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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가을 Jun 06. 2022

쌀국수 한 그릇의 가치

밥 차리는 것을 즐거워하려고 애를 씁니다 - 코시국 집밥기록


병원을 다니면서 만나게 된 사람들이 있다. 같은 경험을 하고 있는 사람들이 모였고, 병원이나 치료에 대한 정보를 나누기 위해 단톡방을 만들었다. 어느덧 꽤 많은 시간이 흘렀고 우리는 이제 이 곳에서 정보보다는 일상적인 대화를 더 많이 나눈다. 이 친구들이 아니었다면 이 긴 시간을 어떻게 견뎌냈을까 싶다. 

그 중 한 친구는 강원도 아주 먼 곳에 산다. 남편이 군인이라 몇 년마다 사는 곳을 옮겨 다니는데 지금 머물게 된 곳이 그 강원도 산골짝이다. 살고 있는 사택 근처에는 정말 아무 것도 없고, 짜장면 한 그릇이라도 먹고 싶은 날엔 큰맘 먹고 차를 타고 꽤 멀리까지 나가야 한다고 한다.


어쩌다 서울 한 번 나오는 날에는 트렁크 가득 필요한 것들을 사들고 들어가는 모양이다. 며칠 전 코스트코에 다녀왔는데, 이 친구의 쇼핑리스트에서 늘 빠지지 않는다는 것이 있어서 나도 하나 장바구니에 담아보았다. 바로 쌀국수이다.


짜장면 한 그릇 먹기도 힘들다는 동네에 사는데 쌀국수 같은 것이야 오죽할까. 우연히 이 쌀국수를 한 번 먹어보고는 웬만한 전문 Pho 집에서 먹는 것보다 맛있어서 이제는 식당에서 사 먹는 쌀국수가 잘 생각이 나지 않을 정도라고 했다. 무려 12인분이 들어있는데 가격은 9,900원. 1인분에 900원도 채 안 되는 가격이다. 혹시 내 입맛에는 별로라고 할 지라도 한 번 테스트 삼아 사 본 것이 전혀 억울하지 않을 것 같다.




토요일 아침, 느지막이 일어난 남편이 눈을 뜨자마자 배가 고프다고 한다. 평소에는 아침을 먹지 않고 출근하는 사람이, 왜 집에만 있으면 꼭 배가 고프다고 하는가. 주말만 되면 세 끼 연속 뭘 차려먹어야 하나 고민인데 오늘은 쌀국수 덕분에 우선 한 끼 걱정은 덜 수 있을 것 같다. 얼마 전 사온 쌀국수가 있는데 한 번 먹어보자고 했다.


육수와 면을 따로 삶아야 해서 냄비가 2개가 필요했다. 물이 끓는 동안 고명으로 얹을 양파와 청양고추, 그리고 고수를 썰어 따로 담아놓았다. 원래 고수를 못 먹었었는데 언제부턴가 음식과 어우러지는 고수의 향이 감칠맛을 더해주는 그 맛을 깨닫게 되었다. 정말 유레카! 귀한 맛을 깨닫게 해 주심에 감사한다. 이제 나는 고수가 필요한 음식에는 아낌없이 다져 넣는다. 쌀국수와 타코, 살사에는 고수가 정말 필수이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남편은 아직 이 고수의 매력을 깨닫지 못했다. 파릇파릇한 걸 다져 뿌려놓기만 해도 혹시 고수일까 해서 기겁을 한다. 며칠 전 다른 음식에 내가 다져 뿌렸던 파릇파릇했던 그것은 파슬리였다. 고수가 아니라고 하니 그제야 안심하고 한 술을 떴다. 이 초딩입맛 고알못 같으니.


육수가 끓기 시작하니 진한 냄새가 솔솔 피어오른다. 살짝 꼬릿꼬릿한 이 냄새는 뭔가 감칠맛이 폭발하는 맛을 지니고 있음을 의미한다. 종종 어떤 음식에서는 맛을 보지 않더라도 냄새만으로도 맛이 어떨지 대충 짐작이 간다.


불고기감이 남은 것이 있어 토핑용으로 먼저 살짝 구워 익혀주었다. 불고기용 소고기는 거의 항상 우리집 냉동실에 떨어지지 않고 쟁여져 있는 식재료이다. 불고기감 하나로 불고기는 물론, 국, 볶음밥, 야채말이 등이나 이런저런 반찬을 만들 때 사용한다. 국거리용 고기를 오래 푹 익혀 육수를 낼 때보다는 조금 덜 깊은 맛이 나긴 하지만, 오래 두고 먹을 양이 아닌 적은 양의 국을 30-40분 내로 후딱 끓여 먹을 때에는 불고기용 소고기로 국을 끓이는 것이 훨씬 편하고 맛도 좋다. 오늘 같이 국수나 파스타류의 고명이 필요할 때에도 불고기용 소고기는 아주 유용하게 쓰인다.


식기도를 하고 국물 한 모금을 맛보는데 생각했던 것보다 깊고 진한 맛이었다. 남편도 '으어' 하는 국물 마실 때 나오는 아저씨 감탄사를 내뱉으며 열심히 먹방을 한다. 모르고 먹으면 큰 솥에서 12시간 이상 고아낸 육수라고 해도 믿을 것 같다나. 비약이 조금 심한 것 같기도 하지만, 사실 그 묘사가 아깝지 않을 정도로 맛이 좋긴 했다. 적어도 일반 프랜차이즈 베트남 쌀국수 집보다는 맛이 있었다. 친구가 사 먹는 것보다 낫다고 했던 말이 무슨 말인지 알 것 같았다.


남편도 '이제 쌀국수 안 사 먹어도 되겠네' 라며 똑같은 말을 한다. 내가 뭔가 차려줬을 때 정말 맛이 있다고 생각할 때 나오는 칭찬이자 감탄사이다. 맛도 있지만 집에서 먹으면 가격도 저렴하니 일석이조라는 뜻이기도 하다. 그런데 남편이 간과하는 것이 있다. 나라는 사람의 가치에 대한 문제이다. 내 인건비로 식재료를 사 오고 주방에서 음식을 하고, 상을 차리고 다시 그릇을 씻어 정리하는 과정의 시간을 시급으로 계산하면 과연 이 한 끼가 결코 싼 건 아니라는 거다. 오히려 사 먹는 것보다 비싼 가치의 음식이라고 조곤조곤 설명을 해 주니 남편도 맞는 말이라고 한다.




물가가 하늘 높은 줄 모르고 계속 오르고 있다 보니 점점 외식하는 것이 부담스럽긴 하다. 이 음식에 뭐 얼마나 대단한 재료가 들어간다고 이 가격이야 싶다가도, 이 음식을 만들어준 사람의 가치를 생각해보면 그래 요즘 시대에 이 정도는 받아야지 싶다. 엄마는 내가 값을 잘 깍지도 못하고 어리숙하다고 늘 뭐라고 한다. 흥정을 못하는 게 아니라 안 하는 거다. 아주 바가지가 아닌 다음에야 웬만하면 나는 부르는 가격에 값을 지불한다.


말도 안 되는 물가를 안정시키는 것은 정부가 해야 할 일이겠지만, 일단 물가가 올랐으면 결국 사람의 가치도 올라가야 하는 게 맞다. 누구나 내 가치는 올릴 수 있는 한 최대한 올리고 싶고 타인의 가치는 최대한 싸게 쓰고 싶은 법이지만, 내 가치가 소중한 만큼 상대방도 자신의 가치를 소중하게 인정받고 싶을 것이다. 외식을 최대한 줄이려고 하는 요즘이지만, 피치 못할 사정으로 밖의 음식을 사 먹어야 할 때에는 단순히 음식 자체가 아닌 여기에 들어간 사람의 여러 가지 수고를 생각하고, 아깝다 비싸다 여기지 않고 나 대신 기꺼이 그 노동을 감수해 준 것에 대한 마땅한 값을 지불하려 한다.

프리랜서가 되고 나니 연봉으로 따지면 수입이 많이 줄긴 했는데 일에 대한 단가로 따지면 직장에 속했을 때보다 훨씬 많은 돈을 받는다. 일을 더 늘리지 못하는 것은 내 상황상 어쩔 수 없는 부분이라 이렇게라도 돈을 벌 수 있음에 감사한다. 일에 대한 부담은 전보다 더 커졌다. 예전에는 내가 일을 잘 하든 못하든 내가 소속된 직장이 그 모든 공과 책임을 가져갔지만, 이제는 모든 책임이 나에게 돌아온다.  


내가 받은 돈에 대한 가치만큼 일을 잘 마무리해서 주고 싶은데 늘 완성도에 대한 아쉬움이 크다. 내 기대치가 높은 만큼 상대방도 보는 눈이 그럴 텐데 과연 이 결과물들이 마음에 들까 걱정된다. 재능이 있어 시작한 일이 아닌데 어쩌다 보니 계속 이 분야에 몸담게 되었다. 쌓이는 연차와 들어가는 나이만큼 이 일에 대한 숙련도가 정도에 맞게 생기고 있는지 의문이다.


일감을 처음 받아 시작할 때마다 기도를 한다. 한 단계 한 단계 성실하게 마무리할 수 있기를, 섣부른 판단이나 결정으로 누군가의 미래를 함부로 좌지우지하지 않게 되기를, 내가 받는 보상만큼의 가치를 꼭 돌려줄 수 있기를, 누군가 나에게 들인 돈이 아깝다고 생각하게 되는 일이 없기를, 최소한 그 정도의 가치는 지닌 사람이 될 수 있기를 말이다.    

| 2020.03.12



코로나가 시작되었던 2020년 초부터 조금씩 해 두었던 밥상에 대한 기록과 그 기억들을 다시 한번 정리하며 하나씩 옮겨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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