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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햇살 Jul 04. 2019

프라이드 그린 토마토

세 가지 힘으로 본 인생영화

“점잖은 기독교도 여성이 임신까지 했는데 남편을 버리고 왜 저런 여자를 따라갔습니까?”


영화 속 하이라이트라 할 수 있는 재판 장면에서 잇지의 친구 루스에게 던진 검사의 무례하기 짝이 없는 질문이다. ‘점잖은 기독교도’라는 족쇄, ‘임신한 여성이 남편을 버렸다’는 질책, 격리, 배제 의도로 읽히는 ‘저런 여자’에 담긴 편견 가득한 말은 잘근잘근 씹어주고 싶은 이슈를 담고 있다.


중년 여성 에블린은 자신에게 무심한 남편에게 실망을 느끼지만, 퇴근하고 함께 저녁 먹으며 대화하는 단란한 가정을 지키려고 남편에게 맞추며 애를 쓴다. 맛난 음식 차려놓고 꽃단장하고 맞이한 남편은 식탁엔 앉지도 않고 음식 접시를 들고 TV 앞 소파로 직행, 스포츠만 들여다본다. 갱년기 우울증까지 있어 위축된 채 의욕 없이 사는 와중에 요양원에 있는 숙모를 방문하다가 거기서 우연히 만난 니니 할머니의 ‘잇지와 루스’ 이야기에 빠져들게 된다. 이야기는 1920년대 미국에서 가부장제의 질서에 따라 살던 루스가 기존 질서에 얽매이지 않고 자유분방한 잇지의 매력에 빠져들면서 변화하게 되는 과정을 그리고 있다. 요양원에 방문할 때마다 에블린도 이야기 속 인물들에게 영향을 받아 깨어나고 변화한다. 삶의 의욕을 되찾고 자기 비하에서 벗어나 독립된 인간으로 자신감 있게 살아가게 된 것이다.


영화는 시대 전복적인 사유를 대놓고 보여주고, 깨알같이도 보여준다. 누구나 가는 교회에 가지 않고, 결혼하지 않은 채, 바지를 입고, 눈치 보지 않고 저 하고 싶은 대로 사는 잇지의 모습에 매료되는 루스를 그린 것. 아버지나 남편의 도움 없이 여자 둘이 카페를 열어 일을 한 것. 흑인, 부랑자 등 당시 당연하게 차별받던 계급의 사람들과 아무렇지 않게 어울려 평화롭고 행복하게 사는 것이 대놓고 보여준 시대 전복의 증거다. ‘여성주의 영화’라고만 말하면 영화의 감동을 모두 담지 못한다. ‘프라이드 그린 토마토’를 나의 인생 영화로 뽑은 이유를 세 가지 힘을 중심으로 보여주고 싶다.    



인생이 사나운 얼굴을 할 때 필요한, 이야기의 힘


자존심 상해 나무 위에 올라간 어린 잇지를 내려오게 한 것은 오빠 버디의 ‘진주조개 이야기’다. (하나님이 조개 하나를 특별히 사랑하셔서 진주조개를 만드신 것처럼 오빠에겐 너와 같은 특별한 동생을 내려주셨다는 얘기) 잇지에게 그 이야기가 마음에 들어온 건 평소 오빠를 좋아하고 따랐기 때문일 것이다. 인생이 사나운 얼굴을 할 때가 많은 우리들에게도 상냥한 우화 한 두 개쯤 있으면 든든하다. ‘11월의 연못 이야기’는 어색하거나 심각한 분위기를 풀어주는 유머로 기능한다. 루스가 암에 걸려 죽기 직전에 비통해하는 잇지에게 재밌는 얘기를 해 달라며 ‘연못 이야기’를 요청하고 그 이야기를 들으며 편안한 얼굴로 그녀는 생을 마친다.

루스는 강해진다. “프랭크가 손찌검할 때도 고통을 참을 수 있게 해 주셔서 감사하다고 기도했지. 그러나 이제 난 달라졌어. 프랭크가 또 오면 기도 대신 맞서 싸우겠다고 아들에게 약속했어.”라고 말할 만큼. 루스의 변화와 궤를 함께 하며 눈에 띄게 달라지는 에블린의 에피소드는 시원한 홈런 같은 재미를 준다. 후반부에는 니니 할머니를 자신의 집에 모시려고 방을 직접 만들기도 하는데 남편이 절대 반대라고 말하자 “내게 절대라는 말 하지 말아요.” 라며 눈에 힘을 주는 장면이 압권이었다. 풍부한 이야기를 갖고 있는 영화는 힘이 세다.    



공간의 힘이 도모하게 한다.


뭔가를 도모하기 위해서는 공간이 필요하다. 방 한 칸도 좋고 어느 카페의 구석진 자리도 좋다. 뜻이 통하는 친구가 있고, 내가 나로 있을 수 있는 곳. 자신이 괜찮은 사람이 되고 좀 더 열심히 살아볼 마음이 나는 공간. 타인과 어울려 편안하면서도 신나는 일이 벌어지는 곳. 영화 속 ‘휘슬 스탑 카페’가 그런 곳인데 흑인을 차별하고 배제하는 시대 분위기에서도 흑인과 부랑자가 편히 앞마당으로 드나들며 밥을 사 먹고, 때론 얻어먹기도 하며 노동을 하는 해방구 같은 공간이다. KKK단의 습격을 받기도 하고 마을 사람들이 흑인에게 밥을 판다고 노골적으로 싫어했지만 잇지는 아랑곳하지 않고 되받아쳤다.

“피부 색깔을 논하기 전에 그 피부 속의 인간이 깨끗한지 더러운지 깨달으라고 해.”

루스가 아들을 낳자 ‘감사기도를 드려야겠군’이라고 말하는 동네 남자에게 “염병할, 고생한 건 루스야.” 들으면 속이 뻥 뚫리는 잇지의 말. 잇지라면 어디에 있건 그렇게 했겠지만 좋은 공간에서는 있는 그대로가 눌리지 않고 더욱 살아난다. 그러면 살맛도 나는 법.

‘바그다드 카페’가 떠올랐다. 무능하고 게으른 남편을 쫓아낸 카페 주인 ‘브렌다’ 앞에, 남편에게 버림받은 육중한 몸매의 ‘야스민’이 찾아온다. 마치 니니 할머니를 만난 에블린 같다. 자신의 가장 아름다운 모습을 발견해가는 소중한 시간들이 쌓여 아무런 희망이 보이지 않던 '바그다드 카페'도 따스하고 행복한 시간이 깃들게 된다. 지금 우리 주변에 보이는 여자들의 언어가 숨을 쉬는 곳, 망원동 ‘오네긴 하우스’, 청담동 ‘두잉’, 한남동 ‘울프 소셜 클럽’이 있다. 21세기 루스, 잇지, 에블린, 브렌다와 야스민이 드나들고 있을 것이다.    



연대의 힘, ‘비밀은 소스에 있다.’


잇지와 그의 친구들은 가부장, 아내 폭행, 흑인 혐오를 대표하는 루스의 남편 프랭크에게 함께 대항한다. 루스의 아들을 빼앗으러 왔기 때문이다. 그러다 그가 죽게 되자 마침 다음 날이 돼지 잡는 날이라 시체를 돼지 잡은 솥에 넣고 삶아 감쪽같이 처리한다. 그리곤 의심을 품고 그의 시체를 찾으러 휘슬 스탑 카페에 죽 치고 있는 프랭크 동네 보안관에게 맛있는 소스를 발라 바비큐로 먹인다. 비밀을 모르는 보안관은 ‘오늘따라 너무 맛있다’며 네 그릇이나 먹어치운다. 이제 시체는 완전히 없어진 것이다. 식당 종업원 십씨는 ‘맛의 비밀은 소스에 있다’며 의미심장하게 웃는다. 살인과 식인 같은 끔찍한 소재를 이처럼 통쾌하고 유쾌하게 표현할 수 있다니. 게다가 여자들만의 연대가 아닌 남녀 통합 연대라 더 힘이 실리고 돋보인다. 친구들은 모두 모여 살코기를 바비큐로 굽고, 나머지는 솥에 넣어 삶기로 의논하고, 손은 흑인 빅 조지에게 빌렸다. 프랭크가 아기를 빼앗아 가려고 완력을 쓰자 냄비로 때려죽인 것은(죽일 의도는 없었다.) 흑인 십씨다. 루스 남편이 조지아에서 친구들을 몰고 와 루스를 협박할 때도 그를 내쫓은 건 잇지를 좋아하는 보안관과 동네 젊은이들이었다. 연대는 동사다. 모두 힘을 합쳐 행동했고 평화를 되찾았다.


극장 문을 나설 때 기운이 나고, 강해졌다는 느낌이 드는 영화가 있다. ‘프라이드 그린 토마토’가 그렇다. 그러고 보니 내가 자발적으로 혼자 본 첫 번째 영화다. 아마존 전사 토완다를 알게 된 에블린은 그의 기를 받아한 거침없이 행동한다. 이에 비하면 ‘여자 혼자 영화보기’라는 나의 변화는 별 것 아니지만 변화란 대개 미미한 것에서 출발하지 않는가. 삶의 변화와 함께 한 영화가 인생 영화다. 가정을 지키기 위해 강의장에 가던 발걸음을 체육관으로, 초콜릿을 물던 입엔 생야채를, 보기에도 얌전한 치마는 운동복 바지로 바뀌어 있던 똥똥한 아줌마 에블린과 함께 외친다.


“토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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