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왜 '오리 이원익'을 모르는가?

잊힌 거인을 위한 변론

by 꿈 꾸는 철이

6번의 영의정, 그러나 남긴 것은 '비 새는 초가집'뿐이었던 역행자


임진왜란의 영웅 하면 우리는 흔히 이순신과 류성룡을 떠올린다. 하지만 그들의 승리와 국난 극복 뒤에서 묵묵히 행정의 기틀을 잡고 백성을 먹여 살린 '행정의 거인', 오리(梧里) 이원익을 아는 이는 드물다. 나 또한 7년 전, 경기도 광명의 충현박물관과 오리서원을 방문하기 전까지는 그를 깊이 알지 못했다.


선조, 광해군, 인조 세 왕을 거치며 무려 여섯 번이나 영의정에 올랐던 일인지하 만인지상(一人之下 萬人之上)의 위치. 그 화려한 이력 뒤에 숨겨진 그의 진짜 모습은 우리 시대에 반드시 소환되어야 할 '공직자의 사표'다.


청백리이자 행정 혁신가인 이원익이 왜 유독 대중에게 알려지지 않았을까? 그 이유와 우리가 되새겨야 할 그의 진면목을 다음과 같이 분석한다.


첫째, 자신의 공적을 철저히 감춘 ‘무명(無名)의 리더십’ 때문이다. 이원익은 방납의 폐단으로 고통받는 백성을 위해 조세 개혁인 '대동법'을 처음으로 시행한 혁신가였다. 기득권의 거센 반대를 무릅쓰고 오직 민생만을 위해 제도를 밀어붙인 '역행자'였음에도, 그는 늘 "공은 임금 등 다른 사람에게 돌리고, 허물은 내가 진다"는 태도를 고수했다. 사후에도 업적을 기리는 것을 극구 경계했던 그의 지나친 겸손이 역설적으로 후세의 망각을 자초한 셈이다.


둘째, 교육 과정에서 인물의 존재 자체가 지워져 있다. 대동법은 임진왜란 후 조선을 부활시킨 가장 훌륭한 민생 혁명으로 교과서에 비중 있게 실려 있지만, 정작 그 제도를 설계하고 시행하게 한 '이원익'이라는 이름은 본문에서조차 찾아보기 힘들다. 제도의 의의만 강조될 뿐 그것을 만든 인물의 서사는 생략되어 있다 보니, 대중에게 이원익은 '위대한 리더'가 아닌 '잊힌 행정가'로 남게 된 것이다. 또한, 그를 기리는 활동이 수도권 일부 지역에 국한되어 있다는 점 역시 인지도를 넓히는 데 한계로 작용하고 있다.


셋째, 6번이나 영의정을 지낸 재상의 ‘청빈함’이 현대인에게는 생경하기 때문이다. 그는 일국의 최고 관직을 여섯 번이나 거쳤음에도 벼슬에서 물러난 뒤, 비가 새는 두 칸짜리 초가집에서 지냈다. 인조 임금이 그 소식을 듣고 "정승을 지낸 지 40년에 겨우 비바람도 못 가리는 초가집에 살다니, 청렴함이 이와 같단 말인가"라며 탄식하고 집을 지어 하사했을 정도다. 이것이 바로 현재 충현박물관에 남아있는 '관감당(觀感堂)'이다. "보고(觀) 느끼라(감)"는 그 이름처럼, 그의 삶은 존재 자체로 강력한 메시지였으나, 자극적인 서사를 원하는 현대 대중 매체에서는 오히려 너무 고결하여 조명받지 못한 측면이 있다.


마지막으로, 우리가 이원익을 반드시 기억해야 하는 이유를 묻고 싶다. 그는 단순히 '가난하게 살았던 관리'가 아니다. 가장 높은 곳에서 가장 낮은 곳의 고통을 보살폈던 '실천적 행정가'였다. 이제 오리 이원익을 광명이라는 지역적 울타리를 넘어 대한민국 전체의 정신적 자산으로 키워내야 한다.


국민권익위원회나 국가청렴권익교육원 등에서 그의 삶을 공직 교육의 필수 과정으로 채택하고, 초·중·고 교과서가 그의 '청렴한 고집'을 비중 있게 다루기를 희망한다. 6번의 영의정 자리를 거치고도 비 새는 초가집을 유산으로 남긴 그의 뒷모습이야말로, 오늘날 우리가 잃어버린 '진짜 어른'의 표상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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