밥 차리는 것을 즐거워하려고 애를 씁니다 - 코시국 집밥기록
오후엔 김밥을 쌌다.
김밥이라는 것이 먹을 때 편한 음식이지 준비하는 것은 사실 일반 밥상 차림보다 더 손이 가는 음식이다. 그런데도 오늘 김밥을 싸는 이유는 모처럼 내가 호랑이 기운이 솟아있는 날이고 언제 또 이런 날이 올지 모르기 때문에 마음이 동했을 때 그저 시간을 즐긴다는 기분으로 김밥을 말아보기로 한다.
재택근무를 한다고는 하지만 실제로 근무를 하고 있는 게 맞는지 의심스러운 삼식이를 불러다가 새로운 업무를 주었다. 오이와 당근 채썰기. 채칼로 썰기 때문에 시간이 그렇게 오래 걸리는 일은 아니다. 그런데 다이소에서 2000원인가 주고 산 채칼의 기능이 영 시원치않긴 하다. 남편이 이거 보라며 잘 썰리지가 않는다며 그러길래 내가 저번에 곰돌이 채칼을 사자고 하지 않았냐며 계속 툴툴거린다.
남편은 살림과 거리가 정말 멀다. 바닥 청소나 설거지는 그래도 시키면 마음에 썩 들게까지는 아니더라도 어찌 되었든 대충 마무리는 해 놓는데, 요리는 영 똥손이다. 신혼 초에는, 본인의 자취 경력을 살려 음식을 그래도 어느 정도 먹을 만하게 만들어 주었었던 기억(갓 신혼 때라 나의 판단이 왜곡되었을 가능성도 크다. 지금 먹으면 못 먹을 맛일지도)이 있긴 하다. 그런데 늘 주방을 엉망으로 만들어 놓다 보니 그 뒷정리하는 게 더 힘이 들어서 차라리 내가 하고 말지 해서 한동안 시키지를 않았었다. 그러다가 얼마 전 내가 몸이 좀 좋지 않을 때였는데, 반조리 식품이나 라면 등으로 남편이 혼자 손수 밥상을 차린 적이 몇 번 있었다. 세상에 양념 다 들어있는 반조리 식품을 이렇게 맛없게 만들 수가 있나? 물만 잘 맞추면 되는 라면을 이렇게 맛없게 끓일 수가 있나? 싶었다. 남편도 나름의 핑계가 있다. 오랜만에 하려다 보니 잘 안된다나. 아무튼 하루에 고작 두 끼 먹고살면서 이렇게 맛없는 음식으로 때우며 살 수는 없다. 다시는 남편에게 요리를 맡기면 안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쨌든 그런 사람이 홈쇼핑에서 파는 식재료나 조리도구에는 관심이 매우 많다. 뭐 방송만 하면 나를 급하게 부른다. 저거 너무 좋다고 사자고. 저거 너무 싸다고 사자고. 난 대부분 거절을 하는데, 결국 몇 번의 설득 끝에 넘어가 우리 집에 갈치가 박스로, 오징어가 박스로, 닭발이 박스로 배달이 되었다. 2인 가구에 식재료를 박스로 주문하다니 웬 말인지. 넣을 자리도 없는 냉동실을 어떻게든 다시 정리해보며 나의 줏대를 더 강하게 지키지 못한 것을 반성하고 자책한다.
남편이 얼마 전부터 새롭게 꽂힌 건 곰돌이 채칼이다. 저것만 있으면 못하는 손질, 못하는 요리가 없다고 한다. 어느 날 엄마한테 '엄마 사위가 이제는 곰돌이 채칼을 사달라고 한다'고 얘기했더니 재밌는지 웃으며 너네가 김장할 것도 아니면서 그런 채칼이 뭐 필요하냐고 한다. 매우 동의하는 바이다. 고작 오이 조금, 무 조금 써는데 저 큰 채칼 세트를 꺼내느니 얼른 도마 위에서 대충 칼질을 하는 게 빠르겠다.
가끔 오늘 김밥처럼 재료를 좀 오래 손질해야 할 때가 있긴 하다. 종종 월남쌈을 만들어 먹을 때에도 나는 남편을 소환해서 재료를 채 썰게 한다. 그때마다 남편은 곰돌이 채칼 타령이다. 우리 집 주방은 꽤 넓은 편인데도 상부장 구조가 조금 이상해서 수납력이 좋지 않다. 그래서 최대한 짐을 늘리지 않으려고 하는데 곰돌이 채칼을 사면 어디다 두어야 할지부터가 막막하다. 홈쇼핑에서 곰돌이 채칼을 팔 때마다 남편이 하도 보라고 해서 곁눈질로 슬쩍 보았더니 구성품이 꽤 많았다. 어디에 두어도 부피를 꽤 차지할 것이 뻔하다. 난 아직 곰돌이 채칼을 살 생각이 없다. 다이소 채칼로 당근을 썰고 있는 남편의 궁시렁 소리를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리며 나는 밥을 하고, 계단을 부치고, 햄을 굽고, 맛살을 잘라 다른 재료 준비를 마쳤다.
긴 재료 준비의 수고를 상쇄할 만큼 바로 싼 집김밥의 맛은 매우 좋다. 별 것 아닌 재료가 들어가는데 김밥은 왜 이렇게 맛이 있을까? 참 신기하다. 나는 평소에도 김밥을 참 좋아한다. 바쁠 때 간단히 영양가 있게 때울 수 있는 음식 이어서다. 딱히 바쁘지 않을 때에도 김밥으로 한 끼를 때우는 것을 무척 좋아하는데, 그럼 나머지 여유 시간에 내가 좋아하는 다른 일을 더 할 수가 있다. 가장 좋아하는 상황은 운전하며 이동할 때 김밥을 먹는 것이다. 이동시간은 참 아까운 시간인데 그 시간에 식사까지 해결할 수 있다는 것이 참 좋다.
원래는 식탁 위에 잘 세팅해서 차려 먹으려고 했는데, 말아서 써는 족족 삼식이가 하나씩 집어먹는 바람에, 또 나도 덩달아 싸면서 썰면서 몇 개를 집어먹었더니 금방 배가 부르다. 라면 한 그릇 끓여 같이 먹으려고 했는데 어느덧 보니 곁들여 먹을 남은 김밥이 없다. 사실 뱃속에 라면이 들어갈 공간도 없기도 하다. 오늘 총 6줄을 쌌는데 지금 겨우 한 줄이 남았다. 정말 둘이서 엄청 집어먹었다. 속이 더부룩하다.
코로나가 시작되었던 2020년 초부터 조금씩 해 두었던 밥상에 대한 기록과 그 기억들을 다시 한번 정리하며 하나씩 옮겨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