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런치, 3년 만에 다시 글을 써봅니다
얼마 전 <언젠가는 슬기로울 전공의 생활> 이라는 드라마를 재미있게 시청했다. <슬기로운 의사생활>의 스핀오프 버전이라고 했다. 처음에는 익숙하지 않은 배우들의 캐스팅이라 크게 관심이 가지 않았었는데 배경음악 삼아 무심히 틀어놓은 티비의 몇 장면에 눈과 귀가 꽂혀 집중을 하게 되었다. 많이 울었고 설레기도 했다. 눈물이 나왔던 것은 엄마로서의 모성과 감성이 건드려졌기 때문이고, 설렘은 잊혀진 아가씨 때의 연애 감정 같은 것이 되살아났기 때문인 것 같다. (여러모로 아줌마들을 티비 앞으로 끌어모을 포인트를 잘 공략한 드라마이다)
슬기로운 의사생활에서는 다양한 과에서 일어나는 이야기들이 여러 가지로 다루어졌었는데, 이번 언슬전에서는 산부인과에만 집중된 에피소드들이 나온다. 그러다 보니 드디어 이게 등장하네, 난임 그리고 시험관. 아마도 요즘 이 시대 산부인과의 가장 뜨거운 감자인 소재가 아닐까 싶다.
난임의 대상은 30대 후반의 부부. 극 중 여자 주인공의 언니와 형부다. 극 안에서 정확하게 제시된 건 아니지만 등장인물들의 몇 가지 대사로 대략 추측해 보면 결혼한 지는 10여 년 정도 된 것 같고, 난임이라 진단받은 지도 꽤 여러 해가 된 것 같다. 시험관으로 임신을 했지만 중 후기에 유산을 했던 경험이 있는 것 같고, 그 후로 한동안 임신을 다시 시도하지 못하다가 이제는 조금 몸과 마음이 추슬러져 다시 한번 시험관에 도전을 하는 용기를 내는 것 같다.
이런 사소한 부분까지 어디서 어떻게 캐치를 한 걸까 싶은, 어떨 땐 등장하는 에피소드들의 디테일함에 말을 잇지 못했다. 특히 묵직하게 아픈 배를 부여잡고 지하철의 임산부 배려석 앞에 서 있는 모습에서는 가슴이 얼마나 먹먹해지던지. 너무 힘들지만 그렇다고 내가 지금 앉을 수는 없는 자리. 아니, 언젠가 과연 앉아볼 수는 있을지 기약도 할 수 없는 자리.
누군가는 저 부부가 결국에는 자연임신이 되었으면 좋겠다고 했다. 언슬전에서는 안타깝고 슬픈 장면들도 많았지만, 전반적으로 긍정적인 에너지를 전달하는 드라마였다. 그래서 나 역시 이 부부에게 어떤 방법으로든 아이가 찾아오며 마무리가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드라마가 끝날 때까지 부부에게는 아이가 찾아오지 않았다.
우리 부부는 총 15회의 시험관 시술을 했다. 처음에는 신혼을 좀 즐기고 싶기도 했고, 당장 아이가 생기는 것에 대해 부담이 있어 피임을 한 기간도 좀 있었다. 그러다 막상 아이를 가지려고 하니 임신이 잘 되지 않았다. 우여곡절 끝에 난임 진단을 받고 쉴 새 없이 시험관을 했다. 내 인생에서 이렇게 열심히 도전한 일이 있을까. 소위 '공부를 이렇게 했으면 서울대를 갔을 거야' 하는 말처럼 정말 할 수 있는 모든 최선을 다해 하루하루를 살아냈다.
난임의 시간이 길어질수록 점점 더 시간적, 물질적, 체력적 여유가 빠듯해졌다. 과연 이 과정을 언제까지 할 수 있을지 지치기도 하고 겁이 나기도 했다. 앞만 보고 달리다 보니 정신없이 시간과 돈과 몸을 써댔는데 다시 정신을 차려보니 너무 멀리 온 것 같았다. 조금만 더 해보면 되지 않을까 싶다가도 그 '조금만'이 또 이어지고 이어지다가 머지않아 나에게 시간도 돈도 건강도 더 이상 남은 것이 없으면 어쩌지 하는 두려움이 생겼다. 이미 나에게 남아있는 것이 많지 않았기 때문에 이 과정을 이어가는 것이 조금 위험한 도박처럼, 낭비처럼 여겨지기도 했다. 하늘이 내게 주신 운명이 여기 까지라면 받아들이고 나에게 주어진 시간과 돈과 몸을 이제는 아껴 다른 열심에 내어주어야 하지 않을까 싶었다.
마음이 이렇게 정리가 될 때쯤 브런치를 시작했다. 누군가 보아 주길 바라는 글이 아니라 내 생각을 정리하기 위한 시간이었기 때문에 순서에 조금 두서는 없었지만 생각나는 대로 글을 적어내려 갔다. 대나무숲처럼 마음에 있던 말들을 쏟아놓았다. 정리가 되어가는 내 생각의 끝에 나도 모르게 조금씩 써 내려가고 있는 결론이 생기고 있었다. 나의 결말이 꼭 임신과 아이의 출산이 아니어도 괜찮다는 것. 꼭 그 방법만이 나의 해피엔딩은 아니라는 것이었다.
열린 결말은 오랜만에 나를 조금씩 설레게 했다. 스멀스멀 시작되던 사십춘기가 조금씩 절정궤도에 오르며 감정의 요동이 있던 때였다. 그렇지 않아도 지난 몇 년 동안 온갖 호르몬을 몸속에 때려부었던터라 감정 기복이 작지 않았었는데 말이다. 그러던 중 새롭게 먹어지는 마음은 날 뭔가 굉장히 단단한 사람처럼 여겨지게 했다. 역시 나이는 헛되게 먹은 것이 아니야, 이 정도면 마음가짐이 꽤 어른스럽네 하며 내가 꽤 괜찮은 회복탄력성을 가지고 있는 것 같이 대견하게 느껴졌다.
등급이 애매해서 그냥 남겨두었던 배아가 둘 있었다. 이식을 하기에는 딱히 성에 차지 않고 그렇다고 폐기하자니 또 그럴만한 것도 아니어서 나중에 좋은 배아가 생기면 그때 보험 삼아 같이 이식해 보자고 얼려두었던 것이었다.
병원을 다니면서 알게 되고 오랫동안 난임 여정을 함께 했던 사람들이 있었다. 햇수와 찻수가 길어지면서 오랜 고차수 생활을 접고 스스로 졸업을 택한 친구들이 하나 둘 생기기 시작했다. 후에, 병원에서 배아 동결을 연장하겠느냐는 연락을 받으면 미련 없이 폐기를 택하는 모습을 보기도 했다. 우리 부부는 이미 우리의 시험관은 여기 까지라는 마음을 먹은 상태였지만, 미련의 문제라기보다 그냥 폐기를 하는 것이 왠지 마음에 썩 내키지 않았다. 난임 친구들 사이에서는 어차피 버릴 거라면 '내 배에 버린다'는 표현을 하기도 했는데, 우리도 그 편을 택하기로 했다. 다만 내 배에 버릴 때에는 시간과 비용이 필요하긴 했다. 어차피 마지막인 거, 기념하는 비용 쓰는 셈 치기로 했다. 주사와 약들, 그동안 그렇게 지긋지긋했지만 내 평생 다시는 보지 못할 마지막이라고 생각하니 마음이 조금 이상해지기도 했다. 다시 시간 맞춰 약을 먹고 배에 주사를 놓고 이틀에 한번 병원에 방문해 링거를 맞아가며 그렇게 서서히 난임 여정의 마지막을 기념하고 마음속으로 새로운 삶들을 준비했다.
이윽고 피검사 날, HCG 수치가 168.8이 나왔다. 자연임신으로 친다면 4주 0일 차. 임신이었다.
등급도 좋지 않았을뿐더러, 그래서 PGS 시도도 해보지 못한 배아였다. 착상이 되기도 어려웠지만, 혹시 착상이 되고 임신이 된다고 해도 걱정거리가 많을 일이었다. 또 유산이 될 가능성이 있거나, 유지가 어느 정도 된다고 하더라도 건강하지 못하게 자랄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었다.
예상치 못한 결과에 당황하며 몇 가지 우려에 대한 질문을 쏟아냈다. 담당 선생님은 피검사 수치가 안정적이고 일단 착상이 잘 된 것으로 보이니 아직 앞서서 걱정하지 말고 잘 지켜보자고 했다. 면역 글로불린을 맞고 집에 돌아왔는데 오후부터 참을 수 없게 어지럽기 시작했다. 이틀 뒤 두 번째 피검사를 했다. HCG 수치가 391이었다. 일주일 뒤 또다시 병원을 방문했다. 아기집을 보았다.
다음 날인가부터는 속이 울렁거리고 메스꺼워지기 시작했다. 점점 먹지 못하는 것들이 늘어났다. 다음 진료 때는 아기의 심장소리를 들었다. 6주라고 했다. 예상과는 달리 아이가 잘 자라주었다. 혹시 모를 일들에 대비해 주사나 약의 처방이 점점 늘어났다. 12주가 되었다. 선생님이 이제 졸업을 시켜주겠다고 하셨고, 원무과 직원분은 이것저것 전원서류들을 챙겨주셨다. 봉투에도 다 들어가지 않을 만큼 두꺼운 책 한 권 수준의 분량의 서류를 들고 분만병원으로 갔다. 서류를 훑어보시던 상담 간호사님이 고생 많았다며 눈물을 글썽이셨다. 새롭게 나의 주치의가 되어주신 선생님은 아직까지 이렇게 시험관을 많이 하고 임신이 되어서 자기에게 아기를 낳으러 온 산모는 없었다면서 어깨가 무겁고 긍정적인 부담감이 생긴다고 했다.
임신 중 예상했던 우여곡절들이 결국 생겨났다. 만약의 상황에 대비해 나에게 나타날 수 있는 증상들을 봐줄 수 있는 전문 센터가 있는 병원으로 전원을 했었다. 바로 협진이 가능해 다행히 늦지 않게 조치들이 잘 이루어졌고, 아기는 뱃속에서 끝까지 건강하게 잘 자랐다. 37주 0일, 아기가 태어났다.
지독한 산전, 산후 우울증을 겪었다. 호르몬의 영향도 있었겠고 여러 이벤트들을 겪으며 이래저래 몸도 많이 안 좋았지만, 내 마음가짐의 문제도 있었다.
예상치 못한 임신이었고 놀랍게도 반갑지 않았던 것 같다. 이때쯤 아기를 낳아 키워야겠다는 시기가 있었는데, 한참 지나있었다. 그렇다면 그전에 멈췄어야 했는데 또 그러지도 못했다. 사십춘기, 인생에서 두 번째 질풍노도의 시기를 겪으며 임신과 출산에 대한 생각을 정리 중이었다. 시간과 비용의 문제도 있었지만, 생각해 보니 이제는 뭔가 내가 임신과 출산과 육아를 감당할 자신이 없을 것 같았다. 마음가짐이 그 지점에 머물러있을 때에 아기가 생겼다. 사실 아기가 오래 못 버텨줄 줄 알았다. 검사 때마다 아기는 큰 문제없이 건강하다고 늘 신호를 보냈지만 괜한 나의 우려였다. 이벤트가 생기긴 했지만 고비를 잘 넘겼다. 하지만 내 몸은 아기를 낳기 전 날까지 매우 고통스러웠고, 어떻게든 빨리 이 임신의 기간이 끝났으면 좋겠다는 생각만 하며 지냈다.
몸가짐과 마음가짐이 이렇다 보니 결국 태교라는 것을 단 한 번도 해보지 못하고 아이를 낳았다. 출산준비라고는 아기가 태어나기 일주일 전쯤 손수건과 아기 내복들을 몇 벌 빨아놓은 게 전부였다. 제왕절개 수술날짜를 잡아놓았었는데, 진료를 보기 위해 방문했던 날 '아무래도 오늘 낳아야겠다'는 주치의 선생님의 말을 듣고 그 길로 분만실로 올라갔다. 작은 손가방 하나 들고 나왔던 터라, 남편이 집에 가서 부랴부랴 대충 짐을 챙겨 왔다.
조리원에 있는 동안 잠시 집에 와서 대충 정리를 했지만, 막상 아기를 데리고 집에 오니 많은 게 어수선했다. 오랫동안 우리 부부 둘만 살던 집에 아기가 들어오니, 아기가 어디에 있으면 좋을지 아기의 물건을 어디에 두면 좋을지 몰라 한참 동안 여러 날을 우왕좌왕했다.
어른스럽긴 무슨, 회복탄력성은 개뿔. 이렇게 모자라고 무지하고 못난 사람이 따로 없었다. 왜 하필 내가 이렇게 가장 못나고 약할 때 엄마가 되었을까. 어느덧 꽉 채운 마흔이었다. 나보다 한참 젊고 어린 엄마들도 다들 잘 해내는데 내가 이 나이 먹고 왜 이걸 이렇게 못해내는지 자존심이 상하고 또 상했다. 밑도 끝도 없는 우울감과 두려움이 매일 찾아왔지만 어디에 티를 내는 것도 부끄럽다는 생각이 들어 하루에도 몇 번씩 그 감정들을 꿀꺽꿀꺽 삼켜 먹었다. 그러다 아이가 잠들고 나면 나도 모르게 이불을 뒤집어쓰고 울었다. 숨 죽여 울 때도 있었고 목 놓아 울 때도 있었다. 해소가 되는 날도 있었고 울다가 더 큰 두려움과 막막함이 찾아오는 날도 있었다.
아이는 어느덧 두 돌이 훌쩍 넘겼고 많이 자랐다. 그리고 나도 많이 자랐다.
지난 3년의 시간이 정신없이 흘렀다. 마지막 시험관을 진행하면서 앞날이 어떻게 될지 상상했던 부분이나, 준비했던 부분과 시간이 너무 다르게 흘러서 더 정신을 차리지 못했던 것 같다. 순간순간의 기억들이 어떤 것들은 마치 10년이나 된 듯 가물거리기도 아득하기도 하다. 내 머릿속 메모리에 온전히 저장되지 못할 만큼 순간들을 붙들고 곱씹을만한 여유도 체력도 되지 않아서 그런 것 같다.
산후 회복이 느려도 너무 느렸다. 노산인 이유도 있었겠지만, 오랫동안 쉬지 않고 진행한 시험관과 임신기간에 겪은 이벤트들로 몸이 많이 약해졌던 게 아닌가 싶다.
임신 중기에 들어서면 입덧이 많이 나아지거나 없어질 거라고 했는데, 나는 출산 전날까지 구역질을 했다. 임신 기간 거의 먹지 못해서인지 출산 후에는 임신 전보다 체중이 더 줄어 있었다. 시험관을 오래 하면 자궁 경부가 약해질 수 있다고 했는데, 그 케이스에도 결국 당첨이 되었다. 아직 5개월이 채 되지도 않았는데 밑이 묵직하게 뭔가가 빠지는 느낌이 들었었다. 경부가 헐거워져 아이가 많이 내려와 있다고 했다. 응급으로 맥 수술을 하고 입원을 했다. 자궁 수축이 어느 정도 잡히고 난 뒤에는 퇴원을 했지만, 출산 전까지 최대한 누워서 생활을 해야 했다. 여러 달 너무 누워만 있었더니 점점 몸에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안 그래도 없는 근육이 더 없어진 것 같았다.
출산 후에도 늘 물 먹은 솜 같이 무겁게 느껴지고 여기저기 삐걱거렸던 몸뚱이가 아이가 두 돌 반을 넘기면서야 조금씩 살 만하다고 느껴지기 시작했다. 지금은 15킬로가 훌쩍 넘어가는 아이를 번쩍 안아 올리곤 하지만, 고작 몇 킬로 되지 않는 아기를 잠시만 안고 있어도 팔다리가 후들후들 떨리던 때가 있었다.
아이가 아직 돌이 되지 않았을 때, 서너 살쯤이 되면 그렇게 예쁠 수가 없다고 이웃 분이 얘기를 했다. 어느 생명체든지 작고 어릴수록 더 예쁜 거 아닌가? 왜 세 살, 네 살이나 되는 큰 애가 더 예쁘다고 하는 건지 잘 이해가 가지 않았다. 그런데 지금 그 시기를 지나고 있는 나의 아이가, 정말 너무너무 예쁜 게 맞다.
태어났을 땐 남편을 많이 닮았던 아이가 커갈수록 내 미니미가 되어간다. 어떨 땐 빛바랜 사진 속 아기 때의 내가 튀어나와 앞에 앉아있는 것만 같다. 그리고 그 아이가 서툰 발음으로 요런 저런 말을 하기 시작했고, 내 목을 확 끌어당겨 뽀뽀를 해 준다. 미안해와 고마워, 사랑한다는 말을 곧잘 한다.
사실 나는 아이 없이 살 수 있는 사람은 아니었다. 낳고 키우다 보니 깨달은 것이 아니라 낳기 전에도 모르지 않았던 것 같다.
물질적으로는 풍족했지만 정서적으로는 그렇지 못한 가정에서 자랐고 그러다 보니 꽤 어린 나이부터 결혼을 꿈꿨다. 내가 꿈꾼 결혼이라 함은 단지 불 같은 사랑을 하고 화려한 결혼식을 올리는 걸 의미했던 게 아니라, 그저 엄마-아빠-아이로 이루어진 가정에서 다정함과 따뜻함을 누리며 사는 것이었다. 대학에 갓 들어간 20대 대학생이었던 내가 즐겨 읽었던 책들은 국내외의 각종 육아서였다. 내가 원가정으로부터 이런 양육을 받고 자랐더라면 나는 지금쯤 어떤 모습이 되어 있을까를 늘 상상했고, 상상 속 내 모습은 무척이나 부러웠다. 시간을 되돌리고 내가 다시 그렇게 자랄 순 없겠지만, 내가 훗날 이룰 가정에서는 다정한 남편과 함께 정서적으로 행복하고 건강한 아이를 키워가는 그런 풍경을 꼭 만들고 싶었다.
하지만 생각보다 기다림의 시간이 길어지다 보니 선명하게 꾸었던 꿈이 어느 순간부터 점점 흐려지기 시작했다. 마치 '나는 미스코리아가 될 거야, 대통령이 될 거야'라고 말하는 어린아이의 허황되거나 아니면 언제든 바뀔 수 있는 그런 꿈처럼, 내가 꿈꾸었던 것도 그렇게 여겨지기도 했다. 체력적으로 지치기도 했고, 물질적으로 빠듯해지기도 했다. 그런 마음들과 상황들이 맞물려 내 마음속 깊은 곳에서 만들어내는 합리화가 생겼던 것 같다. 여기까지만 해도 괜찮아. 이 길이 아닐 수도 있잖아. 꼭 해피엔딩이 아니어도 괜찮아. 그것만이 해피엔딩은 아니잖아.
그렇게 내 오랜 소망을 의지적으로, 잠재웠던 것 같다.
드라마 속 부부에게 끝내 아이가 찾아오지 않았던 건, 오히려 현실에 더 가까운 이야기라고 생각한다. 현실에서는 바라던 소망이 이루어지기보다는 그렇지 못한 경우가 더 많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언슬전의 결말이 해피엔딩이 아니었다고 말할 수 있을까? 그렇다고 말하기는 조금 조심스럽다.
누구나 꿈꾸던 걸 다 이루진 못한다. 하지만 소망과는 다른 모습으로 살아가면서 또 다른 기쁨도 행복도 경험한다. 가끔은 이루어지지 않았던 소망이 아지랑이처럼 생각날 때도 있지만, 오늘 새롭게 만나는 기쁨은 아지랑이 같지 않고 선명해 그 아쉬움을 덮기도 한다. 오래 전의 아쉬움이나 오늘의 기쁨이나 결국 다 기억이나 추억이라는 이름으로 남는다.
15차의 시험관, 그리고 10개월의 임신, 2년 9개월의 육아 기간을 거치며 여기저기 광야를 헤맸던 내 마음과 생각이 다시 자리를 찾아 정착 중이다. 처음 소망이 이루어지지 않았더라도 다른 소망을 품고 다른 기쁨으로도 잘 살아갈 수 있었겠지만, 결국 그 소망이 내게 찾아온 것을 감사함으로 여기고 이제 조금은 적극적으로 그 이야기들을 표현하고 적어보려고 한다.
'이제 조금은 적극적'이라고 표현을 한 것은 그동안 나의 결말과 감정을 오픈하는데 조심스러운 마음이 있기도 했기 때문이다. 내 주변에는 난임을 극복하고자 애쓰는 언니, 동생, 친구들이 아직도 남아 있다. 3년 전 시험관 15차로 마무리지었던 나의 경력(?)도 꽤나 고차수였기 때문에 그 이후로 계속 시험관을 이어가고 있는 사람들은 지금쯤 20, 30찻수를 훨씬 넘긴 초고차수일 것이다.
합격수기라는 것은 읽는 사람에게 정보와 도전을 주고 의지를 다지게 하게 하지만, 한편으론 왜 나에겐 합격의 영광이 주어지지 않는 건지 낙심을 주기도 한다. 어떤 운동을 했고, 뭘 먹었고, 주사제는 어떻게 썼는지 등등의 정보가 힘이 되고 도움이 될 때가 나도 있었다. 도전을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 접했던 성공수기는 좋은 자극제가 되었지만, 오랜 시간 실패를 반복해서 경험한 뒤에는 그저 피하고 싶은 이야기가 되었었다.
내가 적는 글들이 단순한 Happily ever after 같은 성공수기가 되길 원하지 않아 고민을 하다 보니 다시 글을 쓰는데 오랜 시간이 걸렸다. 무슨 이야기를 어떻게 써야 할지에 대한 고민을 오래 했다. 난임에세이를 쓰고 있었기 때문에 먼저 임신과 출산 소식을 간략하게라도 적어야 다음 글을 써 나갈 수 있을 텐데, 그렇다고 '짠, 우리 드디어 임신했어요!' 같은 뉘앙스의 글로 시작하는 건 뭔가 내 마음의 결과 맞지 않았다. 작가의 서랍 속에 이리저리 끄적여본 글들이 여러 편 남아있는데 뭐 하나 마음에 드는 흐름으로 이어지는 글이 없어서 결국 한 번도 발행하지를 못했었다.
그러다가 우연히 언슬전을 시청했다. 난임 에피소드가 큰 비중이 있는 것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나에겐 내가 가장 이해할 수 있는 이야기여서인지 마음을 건드리는 무언가가 있었다. 가볍게 시청 후기를 적으면서 조금씩 내 이야기를 풀어나가니 이번에는 가장 내 생각과 마음에 가까운 진솔한 글이 써진 것 같다.
글쓰기는 어렸을 때부터 아주 오랜 시간 내 호흡 같은 거였다. 아이를 낳고 한동안 그 호흡을 제대로 할 여유가 없어 일상의 숨이 딸리는 느낌이 있었다. 아이가 세 돌이 가까워가니 이제 조금이나마 여유가 보인다. 하지만 여전히 아직 큰 숨을 여러 번이나 들이쉬고 내쉴 정도의 넉넉한 시간은 아니다. 이 글을 처음 쓰기 시작한 것이 여름 즈음이었는데 지금 찬바람이 불고 있다. 몇 달에 걸쳐 하루에 한 문단 두 문단 이렇게 써 내려 나간 거다. 당분간도 그럴 것 같은데 과연 다른 한 편 글을 완성하기까지 또 얼마의 시간이 걸릴지 모르겠다. 그래도 하루에 한 줄 적어 내려 가는 그 시간이 나에겐 찰나의 숨이고 쉼이었다.
쓰고 싶은 이야기들이 많다. 사실 아직 쓰고 있던 난임 에세이나 집밥 이야기도 마무리를 못했다. 발행하지 않고 작가의 서랍 속에 넣어둔 글들이 꽤 많은데 지금 이걸 발행해서 마무리를 하는 게 맞는 건지 잘 모르겠다. 몇 년 사이 일상의 내용들이 많이 바뀌었고, 머릿속에 떠오르는 문장들은 또 새로운 결이기 때문이다.
임신기간을 태교 한 번 해보지 못하고 예민하게 보낸 탓일까, 아이도 예민한 기질을 가지고 태어났다. 아이가 예민하면 엄마라도 넉넉해야 하는데, 나이는 헛되게 먹고 멘탈은 점점 쿠크다스가 되어가서 우리 아이의 영아기 육아는 난리법석이 된 것 같다. 왜 좀 더 내가 건강하고 좋은 상황일 때 찾아와 주지 못한 건지 하늘의 때라는 것이 참 애석하고, 아이에게는 늘 미안하다. 당분간 내가 쓰는 글들은 아쉬움과 모자람 가득한 엄마의 하루에 대한 소회 같은 것이 아닐까 싶다.
나는 조리원 동기가 없다. 출산시기가 코로나의 끝자락 즈음이어서 누군가를 만날 기회가 거의 없었다. 하지만 시험관을 하면서 만나게 된 난임 동기들은 참 많다. 그중 졸업을 한 친구들과는 종종 연락을 이어가지만, 아직 난임 극복의 여정을 걷고 있는 친구들과는 연락을 주고받는 것이 쉽지 않은 것 같다.
나는 익명으로 글을 쓰고 주변에서는 내가 온라인상에 글을 올린다는 것을 아무도 모른다. 난임 동기 친구들이 내 글을 읽을지, 과연 나 인걸 눈치챘을지는 모르겠다. 정말 이제 20, 30찻수나 되었으려나. 아니면 다른 기쁨을 찾아 또 잘 살아가고 있으려나.
어떤 모양으로 살고 있든지 늘 오늘 새롭게 만나는 기쁨이 있었으면 좋겠다. 그 기쁨으로 인해 오늘 많이 행복했으면 좋겠다. 정말 많이 고마웠고, 보고 싶다 다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