. 이런 모습을 보게 되노라면 신이 모자라는 손을 대신해 어미를 두었다는 말을 실감하게 한다. 정말이지 어미들은 무릎이 닳도록 기도를 한다. 할 수만 있으면 남보다 더 많이 하려고 한다.
그러나 돌아보자. 그 기도로 과연 세상이 더 나아졌는지, 인간의 삶에 평화가 더 많아졌는지…. 아니다 부정하기도 어렵지만 그렇다고 그러하다 단정 지을 수는 더더욱 없는 노릇이다.
어미들의 기도를 냉정하게 들여다보면, 내 자식의 합격을 위해서 기도한다는 것은 곧 다른 이의 자식은 부탁이니 떨어져 달라는 것이다. 차마 내어놓고 내 딸은 붙고 저 집 아들은 떨어지게 해 주소서. 이렇게는 말하지는 않지만 결과적으로는 다를 것이 없다. 수요와 공급이 일치하지 않으니, 부족한 파이를 남 먼저 집어가고자 하는 인간의 안타까움이 기도라는 거룩한 탈을 썼을 뿐이다. 결국 기도는 ‘주시옵소서!’가 되었다. 기복과의 ‘이음동어’, 같은 뜻의 다른 단어가 되어 버렸다. 그리하여 인간의 삶에 깊고 진하고 끈끈하게 스며들어 버렸다.
허나, 그것이 기도든 기복이든 또 다른 무엇이든 과연 인간의 아룀을 다 들어주고, 사람의 소원을 원하는 만큼 채워주기는 하였을까. 아니다. 결코 아니다. 쉬운 예가 ‘남아선호사상’이다. 지금은 희석되어 버렸지만 이 말이 절대진리로 군림해 온 세월은 길고 길었다. 그리고 그 긴 세월, 이 땅의 여인네들은 모두들 아들을 빌었다. 촛농으로 산천이 덮일 만치 빌었고 제주도 돌하르방의 코가 닳도록 빌었다. 그러나 결과는 달라진 것이 없어 남녀의 성비는 언제나 일정했다. 인간의 아룀이 어디에 얼마가 쌓였든 자연이 섭리는 일각도 기울어지지 않은 것이다.
신은 귀가 없어 듣지 못하는 것일까. 아니면 모질고 독한 존재여서 인간의 아룀 따위는 놀이처럼 흩어버려 그런 것일까. 그것도 아닐 것이다. 다만, 이를 모두 들어줄 어리석은 신이 천지간 어디에도 없는 까닭일 것이다. 전지전능한 존재가 어찌 인간의 작은 가슴 하나를 헤아리지 못하겠는가 말이다.
신은 목이 아프도록 말하고 또 말했다. 야훼는, 나는 이미 너의 머리카락까지 헤아리고 있으니 나에게 오기 전에 너 자신을 먼저 돌아보라 누누이 말했고, 부처도 기도는 욕심 구하는 것이 아니라고 수천 년을 말해왔다. 그럼에도 인간은 내가 이렇게 하였으니 신인 당신도 이렇게 하라며 되레 신을 통제하려 하고 있다. 상대의 의도는 안중에도 없다. 일방적인 거래를 제시하고 그것이 선(善)이라며 등이 젖도록 절을 하고, 목이 쉬도록 아뢴다. 뿐만 아니라 제 욕심을 위해 타인에게 해를 끼치고도 기도라는 것을 통해 신더러 그 값을 치루라 한다. 사람에게 용서받지 않고 신에게 달려가서 면피를 하였다 떳떳해 한다. 모르긴 해도, 아마 신은 이런 이들에게 용서를 해 준 적도 없고 그 값을 대신 치룰 생각 또한 추호도 없을 것이다.
몰라서 조르는 이는 그래도 낫다. 어떤 보짱 좋은 이들은 욕심인 걸 훤히 알면서도 꾸역꾸역 신을 보챈다. 기도라는 포장지에 욕심을 싸서 끊임없이 신에게 청탁을 한다. 상황을 모를 리 없는 신은 이 얼마나 답답할 것이며, 답답한 신의 눈에는 그런 그가 또 얼마나 미욱스럽게 보일까.
무엇에나 원인은 있는 법이다. 전능하지 못한 인간이어서 그러하고, 그 인간에게 주어진 세상, 늘 파이가 부족한 이 세상이 문제일 것이다. 그런 맥락에서 보면, 인간의 욕심은 생존을 위한 절대본능일 수도 있다. 하여, 그 욕심이란 걸 탓할 수 없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이를 절묘하게 이용한 이들이 있다는 것이다. 바로 ‘종교장사치’들이다. 그들은 은밀하게 그러나 당당하게, 오랜 세월 절대 이익집단으로 존재해 왔다.
그들은 참된 기도와 속물적인 기복을 묘하게 섞어 놓는다. 세상에 종교만큼 거룩하고, 신만큼 전능한 존재가 없으니 미약한 인간은 절대자의 손을 잡고자 늘 간절하다. 이러한 인간과 신의 사이에서 그들은 영악하게 이득을 취해 왔다. 절박한 인간의 마음을 날름날름 잘라먹고, 오목거울, 볼록거울 비춰가며 신의 모습을 왜곡시켜 왔다.
그들은 몰이꾼이다. 내 자식에서 우리 집으로, 우리 집에서 우리 동네로, 우리 동네서 우리나라로, 우리나라에서 내가 믿는 종교로 그렇게 염소 몰 듯 몰아가는 그들. 그렇게 이기(利己)를 키워가는 종교꾼들. 그들이 꼬아 놓는 이기의 심지, 그리고 그 위에 쏟아지는 불밥들. 눈을 가리운 추종자들이 아낌없이 들여 붓는 불밥… 목숨 같은 그 불밥들. 세상은 타오르고 인간은 어지럽다.
그들은 조종한다. 파이를 집어든 자에게, 이젠 지킬 수 있도록 기도하라. 빼앗기지 않도록 더욱 기도하라고 당부하고, 얻지 못하는 자의 눈물을 두고는 이것은 모자란 기도의 당연한 결과이니, 더욱 기도하라. 얻을 수 있도록 더 열심으로 기도하라, 그렇게 위로한다. 그 기도와 함께 기왓장이 늘어가고, 그 열심으로 첨탑의 높이가 올라간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은 무오하다. 하늘의 뜻이며 신의 섭리이니 진실로 무오하다. 그리고 아무도 모른다. 숲에서 산을 볼 수 있는 이 아무도 없다.
나는 기도를 잃어버렸다. 가끔 절집을 찾아다니곤 했지만 한 번도 무엇을 빌어보지 않았다. 종교가 다르니 빌지 않는 것이 당연하다 하겠지만. 언제부터인가 내가 섬기는 신의 집에 가서도 빌지 않게 되었다. 모태 적부터 신앙을 가졌음에도 제대로 기도하지 않는다. 욕심을 구하자니 면구스럽고, 그렇다고 내가 무슨 구도자여서 세상을 구하겠노라 엄청난 기도를 할 자신도 없는 까닭이다. 오만하고 불손한 인간이 되어 버렸다. 세상없는 오만이고, 하늘 아래 둘도 없는 불손이다.
덕분에 신은 외롭다. 기복은 창고 마다 쌓이고 기도는 창공처럼 비었는데도 아무것도 하지 않는 인간, 오만하고 불손한 저것은 오늘도 고개를 빳빳이 들고 다닌다. 신은 인내한다. 외로운 신은 무심한 듯 조율에만 열심이다. 자연의 섭리가 일각도 기울어지지 않는 것이 모두에게 최고의 선이 듯, 자식이 조른다고 칼을 쥐여 주는 부모가 없듯, 신은 모두를 위해 알맞은 절충을 빚어가며 인간의 욕심을 참고, 오만불손한 나를 참아낸다.
어쩌면 기복을 탓할 수 없을지도 모른다. 욕심을 인간의 생존본능이라 이해할 때 기복 또한 그 본능에 충실했다 하면 반론할 여지가 없다. 그리고 자연발생이든, 특정세력의 눈가림에 의했든 그에 상관없이 사용하기에 달렸을 수도 있다. 어차피 천상에는 닿지 않을 터이지만 인간의 삶 속에서는 필요한 몫을 하고 있는 지도 모른다. 기복이 촉매제일수도 혹은 자기최면일수도 있지 않겠는가. 간절히 원한 뒤에 받아드는 것은 기쁨을 배가 시킬 것이고, 간절히 원하고도 얻지 못하면 하늘의 뜻이라 마음을 달래기가 쉬울 것 아닌가.
그래서일까. 벽이 터져가는 무량수전, 그 안에서 갈퀴손을 펼치고 절대자를 부르고 있는 여자가 부럽다. 그 간절함이 부럽고 그 신실함이 부럽다. 저 간절함과 신실함은 그것이 기도이든 기복이든 최소한 나는 하지 못하는 것을 하고 있고, 내가 갖지 못한 것을 갖고 있다는 뜻이다.
그리고 또 어찌 아는가. 저 간절함 속에 세상을, 그리고 타인을 위한 이타가 들어있는지도. 저 그로 인해 신의 인내가 연장되고, 그 덕분에 세상이 유지되고 있는 것인지 내 어찌 알겠는가.
아무것도 하지 못하는 나는 가을빛이 미안할 뿐이다. 벽이 터져나가도록 쌓여지는 인간의 염원이 놀라울 뿐이다. 좌복 위에 엎드린 여자에게 속말을 건다.
‘당신의 아룀이 천상에 닿기를 원합니다. 당신의 아룀을 기원하노라니 내 속에 무언가 생겨나는 듯 합니다. 간수해 보겠습니다. 최소한 저 산문을 벗어날 때까지라도 살아 있도록 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