늦가을 하동, 평사리의 넉넉한 품을 걷다

평사리 대봉감나무, 최참판댁, 하동스타웨이, 매암차박물관

10월 하순의 고즈넉한 오후 햇살이 비스듬히 내려앉고 있었다. 섬진강 물 위에는 은빛 비늘이 일렁이고 있다. 강변 편도 2차선 도로를 빠져나와 평사리로 향하는 일 차선 좁은 길로 접어들었다. 좌측 평사리 들판은 서둘러 수확을 마친 듯 빈자리가 역력했고, 남겨진 밑동만이 꼿꼿하게 서서 늦가을의 서정을 지키고 있었다. 들판과 도로 사이 언덕에는 가로수처럼 도열한 감나무들이 붉은빛을 머금은 감을 가득 안은채 나그네를 맞았다. 서늘해진 바람을 견뎌낸 감알들이 가을 햇살 아래서 더욱 투명하게 주황의 감등같이 빛났다.


마을을 지날 때도 집집마다, 텃밭마다 감나무가 없는 곳이 없었다. 짙은 녹색 잎 사이로 주황빛 생동감을 뿜어내는 감들이 주렁주렁 매달려 평사리를 포근히 품고 있는 형국이었다. 차를 타고 지나가는 것만으로도 내 마음은 이미 늦가을의 풍성함으로 가득 차올랐다.


숙소에 도착했다. 색바랜 붉은 벽돌의 외벽을 보았을 때만 해도 그저 평범한 시골집이라 생각했다. 그러나 문을 열고 들어서는 순간, 공간의 결이 완전히 바뀌었다. 잘 정돈된 이태리풍의 아늑하고 이국적인 내부는 편안한 잠을 예고하는 듯하여 기분이 좋았다. 서둘러 짐을 풀고 소설 『토지』의 무대인 최참판댁으로 향했다.


올해로 두 번째 방문이다. 평민 세트장과 용이네 집을 지나 최참판댁의 품으로 들어갔다. 별당과 안채, 사랑채와 사당을 차례로 거닐고 나서 박경리 문학관으로 발길을 옮겼다. 문학관 앞마당에 서서 평사리를 조망했다. 우측으로는 섬진강이 유유히 흐르고, 좌측으로는 황금빛 여운이 남은 들판이 펼쳐져 있었다. 뒤쪽으로는 지리산 자락이 든든하게 받쳐주고, 앞과 옆 또한 산들이 감싸고 있어 마을 전체가 하나의 아늑한 보금자리처럼 편안하게 느껴졌다.


하동스타웨이로 향하는 길, 좁은 가파른 길을 타고 올라가는 차 안은 아슬아슬한 긴장감이 감돌았다. 고도가 높아질수록 차창 밖 풍경은 광활하게 열렸다. 늦가을 단풍이 무르익어 군데군데 흩뿌려진 풍경은 마치 천연의 조각들로 짜 맞춘 모자이크 같았다. 스카이워크를 한 바퀴 돌며 평사리를 배경으로 사진을 남겼다. 카페 창가에 앉아 커피를 마시니, 눈앞에 펼쳐진 평사리가 그대로 액자 속에 담긴 한 폭의 풍경화가 되어 다가왔다.


하동 스타웨이에서 바라본 평사리 들판과 섬진강

오늘의 마지막 여정인 매암차박물관으로 이동했다. 차밭의 규모는 그리 크지 않았으나 그윽한 기운이 있었다. 입장료를 내고 받은 녹차 한 잔을 들고 중앙의 의자에 자리를 잡았다. 어느덧 해는 서쪽 산등성이에 걸려 있었고, 차밭 위로는 푸르스름한 어둠이 천천히 내려앉고 있었다. 따뜻한 녹차의 온기가 싸늘한 저녁 공기를 기분 좋게 막아주었다. 한참 동안 녹차나무와 나란히 호흡하며, 지친 영혼과 피로한 육신을 맑게 씻어냈다.


매암차박물관의 차밭

어둠이 짙어질 무렵, 가벼워진 발걸음을 숙소로 향했다. 평사리에서의 하루가 그렇게 저물어 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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