빈 냉장고에서 느끼는 희열
드라마에 자주 등장하는 텅 빈 냉장고. 그 안는 각과 열을 맞춰 진열되어 있는 음료수뿐.
반면, 도대체 뭐가 들었는지 가득 찬 냉장고. 문을 열면 뭐 하나라도 쏟아질 것 같은 냉동실. 작년 김치, 재작년 김치까지 들어있는 김치 냉장고 두 대. 도무지 냉장고에 내 것을 넣을 수가 없었다. 항상 테트리스 하듯 어떻게든 욱여넣었다. 냉장고 열어 놓는 시간이 길어지면 엄마가 빈자리를 만들어 넣고 재빨리 문을 닫으셨다. 이것이 내가 지금까지 요리와 담을 쌓고 산 이유 중 한 가지다. 내 것을 사서 넣어놓을 수 없을 정도로 꽉꽉 찬 냉장고. 사놓아도 엄마가 매 끼 해주시는 식사에 요리할 기회가 주어지지 않았고 그렇게 나의 재료들은 내 기억 속에서 잊혀지고 상하고 버려졌다. 아직도 냉장고에서 버려지길 기다리는 무언가가 있을지도 모른다.
요리를 하고 싶지 않았던 것은 아니다. 하지만 내가 뭘 하겠다고 하면 엄마는 자꾸 간섭하셨다. 자꾸 냉장고 속 다른 재료도 넣으라고 하셨다. 집에 오븐이 생겼던 20대 초에는 집에서 베이킹도 잠깐 했었다. 베이킹은 엄마의 영역이 아니므로 간섭에서 자유로울 수 있었다. 그 외에 식사라고 할만한 요리는 연중행사처럼 아주 가끔 하는 것이었다. 그 연중행사도 거의 파스타와 같이 엄마가 잘하지 않는 음식들 위주였기 때문에 이 나이 동안 한식이라곤 밥 짓는 것 말고는 제대로 해본 적 없는 애가 되었다. 엄마는 반찬도 잔뜩 해놓고 몇 주나 꺼내놓으셨다. 플레이팅? 그런 건 TV 속에나 등장하는 것이었다. 대부분의 음식은 냄비째 식탁에 올라오거나 매번 냉장고에서 그대로 꺼냈다가 그대로 덮어 다시 냉장고에 넣었다.
독립 후 나는 매일 냉장고를 턴다. 냉장고가 빈자리를 유지하게 끔 노력한다. 항상 채워져 있는 곳은 김치와 각종 장류를 넣어둔 냉장실 서랍과 냉동실이다. 주변 자취인들은 다들 냉동고 크기가 아쉽다고 했지만 나는 하나도 아쉽지 않다. 항상 채워져 있지만 새로운 것을 넣을 자리도 충분하게끔 정리하고 먹어버린다. 냉장고를 텅텅 비어있게 유지하려면 창의력이 필요하다. 냉장고에 뭐가 있는지 확인하고 어떤 조합으로 어떤 음식을 만들 수 있을지 생각해본다. 그리고 있는 식재료로 만들 수 있는 요리를 검색해본다. 재미있는 사실은 '이런 음식은 없겠지?' 하며 찾아봐도 거의 다 있다는 것이다. 예를 들면 '양배추 덮밥' 같은 것. 요리를 해 본 적이 손에 꼽으니 이런 덮밥도 있는지 처음 알았다. 다들 냉장고 속 재료로 별 걸 다 만들어 먹고 있었다.
11월 말 엄마의 텃밭에는 양배추들이 자라나고 있었다. 커다란 양배추를 한 통 반을 받아왔다. 그래서 12월 한 달 내내 양배추 요리를 많이 해 먹었다. 지금까지 한 양배추 요리들은 이렇다.
양배추 샐러드 (드레싱은 발사믹 식초+올리브 오일+꿀, 과일이나 그래놀라를 곁들인다.)
양배추 샌드위치1 (양배추를 채 썰고 계란후라이를 부친 다음 식빵에 케첩을 뿌리고 치즈와 함께 끼워먹는다.)
양배추 샌드위치2 (양배추를 채 썰어 계란을 풀어 양배추 계란부침을 만든다. 발사믹 양파 조림을 만든다. 치아바타를 반으로 갈라 양배추, 양파 조림, 치즈를 끼워먹는다.)
양배추쌈 (보쌈 대신 집에 있던 스팸을 물에 데쳐 먹었다.)
양배추 김치볶음밥
양배추롤 (찐 양배추에 대패삼겹살, 파프리카를 돌돌 말아 다시 익힌다.)
양배추 샥슈카 (혹은 에그 인 헬, 집에 있는 냉동 고기를 볶고 양배추와 각종 채소들을 넣고 볶은 뒤 토마토소스 넣고 마지막에 계란을 넣어 익힌다.)
양배추 떡볶이
양배추 부침개 (양배추와 집에 있는 다른 채소를 채 썰고 계란, 부침가루와 섞어 부쳐먹는다.)
양배추 덮밥 (양배추와 여러 채소들을 잘게 썰고 고추참치를 더해 볶아서 밥에 얹어먹는다.)
양배추 사골 라면 (마늘에 고기를 볶다가 양배추를 넣고 더 볶는다. 정량의 물을 넣고 스프와 면을 끓인다.)
세상에 양배추로 이렇게 다양한 맛을 낼 수 있다니! 독립 전에는 몰랐다. 엄마는 항상 양배추를 쪄 양배추쌈만 내어놓으셨다. 그래서 양배추를 받아온 초반에는 양배추 쌈만 먹다가 다른 게 먹고 싶어서 이런저런 시도를 하게 된 것이다. 집에 있는 재료들을 조합한 나만의 레시피도 있고 인터넷을 참고해 마음대로 바꿔 보기도 했다. 맛없는 요리는 없었다. 거의 한 그릇 요리 위주라서 생각보다 설거지도 많이 안 나온다. 밥 해 먹고 치우기까지 대체로 한 시간이면 된다.
이렇게 냉장고를 매일 털어도 상해서 버리는 식재료들이 생긴다. 일이 있어 본가에서 자주 저녁을 먹은 주간이나 생각보다 활용도가 높지 않아 버린 것들, 애초에 살 때부터 상태가 좋지 않았던 것들은 결국 음식물 쓰레기 행이었다. 그래도 열심히 털어서 이 정도라고 생각하니 위안이 된다. 앞으로는 버려지는 음식이 거의 없게 더 노력할 생각이다. 돈도 아끼고 쓰레기도 줄이고 맛있는 음식도 해 먹다니 냉장고 털이는 모두에게 이롭다.
전에도 말했듯이 내 요리가 생각보다 다 맛있어서 매일 스스로를 칭찬한다. '요리를 많이 해본 것도 아닌데 이렇게 서툰 칼솜씨로 맛을 낼 수 있다니 나는 못하는 게 없구나!' 덕분에 요리를 하면서 자존감이 올라갔다. 그리고 플레이팅도 신경 써서 한다. 귀찮을 땐 그냥 먹기도 하지만 예쁘게 차려먹으면 스스로에게 대접하는 느낌이 든다.
비어있는 냉장고를 보면 기분이 좋다. 매주 조금씩 장을 본다. 집에 있는 재료들을 떠올리면서 어울릴 만한 식재료가 뭐가 있을지 고민하고 어떤 요리를 할지 생각해본다. 그리고 딱 필요한 것들만 사둔다. 장을 봐와도 냉장고는 절대 가득 차지 않는다. 그렇게 비어있어도 하다 보면 또 새로운 요리가 탄생하기도 하고 새로운 조합을 찾아내기도 한다.
이러다가 나중에 요리책 쓰겠다고 설칠까 봐 겁난다. 그땐 부디 누군가가 등짝 스메싱을 날려주길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