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사실 지금도 “감정을 표현한다”는 말이 낯설다.
세 자매 중 첫째로, 가부장적인 집안에서 자랐다.
아들이 없다는 이유로 부모는 늘 죄인처럼 지냈고,
나는 아들 대신 무언가를 해내야 하는 존재였다.
그래서 감정은 언제나 가장 안쪽에 숨겨두어야 했다.
겉으로 꺼내어 보여주는 일은 거의 없었다.
그래서 누군가 내게 감정을 표현하라고 말할 때,
솔직히 속으로는 이렇게 생각한다.
“그걸 알면 뭐가 달라지지? 무슨 소용이 있지?”
나는 감정과 거리를 두고 살아왔다.
그런데 사람들은 의외로 나를 두고 “감정적이다”,
“공감 능력이 풍부하다”라고 말한다.
그럴 때마다 나는 혼란스럽다.
내가 정말 그런 사람일까?
그림을 그릴 때만큼은 조금 다르다.
그 시간에는 감정을 억누르거나 꺼내려 애쓸 필요가 없다.
아무 생각 없이 집중할 수 있는 그 순간 자체가
나를 치유하고 위로한다.
감정을 끌어내기보다, 감정을 소비하지 않아도 되는 시간.
그것이 내게 그림의 특별한 힘이다.
그리고 그림은 말하지 않아도 전해지는 힘을 가진다.
같은 그림을 보아도 각자 다른 기억과 감정에 젖어드는 일,
그것이 글이나 사진과는 다른 그림의 힘이다.
언어가 설명하지 못하는 부분을
형태와 색채가 대신 전한다.
무엇보다 그림은 나를 조금 더 들여다보게 한다.
내가 어떤 색을 좋아하는지,
어떤 느낌을 자주 그려내는지,
사람들이 내 그림을 보고 나를 어떻게 느끼는지.
그 모든 과정을 통해 나는 조금 더 나를 이해하고,
조금 더 나를 사랑하게 된다.
그림으로 감정을 붙잡는다는 건,
결국 나를 알아가는 또 다른 방식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