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면 : 지금 물 올리러 갑니다
아마 한국인이라면 누구에게나 인생라면을 먹은 기억이 있을 것이다. 나에게 살면서 가장 맛있었던 라면이 무엇이냐 묻는다면 '물놀이 후 먹는 육개장 사발면'이라고 할 것이다. 그리고 한국에서 나고 자란 사람이라면 나의 의견에 대부분 공감할 것이다. 찬물에서 신나게 놀다가 입술이 새파래질 때쯤 나와서 덜덜 떨며 뜯는 육개장 사발면. 면이 얇아 금방 익을뿐더러 적당히 매콤해서 초등학생 시절, 어렸던 나와 남동생들도 맛있게 먹을 수 있던 그 육개장 사발면의 맛을 잊을 수 없다. 어쩌면 젖은 몸 위에 수건 하나 걸치고 입천장이 데이는 것은 신경 쓰지도 않고 몸부터 녹이는 그 순간이 좋았던 것일지도 모르겠다.
어떤 사람들은 라면을 끓일 때 양보할 수 없는 철학을 가지고 있다. 가끔 그 철학은 꽤나 완고한 것이어서 다른 취향을 가진 사람과 충돌하기도 한다. 라면에 대한 취향은 가장 기본적인 '면의 익힘의 정도'에서부터 시작된다. 그 외에 부재료를 넣는다/안 넣는다, 계란을 터뜨린다/아니다 등등 사소한 라면 끓이기에도 다양한 철학과 취향이 존재하는 것이다.
아무튼, 한국인과 인스턴트 라면은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가 아닐까?
'라면 : 지금 물 올리러 갑니다'
사실 집에 있는 책 중에 얇아서 부담 없이 골랐다. 이 책은 음식 에세이 '띵 시리즈'의 한 권으로 처음부터 끝까지 라면에 진심인 한 작가의 철학과 경험이 담겨있다.
우선 그녀의 라면에 대한 철학은 나랑 닮아있는데 바로 '라면은 아무것도 넣지 않은 것이 가장 맛있다.'라는 것이다. 라면은 라면 봉지에 나와있는 조리법대로 물을 넣고 시간을 지켜 끓이는 것이 가장 맛있다. 나는 시간을 재진 않고 면의 상태로 판단하는데 이 분은 나보다 더 하다. 면과 스프를 넣는 순간부터 3분 30초의 타이머를 설정한다니 말이다.
이 책은 라면과 본인의 인생의 일부를 함께 담았다. 전혀 연관이 없을 것 같은 경험에서도 라면과 연관 지어 이야기를 전달하는 이 책을 읽고 있자면 '이 사람, 라면에 진심이구나.'라는 생각이 먼저 떠오른다. 이쯤 되면 어떤 일도 라면과 연관 지어서 생각하는 것이 아닌가 싶다. 하지만 그게 억지스럽지 않아서 재미있다. 생각해보면 라면과 인생은 닮은 점이 있다. 흔하고 평범하고, 그러나 다양하다.
그런 이유에서 가장 마음에 들었던 대목을 소개한다.
"이건 일하는 거랑 같은 이치라고. 결국 기본이야. 기본을 잘해야 돼. 라면을 끓이고, 끓이면서 반성하는 거야. 이번에는 물이 적었다든가, 물을 끄는 타이밍이 늦었다든가, 라면의 상태를 꼼꼼히 살피지 않았다든가 하는 것을 돌이켜보는 거야."
- 열째, 물이 끓는 동안 마지막 팁이 있다면 中
이 책을 거의 읽어갈 때쯤, 오랜만에 육개장 사발면을 먹었다. 어릴 적 수영장에서 신나게 논 다음 먹는 라면만큼 맛있지는 않지만 책과 함께하는 것도 나쁘지 않았다. 아니, 평소보다는 맛있었다. 나중에 라면이 먹고 싶어지면 이 책을 읽어야겠다. 라면을 더 맛있게 먹기 위해서.
PS1. 읽고 있으면 라면이 먹고 싶어 진다는 리뷰가 많던데 사실이다. 잘못하면 야식으로 라면을 먹게 될 수 있으므로 조심할 것!
PS2. 한 권도 못 읽고 끝날지도 모른다고 걱정했는데 얇고 가벼운 책으로라도 스타트를 끊어서 다행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