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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가을 May 06. 2022

김밥 싸는 데 곰돌이채칼이 꼭 있어야 하는가

밥 차리는 것을 즐거워하려고 애를 씁니다 - 코시국 집밥기록


오후엔 김밥을 쌌다.


김밥이라는 것이 먹을 때 편한 음식이지 준비하는 것은 사실 일반 밥상 차림보다 더 손이 가는 음식이다. 그런데도 오늘 김밥을 싸는 이유는 모처럼 내가 호랑이 기운이 솟아있는 날이고 언제 또 이런 날이 올지 모르기 때문에 마음이 동했을 때 그저 시간을 즐긴다는 기분으로 김밥을 말아보기로 한다.


재택근무를 한다고는 하지만 실제로 근무를 하고 있는 게 맞는지 의심스러운 삼식이를 불러다가 새로운 업무를 주었다. 오이와 당근 채썰기. 채칼로 썰기 때문에 시간이 그렇게 오래 걸리는 일은 아니다. 그런데 다이소에서 2000원인가 주고 산 채칼의 기능이 영 시원치않긴 하다. 남편이 이거 보라며 잘 썰리지가 않는다며 그러길래 내가 저번에 곰돌이 채칼을 사자고 하지 않았냐며 계속 툴툴거린다.

남편은 살림과 거리가 정말 멀다. 바닥 청소나 설거지는 그래도 시키면 마음에 썩 들게까지는 아니더라도 어찌 되었든 대충 마무리는 해 놓는데, 요리는 영 똥손이다. 신혼 초에는, 본인의 자취 경력을 살려 음식을 그래도 어느 정도 먹을 만하게 만들어 주었었던 기억(갓 신혼 때라 나의 판단이 왜곡되었을 가능성도 크다. 지금 먹으면 못 먹을 맛일지도)이 있긴 하다. 그런데 늘 주방을 엉망으로 만들어 놓다 보니 그 뒷정리하는 게 더 힘이 들어서 차라리 내가 하고 말지 해서 한동안 시키지를 않았었다. 그러다가 얼마 전 내가 몸이 좀 좋지 않을 때였는데, 반조리 식품이나 라면 등으로 남편이 혼자 손수 밥상을 차린 적이 몇 번 있었다. 세상에 양념 다 들어있는 반조리 식품을 이렇게 맛없게 만들 수가 있나? 물만 잘 맞추면 되는 라면을 이렇게 맛없게 끓일 수가 있나? 싶었다. 남편도 나름의 핑계가 있다. 오랜만에 하려다 보니 잘 안된다나. 아무튼 하루에 고작 두 끼 먹고살면서 이렇게 맛없는 음식으로 때우며 살 수는 없다. 다시는 남편에게 요리를 맡기면 안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쨌든 그런 사람이 홈쇼핑에서 파는 식재료나 조리도구에는 관심이 매우 많다.  방송만 하면 나를 급하게 부른다. 저거 너무 좋다고 사자고. 저거 너무 싸다고 사자고.  대부분 거절을 하는데, 결국  번의 설득 끝에 넘어가 우리 집에 갈치가 박스로, 오징어가 박스로, 닭발이 박스로 배달이 되었다. 2 가구에 식재료를 박스로 주문하다니  말인지. 넣을 자리도 없는 냉동실을 어떻게든 다시 정리해보며 나의 줏대를 더 강하게 지키지 못한 것을 반성하고 자책한다.




남편이 얼마 전부터 새롭게 꽂힌 건 곰돌이 채칼이다. 저것만 있으면 못하는 손질, 못하는 요리가 없다고 한다. 어느 날 엄마한테 '엄마 사위가 이제는 곰돌이 채칼을 사달라고 한다'고 얘기했더니 재밌는지 웃으며 너네가 김장할 것도 아니면서 그런 채칼이 뭐 필요하냐고 한다. 매우 동의하는 바이다. 고작 오이 조금, 무 조금 써는데 저 큰 채칼 세트를 꺼내느니 얼른 도마 위에서 대충 칼질을 하는 게 빠르겠다.


가끔 오늘 김밥처럼 재료를 좀 오래 손질해야 할 때가 있긴 하다. 종종 월남쌈을 만들어 먹을 때에도 나는 남편을 소환해서 재료를 채 썰게 한다. 그때마다 남편은 곰돌이 채칼 타령이다. 우리 집 주방은 꽤 넓은 편인데도 상부장 구조가 조금 이상해서 수납력이 좋지 않다. 그래서 최대한 짐을 늘리지 않으려고 하는데 곰돌이 채칼을 사면 어디다 두어야 할지부터가 막막하다. 홈쇼핑에서 곰돌이 채칼을 팔 때마다 남편이 하도 보라고 해서 곁눈질로 슬쩍 보았더니 구성품이 꽤 많았다. 어디에 두어도 부피를 꽤 차지할 것이 뻔하다. 난 아직 곰돌이 채칼을 살 생각이 없다. 다이소 채칼로 당근을 썰고 있는 남편의 궁시렁 소리를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리며 나는 밥을 하고, 계단을 부치고, 햄을 굽고, 맛살을 잘라 다른 재료 준비를 마쳤다.


긴 재료 준비의 수고를 상쇄할 만큼 바로 싼 집김밥의 맛은 매우 좋다. 별 것 아닌 재료가 들어가는데 김밥은 왜 이렇게 맛이 있을까? 참 신기하다. 나는 평소에도 김밥을 참 좋아한다. 바쁠 때 간단히 영양가 있게 때울 수 있는 음식 이어서다. 딱히 바쁘지 않을 때에도 김밥으로 한 끼를 때우는 것을 무척 좋아하는데, 그럼 나머지 여유 시간에 내가 좋아하는 다른 일을 더 할 수가 있다. 가장 좋아하는 상황은 운전하며 이동할 때 김밥을 먹는 것이다. 이동시간은 참 아까운 시간인데 그 시간에 식사까지 해결할 수 있다는 것이 참 좋다.


원래는 식탁 위에 잘 세팅해서 차려 먹으려고 했는데, 말아서 써는 족족 삼식이가 하나씩 집어먹는 바람에,  또 나도 덩달아 싸면서 썰면서 몇 개를 집어먹었더니 금방 배가 부르다. 라면 한 그릇 끓여 같이 먹으려고 했는데 어느덧 보니 곁들여 먹을 남은 김밥이 없다. 사실 뱃속에 라면이 들어갈 공간도 없기도 하다. 오늘 총 6줄을 쌌는데 지금 겨우 한 줄이 남았다. 정말 둘이서 엄청 집어먹었다. 속이 더부룩하다.





코로나가 시작되었던 2020년 초부터 조금씩 해 두었던 밥상에 대한 기록과 그 기억들을 다시 한번 정리하며 하나씩 옮겨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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