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순간의 생각은 금방 사라진다

그 순간을 잃지 않기 위해

by 개일

고등학교 때부터 나는 내 감정을 써 내려가는 걸 굉장히 좋아했다. 과언 아니고 하루 평균 2시간은 걸려가며 그날 하루하루를 기록했고, 그 누구도 관심 가져주지 않는 내 블로그에 4~5년 동안 공개 글만 1300편 정도, 비공개글까지 하면 훨씬 더 많은 글을 올렸다. 아무래도 어린 시절이기도 하고, 공부말고는 큰 고민도 없고, 그냥 하루를 기록하는 게 좋았다.



블로그 시작 계기는 한국에서 혼자 돈 벌고 있을 아빠를 위한 일상 공유였는데, 나중엔 별것 없는 일상에 관심 가져주는 고마운 블로그 이웃분들이 생기면서 더 즐겁게 할 수 있었다. 대학생이 되면서 공부하느라 바빠지고, 친구들과 어울려 다니다 보니 점점 글이 줄어들고, 회사원이 되면서는 거의 끊기게 됐지만.


일주일 전, 조금 더 여유롭게 하루를 시작하고 싶은 마음에 일찍 출근을 했다. 오피스에 도착하긴 했는데 아무도 없어서 그런지 그날은 그냥 다른 걸 하고 싶어지더라. 오랜만에 블로그에 들어가 그때 그 감정을 글로 써 내려갔는데, 무언가 해방되는 기분? 이따금씩 올라오는 ‘내가 잘 살고 있는 걸까’ 하는 불안정한 감정이 글 속에서 정돈되는 기분도 들었다. 나의 평일은 늘 회사를 위해 쓰이고, 정작 나의 무언가를, 실력이든 경험이든, 쌓아올리지 못했다는 불안감이 글을 쓰는 순간만큼은 사라지는 것 같았다. 글을 쓴 게 오랜만이라 그런지 이야기할 거리도 한무더기였다. 하지만 30분쯤 지나니 사람들이 하나둘 들어오고, 그때 쓰고 싶었던 말들은 금방 기억 속에 묻혀버리더라.


내 글을 블로그 말고 어디에 올릴 수 있나 찾아보다가 브런치 스토리를 그날 처음 알게 되었고, 바로 작가 신청을 해 당일 승인을 받았다. 작가로 승인받고 나니 이제 규칙적으로 써야겠다는 다짐도 생기더라. 어차피 이야깃거리도 많고, 하고 싶은 말은 쌓여 있으니 매일 쓰는 것도 전혀 문제 없겠다 싶었다. 마치 수다 떠는 것처럼, 글 쓰는 것도 어쩌면 손으로 떠드는 수다 같으니까.


근데 이게 막상 규칙적으로 쓰려니, 가만히 앉아서는 아이디어가 잘 떠오르지 않는달까. 어느 순간에 바로 랩탑을 열고 30분에서 1시간 정도 몰입해서 쓰다 보면 머릿속엔 더 많은 이야기들이 있었던 것 같은데 집중력이 흐트러지는 느낌. 쓰고 싶었던 말들이 엉키고, 글을 다 쓰고 나면 ‘어? 내가 말하려던 건 이거였나…?’ 싶은 마무리가 되어버릴 때도 있다. 하지만 내가 5분 전에 무슨 생각을 했어도, 글 쓰는 그 순간에는 조금 다른 의견이나 감정이 생길 수 있으니까 시작과는 다른 마무리가 되어도 ‘발행’ 혹은 ‘예약 발행’을 누른다.


가장 글 주제가 떠오르지 않을 때는 책상 앞에 가만히 앉아서 “오늘은 뭘 쓰지?” 고민할 때다. 몇 시간 전까지만 해도, 아니 방금 전까지만 해도 분명 쓰고 싶은 게 있었던 것 같은데 갑자기 머릿속이 휑해지는 느낌.


앉아서 고민하기보다, 다른 무언가를 하고 있을 때 하고 싶은 말들이 더 많이 떠오르는 것 같다.


운동하는 도중에도, 사람들과 이야기하는 도중에도, 그냥 산책하거나 샤워하면서도 갑자기 쓰고 싶은 게 떠오른다. 하지만 그 감정은 한순간이라, 적어놓지 않으면 금방 사라질 것 같다는 생각을 했다.


오늘도 (미국은) 일요일 오전, 일어나자마자 쓰고 싶었던 글을 예약 발행해두고, 다른 주제로 한 편 더 쓰려고 했다가 글이 제대로 써질 것 같지 않아 그냥 운동하러 나왔다. 스텝밀을 타면서 땀 범벅이 된 와중에 쓰고 싶은 게 두어 가지 더 떠올랐고, 이건 또 몇 분 지나면 잊어버릴 것 같아서 바로 메모해 두었다.


역시나 늦은 오후 집에 돌아와 보니 그때 무엇을 쓰려고 했는지 까먹은 상태였고, 휴대폰의 메모 앱을 열어보니 아, 내가 ‘메모’에 대해 쓰려던 거였구나.


그래서 다시 생각하게 된 메모의 중요성. 예전에 자주 읽던 성공한 사람들의 작은 습관 중 하나가 메모하는 습관이라더니, 나도 이제 메모하는 습관을 조금씩 들여야겠다.

keyword
작가의 이전글링크드인은 비교가 될까 기회가 될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