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 Penamacor에서 보낸 시간들
Penamacor에서의 시간들은 참 고요하고 또 고요했다. 현대인의 습성을 가진 채로 몸만 이곳에 있던 나는 매일 같은 풍경과 밥만 챙겨 먹는 하루를 보내며 평화로움과 동시에 지루함을 느끼기도 했다. 그 누구도 나를 모른다는 생각에 한 없이 자유로울 수 있었지만, 나 역시 아는 사람이 없는 곳이기도 하기에 두려운 마음도 들었다. 사람들로부터 벗어나 무엇이든 내 마음대로 할 수 있어서 좋았다. 하지만 무엇이든 내 마음대로 하고 싶은 것들 속에 자연히 떠올리게 되는 사람들이 지극히 그립기도 했다. 이곳에선 여러 마음들이 참 많이도 오갔었다.
가까이에서 오래 두고 봐야 그 매력을 알 수 있는 것들이 있는가 하면, 때로는 시간과 거리를 두고 멀리 떨어져야지만 볼 수 있는 것들이 있다. 나는 다소 불편한 생활과 혼자될 수밖에 없는 곳으로 멀리 떠나 내가 당연하게 생각했던 것들의 소중함을 생생하게 느낄 수 있는 계기를 만들고 싶었던 것일지도 모른다.
다시금 돌아온 바쁜 일상과 익숙한 사람들로 둘러 쌓인 이곳에선 Penamacor가 참 그립다. 사람 마음이 이렇게나 얄궂다. Penamacor의 단순한 생활 속에 있던 소소한 일들을 추억하며, 잠시나마 내 마음을 달래 보려 한다.
채소 깎는 칼
건축가가 Penamacor 옆 마을에 볼 일이 있다기에 동행을 했다. 마을에 도착하자마자 길거리에서 만난 어르신은 나에게 성큼성큼 다가오셨다. 내가 남한에서 왔다고 소개 하자, 어르신은 본인의 집에 한국이 있다며 나를 잠시 기다리게끔 했다. 도저히 그 의중을 알 수 없어 궁금해하며 현관 앞에서 기다렸다. 어르신은 지도를 갖고 나오며, "봐, 우리 집에도 한국이 있지?" 하신다. 함께 지도를 펴 보며 내게 정말 멀리서 오느라 고생이 많았다며 활짝 웃으신다.
볼 일을 마치고 돌아오는 길에 다시 마주친 어르신은 이번에는 손에 무언가를 들고 나를 기다리고 계셨다. 어르신은 내게 성모 축일을 기념하는 행사 팸플릿과 채소 깎는 칼을 선물로 건네려 했다. 팸플릿은 달갑게 받았지만, 채소 깎는 칼을 받아도 될는지 당황스러운 마음에 받지 않으려고 했다. 그런 내게 어르신은 웃는 얼굴로 채근하며, 내 옆에 선 건축가에게 무어라 말을 한다. 건축가는 먼 곳에서 온 손님을 빈 손으로 보낼 순 없다며, 이거라도 꼭 쥐어서 보내고 싶은 마음을 받아줬으면 한다고 통역해 주었다. 얼떨떨한 마음으로 받아온 채소 깎는 칼은 포르투갈 여행의 기념품으로 고이 모셔두고 있다.
사람이 가끔 사는 집
건축가의 볼 일은 할아버지, 할머니의 유품 중 일부를 친척에게 전달하는 것이었다. 두 분께서 살아생전 쓰던 모습 그대로 남겨둔 집은 이제는 할머니와 할아버지의 후손들이 휴가차 찾는 곳이 되었다. 사람이 가끔 사는 흔적이 있는 이 집엔 세월의 풍파가 고스란히 남아 있기도 해서 둘러보는 기분이 묘했다.
일반적으로 포르투갈의 더운 계절이면 내륙지방으로 갈수록 작렬하는 건조한 더위를 만날 수 있게 된다. 그런데 이 지역은 포르투갈 메인랜드에서 제일 높은 산인 Serra da Estrella(1993m) 인근이다. Serra da Estrella의 꼭대기는 4월에도 눈이 내릴 때도 있다. 그럴 때면 이 산으로 가까이 갈수록 온도가 매우 낮아진다. 마을과 마을 사이의 거리가 10km도 채 안되지만 Serra da Estrella에 가까워질수록 3-4도씩 낮아지기도 했다. 할머니, 할아버지와 이 곳에서 보낸 어린 시절을 추억할 수 있는 곳에서 더위도 피할 수 있다면 이곳을 찾을 이유는 충분할 것 같다.
누가 돌봐주지 않아도 알아서 자라는 오렌지 나무엔 오렌지가 주렁주렁 열려 있었다. 오렌지를 하나 따서 먹어보니, 두툼한 껍질과 시큼함이 이곳의 추위를 머금고 있는 듯했다. 남부 지방에서 만난 껍질이 얇은 달콤한 오렌지 생각이 절로 났다.
부엌 한 편의 바닥을 열어 지하로 난 계단을 따라 내려가니 와인 저장고와 빈 술통 그리고 올리브 오일을 보관했던 장독대 같은 것들이 있었다. 이곳은 올리브와 포도를 씻고 건조시켜 오일을 짜내거나 와인과 비니거를 만들기도 했던 곳이기도 했다. 그의 할머니는 수고스러운 일을 자청하며, 때마다 이곳을 찾는 가족들에게 직접 만든 올리브와 올리브 오일, 와인과 비니거를 줬다고 한다. 이곳의 와인은 좋다고 말하기 어렵지만, 와인을 발효시켜 만든 비니거는 훌륭한 맛을 자랑한다고 했다. 지금은 좀 더 편리하게 다양한 맛의 비니거를 살 수 있지만 아직 그 어디에서도 할머니가 만든 맛의 비니거는 찾지 못해 아쉽다고 했다.
먼지가 켜켜이 쌓인 이 곳에서 건축가의 추억 이야기를 들으며 돌아가신 할머니 생각이 났다. 함께 살기도 했다가 가끔 만나는 사이가 되어버린 할머니는 손주들의 입에 무언가를 넣어주는 것을 참 좋아하셨다. 끼니를 거르면 그렇게 속상해하셨고, 사람이 아무렇게나 만들어진 아무거나 먹고살면 안 된다고 굳게 믿는 분이셨다. 맛있는 음식으로도 도저히 채워지지 않는 그 무언가는 어린 시절의 향수 속에만 남아 있는 것 같아 아쉽기도 하다. 하지만 이 아쉬움으로부터 내 기억에 남아 있는 할머니를 더욱 더 오래도록 추억할 수 있는 것은 아닐까.
올리브 오일
어머니들 사이에서는 공장에서 나온 들기름이나 참기름보다 직접 농사를 짓거나 믿을만한 누군가로부터 공수받은 깨로 방앗간에서 짜낸 기름 이어야지만 가족을 제대로 먹인다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듯이 이곳에선 올리브 오일이 그러했다. 우리나라 농촌에 아직도 직접 기름을 짜는 방앗간이 있는 것처럼 이곳에도 개인이 직접 만든 올리브 오일을 취급하는 곳이 있었다. 덕분에 건축가는 할머니의 맛을 느낄 수 있는 올리브 오일을 구하는 곳을 찾을 수 있었다.
마침 올해 갓 짠 올리브 오일을 받으러 가야 할 시기가 되었다고 했다. 1년 정도 먹을 올리브 오일을 보관해 두는 통을 꺼냈다. 올리브 오일에 적지 않은 비용을 지불하고 그것마저 아껴 먹는 나에겐 실로 어마어마한 양이었다. 포르투갈 사람들의 올리브 오일 사랑은 정말 대단하다. 샐러드, 생선, 각종 고기 요리에 뿌리는 것은 말할 것도 없으며 쌀로 밥을 지을 때도 넣고, 감자튀김이나 감자칩에도 뿌려 먹는다. 가끔 올리브 오일을 먹기 위해 요리를 하나 싶기도 했다. 그래도 그렇지 혼자 사는 양반이 이렇게나 많은 양을 다 먹는다니, 참 신기했다.
건축가는 옆 동네에 사는 안토니오가 만든 올리브 오일을 사러 가는 길에 일관된 성실함과 고집으로 똘똘 뭉친 그의 훌륭함에 대해 칭찬했다. 안토니오가 만드는 수십 갤런이 넘는 올리브 오일이 완성되면 2주일도 안되어 완판 된다고 한다. 그는 사람들이 올리브를 가져오면 묵혀두었다가 오일로 만들어주기도 하고, 사람들이 직접 묵힌 올리브를 가져올 때면 오일로 만들어주는 일만 하기도 한다. 그러나 이곳의 인구가 점점 줄어들어 일손이 부족해서인지 올리브를 직접 가져오는 사람의 수가 해가 갈수록 줄어든다고 한다. 안토니오는 수입이 늘어나긴 하지만 마냥 기쁘지는 않다고 했다. 조금 더 많은 사람들이 자신들만의 올리브를 가꿀 수 있었으면 좋겠다고 했다.
안토니오에게 한국에서 유기농이라고 이름 붙은 올리브 오일이 얼마에 판매되고 있는지를 알려주니, 당장 한국으로 가야겠다고 농담을 했다. 그러면서 '유기농'이라는 이름을 붙이는 게 참 이상하다고 했다. 올리브 나무는 곳곳에 돌과 큰 바위가 있는 척박한 포르투갈의 땅에서도 자랄 수 있는 나무라고 한다. 가지치기만 잘해주면 100년 넘게 과실을 내기도 하고, 가뭄에도 잘 쓰러지지 않는 편이라고 했다. 본인은 화학 비료로 땅을 가꿀 시간도 이것을 함께 할 인력을 구할 방법도 없기에 그저 아무것도 안 한 땅에서 자라고 있는 올리브 열매를 수확하기만 할 뿐인데, 이것에도 굳이 올가닉이란 이름을 붙여야 하냐며 고개를 갸우뚱했다.
공장에서 만든 올리브 오일이 익숙한 내게 안토니오의 올리브 오일은 참 신선했고, 향긋했다. 포르투기쉬들의 올리브 오일 사랑을 조금이나마 이해할 수 있었다.
커피
건축가의 집에서 아쉬운 것 하나는 커피를 마실 수 없었다는 것이다. 커피를 즐기는 나는 포르투갈에서는 꼭! 하루에 한 잔의 커피를 마셔야만 한다고 생각한다. 포르투갈은 커피 생산국은 아니지만 남미와 아프리카 국가들을 식민지로 뒀던 덕분에 원두의 배합을 다양한 방식으로 해내는 블렌딩의 수준이 뛰어나기 때문이다.
또 커피를 파는 곳은 아무리 시골이라 해도 (시골일수록 더) 아침 일찍 문을 열기도 해서, 이른 시간에 간단히 요기하기에도 참 좋았다. 처음에 교외를 다닐 땐 여기는 시골이고, 커피를 파는 곳이 거의 없다시피 한만큼 도시보다 가격이 더 비싸겠지 하고 생각했다. 아침 8시가 안 되어 동네를 둘러보다 문을 연 커피숍이 있어 한 잔을 주문했다. 가격을 확인하지 않고 묻지도 않았다. 10유로를 냈는데 잔돈을 너무 많이 받은 것 같아 세어보니 9.4유로를 거슬러 받았더라.
가게 간판이 없어도 Delta, Sical, Camelo, Nicola, Tofe 등의 간판을 걸어둔 곳이라면 커피를 판매한다는 뜻이다. 이런 곳일수록 가격은 착할 확률이 높다. 0.5유로-0.6유로 선이면 커피 한 잔을 마실 수 있고 라테는 0.3-0.4유로 정도의 가격이 더 붙는다. 프리미엄 원두를 취급한다 해도 0.75 이상을 넘지 않았다. 그래서 매일 가벼운 마음으로 커피 한 잔을 누릴 수 있었다.
테이블이 있는 곳이라면 커피 한 잔을 시켜두고 한참을 앉아 있는 사람에게도 눈치를 주지 않는 곳들이 대부분이다. 커피 한 잔으로도 몇 시간씩 대화를 나누곤 하는 현지인들의 문화 덕분이다. 그래도 나는 몇 시간 동안 자리를 지킬 것 같은 날엔 미안한 마음에 베이커리를 함께 주문하곤 했다. 진열장에 놓인 빵의 유혹을 떨쳐내기 어려웠다는 게 더 솔직한 심정일까?
함께 앉아 대화할 수 있는 사람은 없는 혼자의 시간이었지만, 와이파이를 통해 만날 수 있는 한국의 친구들과 함께 몇 시간이고 글자로 수다를 떨며 이 좋은 순간을 함께할 수 없다는 아쉬움을 달래곤 했다.
도서관
건축가는 일을 하는 와중에도 시간이 날 때마다 마을 곳곳을 직접 보여주며 이 고장에 대한 이해를 도우려 했다. 특히 직접 재건축한 이 도서관에 대해서는 자부심이 대단한 듯했다. 버려진 건물에서 어떤 쓸만한 재료를 찾아, 어떻게 새롭게 만들었고 거기엔 어떤 의도가 담겨 있는지에 대해서 한참을 얘기했다. 이 도서관이 어떻게 지어졌는지에 대한 거의 모든 설명도 모자라 정원에 있는 나무의 사연까지 전해 들은 후에서야 도서관 소개가 끝났다.
너무 많은 이야기를 듣다 보니 오히려 마음에 남는 건 몇 되지 않는다. 애교 가득 나를 맞아주던 도서관 출입문 앞의 고양이, 산 위로 그림자를 남기며 재빠르게 흘러가던 구름들, 이곳은 한 때는 버려진 곳이었지만 지금은 마을 사람들이 자주 찾아주는 곳이 되었구나 하는 것들이다.
건축가가 떠난 후 도서관 한편에 앉아 파란 하늘, 하얀 구름, 초록 능선, 빨간 지붕을 한눈에 담다 보니 시간이 참 빠르게 흘러갔다. 평화롭고 행복했다.
Touch
건축가의 지인은 교사인 아내의 은퇴를 앞두고 건축가와 함께 마을의 학생들을 위한 무료 공부방을 거의 완성 해 가고 있었다. 복도에 놓을 그림과 의자를 선택하는데 한참을 고심했다고 한다. 입술 모양의 의자와 천지창조의 일부인 그림이 선택되었다.
이 곳에서 일어나는 교육이 교사와 학생이 서로를 Touch 하고, 학생이 배움에 Touch 하길 바라는 마음을 담았다고 했다. 또한 교사와 학생이 주고받을 대화, 학생들끼리 나누게 될 대화를 떠올리며 신나게 말하고 있는 듯한 입술 모양의 의자를 두게 되었다고 했다.
타고난 실용주의자인 나는 입술 모양 의자에 정녕 학생들이 편하게 앉을 수 있을 것인가? 하는 의문이 들었다. 하지만 이 모든 것을 느린 영어로 수줍게 말하는 교사의 남편에게서 느껴지는 설렘과 이 공간에 대한 진심 어린 정성을 느낄 수 있었다. 조금 불편하면 어떠랴, 이 공간을 만든 마음은 충분히 아름다웠다.
해 질 녘
늘 예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