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 우리가 리스본에서 만난다는 것은
이 유형은 선천적으로 감정적이지 않은데, 이는 어떤 잘못도 없다.
다소 메마른 감정의 내 성격이 미울 때가 있다. 그럴 때면 MBTI 성격 유형 검사 결과지의 이 한 줄에 위로받곤 한다. 그러나 좀처럼 감정에 동요되지 않는 내게도 세 번째 포르투갈 여행 이후 떠올리기만 하면 눈시울이 붉어지는 순간과 사람이 생겼다. 리스본에서 2박 3일을 함께한 나의 동행을 한국으로 먼저 떠나보내려는 그때, 서로를 꼭 안은 우리는 눈물이 멈추지 않았다. 아직도 이때를 생각하면 이유를 알 수 없는 뭉클함에 눈물이 난다. 우리는 각자의 방식으로 아끼던 포르투갈을 함께 사랑하며, 아주 당연하게 친구가 되었다. 포르투갈이 선물한 내 친구와의 시간을 추억하면서 온 마음을 꺼내 이 글을 쓴다.
인연의 시작, 마데이라
우리의 인연은 내가 첫 포르투갈 여행을 준비하던 때로 거슬러 올라간다. 얼굴도 몰랐던 그녀의 글은 마데이라로 향할 결심을 마치고도 이렇게까지 아무런 계획 없이 떠나도 되는지 염려하던 나에게 힘을 북돋아주었다. 그녀는 마데이라에 꼭 가야 한다고 강력 추천을 한다거나 마데이라 여행에 필요한 정보를 친절하게 알려주지 않았다. 그저 마데이라에서 매 순간 행복했음을 생동감 넘치게 말하고 있었다. 마데이라 여행 전후로 마데이라 곳곳을 누비며 즐거워하는 그녀의 감정이 고스란히 느껴지는 글을 읽고 또 읽었다. 이미 나 혼자 잔뜩 친밀해져서는 댓글이라고는 달아본 적 없던 눈팅 인생을 청산하고 구구절절 글을 남겼다. 그렇게 우리의 인연이 시작되었다.
우연한 동행
그녀는 나보다 한 살 많았지만, 우리는 존댓말을 했다. 그녀는 단 한 번도 '언니'임을 내세우지 않았다. 그래서일까 '언니'라고 누군가를 부르는 것이 어색한 내가 언니라고 부르며 따르는 마음이 편안했다.
우리의 대화는 나의 포르투갈 두 번째 여행이 끝난 후에 본격적으로 이어졌다. 언니도 이미 두 번의 포르투갈 여행을 마친 상태였다. 처음엔 스페인을 주로 여행하며 포르투갈에는 짧게 머물렀는데, 너무도 아쉬워 두 번째에는 포르투갈만 한 달 정도 여행했다고 한다.
우리는 서로에게 왜 포르투갈에 또 가게 되었는지 설명할 필요가 없었다. 소박하고 투박하지만 인간적인 매력이 있는 포르투갈에서 얼마나 좋았는지에 대한 대화가 끝이 없었다. 아침에 눈을 떠서, 일을 하다가, 밥 한 술 들려다가, 퇴근길에도 문득 떠오르곤 하는 포르투갈에서의 시간들을 나누다 보니 어느새 우리 둘 다 세 번째 포르투갈 여행을 앞두게 되었다.
나의 세 번째 포르투갈 여행은 갑자기 결정되었다. 오래도록 시간과 노력을 들여 준비했던 일이 크게 좌절되었다. 이 좌절을 포르투갈로 또 떠날 수 있는 기회라고 생각할 수 있어서 다행이었다. 덕분에 이미 예정되어 있던 언니의 세 번째 포르투갈 여행의 끝 무렵과 나의 여정의 시작 즈음이 겹치게 되었다. 그러나 우리는 아무것도 기약하지 않았고, 이것에 대해 굳이 입 밖으로 꺼내어 말하지 않아도 서로를 이해하고 있었다.
언니는 자기 사업을 꾸리며 주말이나 공휴일이면 더 많은 일을 하면서도 휴일을 따로 두지 않았다. 오로지 여행을 위해 1년의 휴식을 다 털어 넣었다. 나만큼 악착같이 성실하게 사는 사람이 또 있을까 하는 은근한 자부심은 언니 앞에서 순식간에 쭈글어들기도 했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기분이 나쁘다기보다, 오히려 내게 힘이 되어주었다. 치열한 언니의 일상이 내 일상과 다름없단 생각에 언니의 삶과 여행의 이유에 대해 깊이 공감했다. 언니의 여행이 온전히 언니만의 것이 될 수 있었으면 했다. 언니 역시 나와 내 여행에 대해 같은 마음으로 생각하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그래서인지 마침맞게 함께할 수 있었던 시간 동안 서로를 위하는 것이 마치 각자의 이기심을 채우는 것인 양 자연스러웠고 즐거웠다.
기분 좋은 기다림
나는 리스본에 도착해서 다른 지역을 여행 중인 언니를 기다리기로 했다. 언니나 나나 한 달을 넘게 있었던 리스본이었지만 나처럼 이곳을 좋아하는 누군가와 함께 한다는 사실이 마치 새로운 곳을 여행하는 것과 같은 기분을 느끼게 했다. 동시에 우리에게 주어진 삼일의 시간이 벌써부터 야속하기도 했다.
우리는 만날 약속만 하고, 무엇을 할지에 대해선 아무것도 정해두지 않았다. 언니는 여행 중이었고, 나 역시 갑자기 포르투갈에 가게 되었기 때문이다. 우리는 포르투갈에 있는 그 자체로도 이미 충분한 여행이 된다는 것을 경험했기에, 꼭 어디를 가서 무언가를 해야만 한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그래도 함께하면 좋겠다 싶은 몇 가지가 계속 떠올랐다. 추리고 또 추려서 딱 하나만 남겼다. 리스본에 올 때마다 꼭 들르곤 하는 레스토랑을 같이 가보고 싶었다. 그런데 이곳은 주요 관광지구와는 정 반대인 시내 깊숙한 곳일뿐더러 우리의 숙소와도 거리가 좀 있었기에 언니가 이곳을 멀다고 생각하면 안 갈 참이었다. 혹시 몰라 관광지를 조금 비껴 난 강변에서 가볼만한 곳도 현지인 친구의 추천을 받아두었다. 다 적고 나서 보니 가도 좋고, 안 가도 괜찮은 그런 마음이었다. 발길 닿는 대로 걷다가 Pingo doce 푸드코트에서 아무거나 집어서, 아무 데나 앉아서 먹어도 무엇이든 맛있게 추억할 우리였을 테니까.
이번 여행을 앞둔 언니에게 리스본 근교 지역으로 세투발(Setubal)을 권했는데, 나와 함께 가게 될 줄은 몰랐다. 이곳을 다시 갈 거라고 생각했지만, 언니와 같이 간단 사실이 참 기뻤다. 설레는 마음으로 정말 가야 할 곳만 리스트업을 해 두었다.
우리의 리스본
해야만 한다고 믿었던 것들에 둘러싸여 정신없이 살다 보니 누굴 만나 밥 한 끼 하며 사는 얘기 주고받기도 녹록지 않은 어른이 되었다. 내 이야기를 할 힘도 없었거니와, 누구의 이야기를 들어줄 마음의 여유도 잃어가던 때였다. 언니와 나는 오랫동안 스스로에게 휴식을 허락하지 않았던 사람이었다. 그래서인지 보통의 하루같이 보낸 리스본에서의 시간이 더욱더 특별하게 느껴졌다. 우리는 오랜만에 그저 먹고, 걷고, 깔깔거리며 떠들었을 뿐이었다. 그러나 언니의 이야기 속에서 나를 보며, 열심으로 살아온 언니를 인정하고 존경하는 마음은 곧 나를 위한 마음처럼 느껴졌다. 조금은 가벼워진 마음으로 서로의 일상을 진심으로 보듬어줄 수 있었다.
언니는 내가 추천한다는 이유 하나 만으로 스테이크를 먹기 위해 먼 데까지 가는 수고도 기껍게 응했다. 포르투갈식 스테이크는 각종 소스를 자작하게 부어 먹는 것이 특징이다. 버터, 올리브 오일, 크림소스, 머스터드 소스 등 소스의 종류도 다양한 만큼 그 퀄리티도 천차만별이다. Mesa do Bairro의 머스터드 크림소스는 리스본에서 호텔 생활만 6개월을 하며 모든 레스토랑을 섭렵한 분도 최고라고 인정한 맛이지만 추천은 늘 조심스럽기도 하다. 언니의 입맛에 맞아서 다행이었다. 리스본 식당 답지 않은 탁 트인 창 밖으로 보이는 파란 하늘과 그림 같은 구름에 연신 감탄하고 고기 한 점을 먹을 때마다 맛있음을 온몸으로 표현하며 만족스럽게 한 끼를 마쳤다.
소화도 시킬 겸 찬찬히 걸어서 숙소로 돌아오기로 했다. 리스본을 볼 만큼 봤다고 생각한 우리의 오만함을 비웃기라도 하는 듯 형형 색색의 새로 지은 건물들과 현지인들의 화분 사랑을 엿볼 수 있는 오래된 건물들이 유난히 더 눈에 들어왔다. 리스본, 보고 또 봐도 참 예쁘다.
숙소로 돌아온 우리는 남은 일정을 조율하고 다시 길을 나섰다. 구글 맵에 의지하지 않고 다닐 수 있는 익숙한 길들을, 발길 따라 걸었다. 각자의 기억 속에 남아 있는 리스본 곳곳을 직접 가 보며, 이곳에 무엇을 남겼고 새롭게 얻게 된 것은 무엇인지에 대해 나누었다.
내일은 언니가 렌트한 차를 몰고 근교로 나가기로 했기에 일찍 귀가해서 잠을 청하려고 했다. 오늘도 참 좋았지만, 내일은 얼마나 더 좋을까 하는 기대가 얼마만인지. 오랜만에 기분 좋게 잠 못 이룬 밤이었다. 이때까지만 해도 내일이 내 기대 이상의 하루가 될 거라곤 상상할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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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르투갈을 세 번째 여행하는 두 여자의 리스본 근교 여행 편으로 이어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