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 덮인 제주를 떠나 만난 섬 속의 섬, 추자도
2025년 12월 4일, 서귀포에서 제주항으로 넘어 가는 겨울의 문턱은 높고 하얬다. 몇 해 전부터 가고 싶었던 추자도행을 실행에 옮기는 날, 제주의 산간지역은 대설주의보가 내려져있었다.
불안과 경탄 사이, 눈 덮인 한라산을 넘다
새벽 5시 40분, 칼호텔을 나설 때 들려온 '5.16 도로 전면통제' 소식은 가슴을 철렁 이게 했다. 배 시간을 맞추지 못할까 봐 초조한 마음으로 한라산을 우회하여가는 버스를 타기 위해 동문로터리 정류장으로 갔다. 다행히 버스 정류장에 도착했을 때 버스 운행이 재개됐다는 메시지가 떴고, 6시 20분 281번 버스에 올랐다.
속도를 내지 못하는 버스 안에서 불안한 마음으로 연신 시계를 확인하면서도 창밖 풍경에 눈을 뗄 수 없었다. 고도가 높아질수록 눈의 두께는 두터워졌다. 통제의 이유를 증명하듯 눈이 두텁게 쌓인 한라산 자락은 비현실적일 만큼 아름다웠다. 불안함은 어느새 경탄으로 바뀌었고, 나는 홀린 듯 카메라 셔터를 눌러 그 경이로운 설경을 담았다.
푸른 바다 위로 떠오른 하얀 섬
7시 25분, 제주시청 앞에서 택시로 갈아타고 가까스로 7시 40분경에 제주연안여객터미널에 도착했다. 8시 정각, 배가 제주항을 미끄러지듯 빠져나갔다.
갑판에 올라서니 멀어지는 제주시의 풍경이 한눈에 들어왔다. 그 뒤로 우뚝 솟은 한라산은 정상이 온통 하얀 눈으로 덮여 장엄한 자태를 뽐내고 있었다. 섬 밖으로 나와서야 비로소 온전히 보이는 섬의 얼굴, 그 풍경에 취해 셀카를 찍고 다시 카메라를 눌렀다. 바다 위에서 바라본 '눈 덮인 한라산'은 이번 여행이 준 최고의 선물이었다.
추자도의 맛과 나바론의 기개
오전 10시, 정확히 신양항에 입항했다. 바람이 많이 불고 날씨가 추웠다. 버스정류장의 추위를 피하기 위해 예초리에 갔다 다시 신양항으로 돌아와서 대서리로 가는 버스에 몸을 실었다. 대서리에 도착해서 동네를 한 바퀴 돌았다. 걷다 보니 여행자안내센터가 눈에 들어왔다. 잠시 들러 추자도 관광안내지도를 받았다. 대서리는 거주 인구가 가장 많은 지역답게 상권이 가장 활성화되어 있었다. 나바론에 오르기 전에 식사를 하기 위해 식당으로 갔다. 마주한 참조기 매운탕은 추운 아침을 견딘 여행자에게 주는 훈장 같았다.
든든해진 몸으로 오른 나바론 하늘길. 깎아지른 절벽을 따라 걷는 기분은 지난 11월에 순창 용궐산의 하늘길을 걸을 때 느꼈던 그 아찔한 전율을 소환했다. 거친 바다와 단단한 바위가 맞닿은 그 길 위에서 나는 자연의 기개를 배웠다.
차가운 자갈 해변과 대왕산의 울림
영흥리에서 추자교까지 걷던 중 만난 작은 자갈 해변, 잠시 신발을 벗고 맨발로 바닷물에 잠긴 자갈을 밟았다. 처음엔 시원하게 느껴지던 바닷물이 이내 겨울의 본색을 드러내며 차갑게 발끝을 자극했다. 하지만 그 서늘한 자극은 새벽부터 이어진 긴장과 피로를 씻어내고 온몸의 감각을 깨워주었다.
마을버스를 타고 대왕산 입구로 갔다. 언덕과 나무 너머로 넓게 펼쳐진 풍경에 취해 걷다 보니 어느 사이에 정상의 정자에 도착했다. 정자에 서니 발아래로 신양리 마을이 정겹게 내려다보였다. 그곳에 놓인 북을 힘차게 두드렸다. 둥- 둥- 울려 퍼지는 소리가 겨울 하늘을 지나 바다 건너까지 닿을 것만 같았다.
아담한 교정과 짧은 해의 작별
오후 3시 30분, 신양리 동네 투어를 시작했다. 추자초 신양분교와 추자중학교의 교정은 아담하고도 아름다웠다. 아이들의 웃음소리가 배어있을 그 고요한 운동장을 거닐며, 섬 마을의 평화로운 일상을 마음 한구석에 담았다.
오후 4시 30분, 다시 신양항을 떠나 저녁 6시 30분 제주항에 도착했다. 눈 때문에 포기하려 했던 새벽의 망설임이 무색할 만큼, 모든 순간이 알차고 눈부셨던 하루, 2025년 겨울의 추자도는 그렇게 내 생의 아름다운 한 페이지로 세겨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