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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차피 해봤자 안돼, 르브론토니까

한 팀만 15년 응원한 팬의 이야기,《랩터스》(해준, 가익가)

역사상 가장 성공한 시즌을 보낸 후 맞이한 2016-17시즌, 랩터스는 오스트리아 출신 유망주 센터 야콥 퍼들과 카메룬 출신 포워드 파스칼 시아캄을 드래프트에서 뽑았다. 드로잔은 자유계약선수가 되었음에도 어느 팀과도 만나지 않고 랩터스와 5년 연장계약 도장을 찍었다. 카터, 보쉬와 달리 드로잔이 남는다는 소식에 팬들은 감동했고, 드로잔은 재계약 첫 시즌부터 리그 정상급 슈팅 가드로 성장했다. 단장에서 사장으로 승진한 유지리는 시즌 중에 올란도에서 세르지 이바카를 트레이드로 데려와 약점으로 평가받던 파워포워드 자리를 보강했고, 해외 리그 경험 후 정상급 수비수로 성장한 피제이 터커를 휴스턴에서 영입하면서 수비력을 강화했다. 51승으로 2년 연속 50승 이상을 기록한 랩터스를 보며 이제 나는 정규시즌 승리에 집착하지 않았다. 플레이오프를 시작하는 4월이 다가오기만을, 르브론에게 설욕하기만을 바랄 뿐이었다.


   밀워키 벅스의 ‘그리스 괴인’ 야니스 아데토쿤보가 골대를 부숴 버릴 듯한 파괴력으로 랩터스 수비를 초토화하면서, 랩터스는 이번에도 플레이오프 1차전 패배의 망령에서 헤어나오지 못했다. 2차전에 주전과 후보를 가리지 않고 고르게 득점하면서 1승 1패를 만들었지만 3차전 1쿼터부터 20점 차로 밀리며 대패했다. 이제 노련해진 랩터스는 살아난 수비에 힘입어 4~6차전을 모두 이기고 2라운드에 진출했다. 하지만 다음 상대가 하필 클리블랜드 캐벌리어스였다. 르브론과 이른 만남이 못마땅했지만 어차피 넘어야 할 산이었고 르브론만 바라보며 시즌을 준비했기에 이번에는 다르리라 믿었다.


   그러나 랩터스는 클리블랜드에 1승도 거두지 못하고 4전 전패로 시즌을 마감했다. 접전 상황이 단 한 차례도 없는 완패였다. 12점 차로 끝난 4차전 전반 나는 텔레비전을 껐고 그 후 어떤 NBA 소식도 찾아보지 않았다. 골든스테이트와 클리블랜드가 NBA 파이널에서 또다시 만나 골든스테이트가 지난 파이널 패배를 설욕했다는 소식을 들을 때까지.


나는 랩터스가 르브론에게 설욕하기만을 바랐다. 그러나 랩터스는 클리블랜드에 4전 전패로 시즌을 마감했다. 단 한 차례 접전 상황 없는 완패였다. (출처 : tsn.ca)


   2017-18시즌을 앞두고 랩터스는 체질 개선을 시도했다. 드로잔에게 3점 슛 연습을 요청하는 등 케이시 감독은 비시즌에 르브론 맞춤형 전략을 세웠다. 드로잔과 둘도 없는 형제가 된 라우리도 3년 재계약으로 토론토에 남았다. 발렌슈나스가 주전 센터로 발돋움했고 수비가 좋은 신인 오지 아누노비가 합류했으며 파월, 라이트, 밴블릿, 시아캄의 급성장으로 리그 정상급 벤치를 구축하며 ‘벤치 몹(후보선수 군단)’이라는 애칭까지 얻었다. 지난 시즌 르브론에게 또다시 무너지면서 생긴 수많은 의심과 부정적인 시선에도 랩터스는 59승을 거두고 정규시즌 팀 최다승을 재차 경신하면서 정규시즌에서 역사상 처음으로 동부 콘퍼런스 1위에 올랐다. 리그 전체 2위 수비력과 5위 공격력은 누구와 붙어도 경쟁할만한 팀을 증명하는 수치였다. 전문가와 농구팬 모두 랩터스를 강팀으로 인정했음에도, 4월을 맞이하는 랩터스 팬은 불안해했다. 플레이오프에만 나서면 정규시즌과 비교해 급격히 떨어지는 경기력 때문이었다.


   플레이오프 1라운드 상대는 워싱턴 위저즈였다. 전반 막판 역전을 당하며 그놈의 1차전 패배 망령이 찾아오는가 했지만, 4쿼터에만 홀로 11점을 책임진 라이트 등 벤치 자원의 활약에 힘입어 2001년 이후 17년 만에 플레이오프 1차전에서 승리했다. 2차전에서도 37점을 올린 드로잔을 비롯해 여섯 명이 두 자릿수 득점으로 랩터스답지 않게 2연승을 달렸다. 원정 두 경기를 내주었으나 드로잔과 라우리가 각각 5, 6차전을 책임지며 4승 2패로 1라운드를 통과하고 2년 전 위저즈에 당한 패배를 갚았다.


2017-18시즌 리그 정상급 벤치를 구축하여 ‘벤치 몹(후보선수 군단)’이라는 애칭을 얻었다. 위쪽부터 시계방향으로 야콥 퍼들, 파스칼 시아캄, 프레드 밴블릿, 델론 라이트


   지난 시즌과 마찬가지로 2라운드 상대는 클리블랜드였다. 지난 시즌과 달리 리그 최고의 랩터스 벤치를 앞세워 경기 중반 빈약한 클리블랜드 벤치를 압도할 수 있기에 오히려 르브론을 일찍 만나 반가웠다. 게다가 클리블랜드는 팀 내 불화로 정규시즌 내내 후유증을 겪었고, 1라운드에서 7차전 접전 끝에 인디애나를 간신히 물리치고 올라온 상황이었다. 전문가 대부분이 토론토 우세를 예상한 이번이야말로 세 번째 도전 만에 르브론을 넘어설 절호의 기회였다. 랩터스 팬들은 정규시즌에 1위 각축전을 벌인 보스턴 셀틱스를 이미 동부 콘퍼런스 최종 상대로 여길 만큼 자신감을 보였다.


   토론토 홈에서 벌어진 1차전, 클리블랜드에 맞서는 랩터스 선수단의 눈빛이나 몸동작은 달라 보였다. 공을 따내려고 악착같이 달려들었고 철저하게 준비했는지 공격과 수비 모두 정규시즌만큼 매끄러웠다. 이와 달리 캐벌리어스 선수들의 몸놀림은 무뎌 보였다. 33 대 19라는 점수로 1쿼터를 마친 에어 캐나다 센터 분위기는 폭발적이었다. 2쿼터에 잠시 추격을 허용했으나 발렌슈나스와 벤치가 득점에 가담하면서 4쿼터 초반 10점 차로 앞서나갔다. 나의 입꼬리도 점점 올라갔다. 그러나 르브론의 패스가 살아나고 1라운드에서 최악의 경기력을 보인 러브가 결정적인 3점을 넣으면서 경기 종료 30초를 남겨두고 클리블랜드는 105 대 105 동점을 만들었다. 불안감이 다시 엄습했다. 하지만 괜찮다. 10초가 남은 마지막 공격에서 끝내면 되니까.


   밴블릿의 3점, 드로잔의 점프슛, 그리고 씨제이 마일스가 림 앞에서 슛을 놓쳐 튀어나온 공을 발렌슈나스가 툭 건드려 림에 집어넣으려는 시도까지. 이 모두가 10초 안에 일어났지만 전부 성공하지 못했다. 연장전에서 1점 뒤진 채 6초를 남겨둔 상황에서도 랩터스가 마지막 공격권을 쥐었지만 림은 밴블릿의 3점 슛을 외면했다. 3년 연속 클리블랜드에 1차전 패배와 동시에 같은 팀을 상대로 플레이오프에서 7연패에 빠진 순간이었다. 그래도 크게 걱정하지 않았다. 1차전 패배가 랩터스가 그동안 지녀온 특징이었기에 2차전에는 분명히 이길 거라고. 하지만 미처 몰랐다. 1차전이 랩터스가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승리할 기회였음을.


랩터스는 경기 종료 10초 전 마지막 공격에서 다섯 번의 슛을 놓치며 이길 경기를 놓쳤다. 발렌슈나스가 슛을 넣지 못하고 좌절하는 모습은 이를 대변한다.


   클리블랜드는 2차전부터 동부 최강자의 위용을 되찾았다. 후반에만 27득점을 집중하는 등 43득점과 14어시스트를 기록한 르브론의 맹활약으로 2연승을 거두었다. 정규시즌 1위의 기세와 여유는 어디 갔는지 원정 경기를 앞둔 랩터스 선수단에는 초조한 기색이 역력했다. 드로잔과 라우리는 ‘새로잔’과 ‘새우리’로 돌아갔고, 팬들은 그렇게나 숨겨온 “랩터스가 그렇지 뭐”라는 자조 섞인 말을 쏟아냈다. 드로잔은 2차전 후 인터뷰에서 “지금 이 순간에 르브론을 막을 사람을 찾을 수 있다면 100달러를 주겠다”라는 발언으로 랩터스 팬 사이에 들끓은 염세적 태도에 기름을 부었다.


   3차전 마지막 순간은 지금 떠올려도 고통스럽다. 4쿼터에 드로잔 대신 출전한 아누노비가 경기를 8초 남겨놓은 상황에서 극적인 3점 슛으로 동점을 만든 때였다. 클리블랜드의 마지막 공격, 반대편에서 랩터스 진영으로 빠르게 넘어온 르브론은 깊숙이 치고 들어가다 시간에 쫓겼고, 역동작에 걸려 몸이 밖으로 나가는 동시에 한 손으로 던진 슛은 경기 종료 버저와 함께 백보드를 맞고 림으로 빨려 들어갔다. 캐벌리어스 선수 모두 달려가 르브론을 얼싸안을 때 나는 미친 듯이 깔깔깔 웃어대고는 고함을 치며 말했다.


   “그래! 랩터스는 클리블랜드의 밥이다! 어떻게 해도 르브론을 이길 수 없어. 하하하하하!”


   그날 르브론에게 르브론(LeBron)과 토론토(Toronto)를 합친 ‘르브론토(LeBronto)’라는 별명이 생겼다. 아무리 발버둥 쳐도 랩터스가 르브론 손바닥 안에 있다는 사실을 인정해야만 했다.


르브론의 새로운 별명 ‘르브론토(LeBronto)’는 아무리 발버둥 쳐도 랩터스가 르브론 손바닥에 있음을 의미했다. 이는 랩터스 팬에게 굴욕적인 상징이었다. (출처: as.com)


   랩터스는 일상에서도 나를 괴롭혔다. 시리즈 시작 전 나는 랩터스가 르브론을 이긴다고 친구들에게 으름장을 놓았다. 그러나 랩터스가 3연패로 탈락 위기에 몰리자 친구들은 조롱을 보내고 비아냥거렸다. 랩터스가 1승이라도 거두어 체면치레는 해주길 바랐다. 오히려 4차전은 최악으로 치달았다. 정신적으로 무장해제 된 랩터스를 상대로 클리블랜드는 연습 경기하듯 농구를 했고, 47 대 63으로 크게 앞선 전반에 승기를 잡았다. 더 큰 문제는 드로잔이 심리적으로 완전히 무너지는 장면이었다. 3차전 4쿼터 승부처에서 벤치를 지킨 굴욕을 겪은 드로잔은 4차전에서도 전혀 집중하지 못했다. 설상가상으로 3쿼터 막판 ‘플레그런트 2 파울’로 퇴장당했다. 탈락 위기에 몰린 상황에서 에이스가 해서는 안 될 행동이었다. 하지만 그것이 랩터스 유니폼을 입은 드로잔의 마지막 모습일 줄은 누구도 알지 못했다.


   2년 연속 클리블랜드에 4전 전패로 랩터스는 정규시즌만 잘하고 플레이오프에 작아지는 팀으로 이미지가 굳어버렸다. “랩터스는 영원한 호구다”라고 나는 중얼거렸다. 동시에 이는 나 자신에게 내린 저주이기도 했다. 랩터스는 농구를 열심히 또 잘한다. 중요할 때 필요한 한 방이 없을 뿐이다.


   결정적인 KO 펀치가 없기는 나도 마찬가지다. 프리랜서가 되고 나서부터 매일 떠오르는 생각을 인터넷 메모장에 기록했다. 키워드로 이전에 쓴 글을 바로 검색하기가 편했고, 느슨해질 때 프리랜서 초창기 시절에 남긴 메모를 보며 마음을 다잡았다. 글의 마지막 부분은 항상 “왜 실천하지 않나”라는 자책이나 “미루지 말자” 혹은 “내일부터는 꼭 하자”는 다짐으로 끝냈다. 원하는 일이 있어도 실천하지 않은 이유는 환청처럼 귓가에 맴도는 “어차피 해봤자 안돼”라는 말 때문이었다. 타인에게 칭찬받고픈 욕구가 비난받지 않으려는 집착으로 이어졌고, 시간이 지나도 실천하지 않는 나를 다그치면서 더 나은 내일을 기대하는 글쓰기에만 취해있었다. 프리랜서 1년 만에 작가가 되겠다는 꿈은 랩터스를 안줏거리로 삼아 어떻게 해도 실패할 목표로 치부했다. 완벽주의라는 괴물은 나를 점점 파괴하여 열등감 넘치는 극성팬으로 만들었고, 랩터스를 원망하는 글로 메모장을 도배하면서 나는 입맛에 맞게 랩터스를 재단해댔다.


나는 “어차피 해봤자 안돼”라는 말로 랩터스의 또 다른 암흑기를 준비했다. 나도 수많은 글을 써놓고도 공개하지 않은 채 “어차피 해봤자 안돼”라는 말속에 숨어지냈다.


   랩터스의 탈락과 동시에 나는 남은 플레이오프를 외면했다. 클리블랜드는 동부 콘퍼런스 결승에서 보스턴 셀틱스를 격파하며 3년 연속 NBA 파이널에서 골든스테이트와 만났다. 그러나 클리블랜드는 단 1승도 거두지 못한 채 골든스테이트의 파이널 2연패를 지켜봐야만 했다. 시즌이 끝나고 르브론이 서부 콘퍼런스 LA 레이커스로 떠났다. 동부 콘퍼런스에서 소속팀을 8년 연속 NBA 파이널에 올렸고 마이애미에서 두 번, 클리블랜드에서 한 번 우승 반지를 끼었던 르브론이 스스로 동부의 왕자 자리에서 내려온 것이다. 토론토 현지에서 “드디어 다음 시즌에 기회가 찾아왔다”라는 반응이 나오던 그때, 나는 “어차피 해봤자 안돼”라는 말로 랩터스의 또 다른 암흑기를 준비했다. 독려와 다짐을 반복하던 메모도 그만두었다. 수많은 글을 써놓고도 사람들의 험담이나 비난을 받지 않으려 블로그에 글을 공개하지 않은 채, 나는 “어차피 해봤자 안돼”라는 말속에 숨어지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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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낭독] 저자 해준 목소리로 듣는 《랩터스》- '형! 랩터스가 결국 해냈어'

https://youtu.be/BjBx-gl2qZQ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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