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팀만 15년 응원한 팬의 이야기,《랩터스》(해준, 가익가)
“I didn’t bring my bag! I didn’t bring my bag! (가방을 놓고 왔어요! 가방을 놓고 왔다고요!)”
밴쿠버 공항 한가운데에서 나는 울부짖었다. 입국 심사장에 배낭을 놓고 나왔는데 한참 뒤에야 알아채고는 돌아가려다 제지당했기 때문이다. 그때서야 머리에 맴돌던 영어가 입 밖으로 터져 나왔다. 몇 차례 신분 확인을 거친 후에야 배낭을 돌려받았지만, 그 시간에 타야 했던 핼리팩스행 비행기는 이미 떠나버렸다. 그렇게 스물한 살 첫 해외여행은 우여곡절의 연속이었다.
캐나다로 첫 해외여행을 떠난 이유는 대학에서 만난 캐나다인 교수 조엘 때문이다. 조엘은 친구와 나에게 겨울 방학 때 캐나다에 가자고 했다. 왜 그런 제안을 했는지 아직도 잘 모르겠다. 하지만 교수가 학생을 자신의 나라로 데려가는 경우가 드물었고 가족이나 친척 누구도 외국에 살지 않았기에 기회를 놓치고 싶지 않았다.
배낭 분실 사건 때문에 우리는 토론토행 비행기를 타야만 했다. 밤늦게 토론토 공항에 도착했지만 기분이 나쁘지 않았다. 토론토가 NBA 농구팀 랩터스와 MLB 야구팀 블루제이스의 도시 아닌가? 내가 응원하는 팀이 아니었고 하룻밤만 머물고 떠나기에 경기장에 가지 못하지만, 공항에서 나는 “레츠 고 랩터스! 안녕, 빈스 카터!”라고 외쳤다. 그때는 몰랐다. 그 이후로 한 번도 가본 적 없는 토론토의 농구팀을 응원하고 빈스 카터를 증오하리라는 것을.
다음 날 아침, 비행기로 한 시간 넘게 걸려 세인트 존이라는 곳에 도착했다. 조엘의 고향인 세인트 존은 캐나다 동부 뉴브런즈윅주 끝에 자리한 인구 10만의 소도시로, 첫 한 달 동안 한국인을 만나지 못할 만큼 그곳은 영어 공부에 최적의 장소였다.
나는 조엘의 형 웨인 집에서 지냈는데, 처음에는 조엘의 지인을 만나느라 크리스마스 연휴를 바쁘게 보냈다. 그러나 새해가 되자 조엘은 집 밖으로 나가지 않았다. 게다가 살갗이 칼날에 베일 듯한 바람과 영하 20도에 이르는 살인적인 추위도 한몫했다. 그래서 나는 국내에서 자주 접하지 못한 NBA 농구를 보는 데 많은 시간을 보냈다. 텔레비전이 조엘 차지였을 때는 걸어서 10분 거리 여동생 데비 집으로 가서 농구를 보았다.
스포츠 채널에서는 여러 팀 중에서도 토론토 랩터스 경기를 자주 중계해주었다. 1995년 함께 창단한 그리즐리스가 2001년 캐나다 밴쿠버에서 미국 멤피스로 연고지를 옮긴 이후 랩터스가 캐나다 유일의 NBA 팀으로 남았고, 슈퍼스타 빈스 카터가 당시 토론토에서 활약했다. 처음에는 어쩔 수 없이 랩터스 경기를 보다가 나중에는 중계를 기다렸다. 랩터스가 농구를 잘해서이거나 카터 때문도 아니었다. 랩터스 전담 캐스터 척 스워츠키(Chuck Swirsky)의 목소리를 듣고 싶어서였다.
응원 팀을 고를 때 고향 팀이나, 특정 선수, 혹은 자주 이기는 팀이 선택 기준일 경우가 많다. 나는 서울 출신이고 카터에 열광하지도 않았으며 당시 감독 케빈 오닐이 기자 앞에서 육두문자를 써가면서 자기 팀 선수를 비난하는 랩터스는 내 취향이 아니었다. 그리고 당시 나는 휴스턴 로키츠 팬이었다. 랩터스에 관심을 가진 계기가 캐스터인 이유는 따로 있다.
어릴 적부터 스포츠 자체를 좋아했고 그중에서도 스포츠 캐스터 목소리에 몰입했다. 송인득, 유수호, 김재영 등 80~90년대를 대표하는 캐스터뿐 아니라 한명재, 권성욱, 정우영 등 요즘 활약하는 캐스터 중계 멘트를 따라 했고, 아침 일찍 학교에 가서 조기 축구를 중계하면서 스포츠 캐스터가 되기를 꿈꾸었다. 그런 나에게 북미 프로스포츠는 동경의 대상이었다. 월드컵이나 올림픽을 제외하고 중립을 지키는 한국 스포츠 중계와 달리 지역별로 스포츠 채널을 보유한 미국과 캐나다에서는 시즌 내내 편파 중계가 가능하다. 그래서 나는 NBA와 메이저리그 야구, 그리고 미식축구까지 섭렵하는 동시에 현지 캐스터에게도 관심을 가졌다. 그래서 자신만의 중계 멘트를 쏟아내는 척 스워츠키 목소리에 나는 빠져들 수밖에 없었다.
1998년부터 랩터스 경기를 중계한 스워츠키는 언뜻 보면 작은 키와 마른 몸의 평범한 대머리 아저씨 같았다. 그러나 그는 스포츠에 관해 모르는 것이 없어서 같은 농구 경기라도 그가 중계하면 더 재미있었다. 특히 농구 중계를 향한 열정은 누구도 따라가지 못했다. 랩터스 위주로 중계함에도 상대 팀 선수의 멋진 플레이가 나오면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해설위원 리오 라우틴스, 잭 암스트롱과 찰떡 호흡을 과시하는 것은 물론이고 시청자와 소통하는 캐스터였다. 경기에서 랩터스가 첫 번째 3점 슛을 넣으면 “OOO에서 XXX 씨가 전화를 걸어왔군요! (You can ring it up! from downtown OOO, that goes to XXX)”라는 중계 멘트로 캐나다와 세계 각지의 랩터스 팬 이름을 불러주었다. 그리고 블로그에 ‘Chuck Checks In’이라는 제목의 글을 올려 팬이 보낸 질문에 성실하게 답변했다. 나는 그가 쓴 글을 인쇄해 사전을 찾으며 읽었다. 중계에서 새로운 표현을 들으면 영어 선생님에게 그 의미를 물었다. 스워츠키의 언어가 곧 나의 영어 교재였던 셈이다.
스워츠키의 인기 비결은 그만의 고유한 중계 멘트에 있었다. 그는 등 번호 33번 자마리오 문(Jamario Moon)에게 ‘아폴로 33호’라는 별명을 지었고, 문이 덩크를 하면 “아폴로 33호가 착륙했습니다! (Apollo 33 has just landed!)”라고 외쳤다. 보쉬가 멋진 플레이를 하면 “오 마이 보쉬! (Oh my Bosh!)”, 모리스 피터슨이 3점을 넣으면 이름 앞글자와 3점을 결합해 ‘MP3’라고 외치는 등 감각적인 멘트로 경기 분위기를 끌어 올렸다.
그중에서도 “엄마, 살라미와 치즈 좀 꺼내주세요. 경기 끝났어요! (Get out the salami and cheese, mama. This ballgame is over!)”가 가장 인기 있었다. 농구와 살라미 햄 그리고 치즈, 어울리지 않는 것끼리 결합한 이 문장을 스워츠키는 랩터스가 승리에 쐐기를 박는 순간 소리쳤는데, 어느 팬에게 받은 손편지가 이를 만든 계기1라고 밝혔다. 편지 내용은 대략 이렇다.
척, 저는 경기에 집중하느라 텔레비전 앞을 떠나지 못해요. 그런데 배가 고파서 고민입니다. 제가 편히 뭘 좀 먹을 수 있게 멘트 좀 해주시겠어요? 저는 살라미와 치즈를 넣은 샌드위치를 좋아한답니다.
다음 경기에 랩터스가 승리를 굳히는 슛을 넣자 스워츠키는 PD와 상의 없이 “엄마, 살라미와 치즈 좀 꺼내주세요. 경기 끝났어요!”를 느닷없이 외쳤고, 곧바로 엄청난 인기를 얻었다. 팬들은 경기장에 살라미와 치즈를 플래카드로 그려왔고 구단에서도 살라미와 치즈 그리고 스워츠키 얼굴이 그려진 티셔츠를 입장권에 끼워 팔기도 했다. 선수들도 경기가 기울어질 때쯤 그에게 다가가 “살라미와 치즈를 외쳐요!”라고 요청할 만큼, 그는 유명한 농구선수 부럽지 않은 인기 스포츠 캐스터였다.
미국 출신 스워츠키는 2007년 캐나다 시민권을 취득하면서 캐나다와 랩터스에 애정을 보여주었다. 하지만 2008년 개인 사정으로 그가 시카고 불스의 라디오 중계팀으로 떠났고, 영원할 줄 알았던 스워츠키와의 갑작스러운 이별에 나는 허탈했다. 현재 랩터스 캐스터 맷 데블린의 중계를 스워츠키 그것과 비교할 정도로, 랩터스 팬에게 스워츠키의 존재는 농구 그 이상이었다. 시카고로 떠난 후에도 그는 랩터스에 끊임없이 애정을 드러냈고 랩터스가 첫 우승을 달성했을 때 “모든 어려운 시간을 견뎌내며 계속 랩터스에 믿음을 보여준 구단 관계자와 팬에게 축하를 보낸다”라며 자기 일처럼 기뻐했다. 내가 랩터스 팬이 되도록 이끌어 준 그에게 고맙다. 캐나다에서 지난 두 달 동안 남은 기억이라곤 스워츠키 목소리밖에 없다. 만약 캐나다에서 그를 만나지 못했다면 내가 랩터스를 응원할 일은 없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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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랩터스> 중 '형! 랩터스가 결국 해냈어' 부분을 저자 낭독 영상으로 제작하여 유튜브에 올렸습니다. 해준 목소리로 생생하게 듣는 랩터스 우승의 순간! 아래 링크로 들어가 확인해보세요.
[낭독] 저자 해준 목소리로 듣는 《랩터스》- '형! 랩터스가 결국 해냈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