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폭풍우 속에 뛰어든 쪽배였다

혁신, 게다가 중학교에 적응하기

by 햇살

고통이 빛이 되는

삶은 내 것이 아니길 바랐다

강성은, <환상의 빛> 중에서

어쩐지 전입교사 오리엔테이션 때 들은 ‘천 대 사건’이 으스스하더라니. 새 학기가 시작되는 주의 금요일부터 한 건, 다음 월요일에 새로운 한 건. 우리 3학년에서 해결해야 할 학교폭력이 연달아 터졌다. 작은 시골 동네를 발칵 뒤집은 일명 ‘천 대 사건’은 내가 이 학교에 오기 한 해 전 가을 비오는 밤, 공설 운동장에서 일어났다. 학교엔 남자 선배가 후배들을 이유 없이 때리는 악습이 전통이라며 이어져오고 있었나본데 쇠파이프인지 몽둥이인지로 한 아이를 무지막지하게 때린 것이다. 그때 가해자 중 우두머리가 3월 첫주 학폭의 주인공이었다.


담배를 피운 냄새 폴폴 풍기며 수업 시작 10여분씩 늦게 들어온 아이들과 체육 시간이 끝나고 샤워까지 한 후 머리를 수건으로 탈탈 털며 여유 작작 20분이 넘어 들어오는 아이들, 사라져서 찾으러 가면 옥상에 있다가 왔다는 남녀 한 쌍, 칠판에 뭔가를 적고 돌아섰는데 한 애가 없어져 복도에 나가보니 곧 있을 점심시간을 위해 복도에 갖다놓은 급식차와 급식차 사이에 빗자루를 총처럼 들고 혼자 숨고 구르며 전쟁놀이를 하는 아이도 있었다. 복도에서 그러는 건 양반이었다. 수업 중 교실 안 교사가 있는 앞에서 친구를 목마 태워 돌아다니기까지 하는, K중학교는 한 가지만으로도 기함할 일들을 아무렇지 않게 벌이는 아이들이 득시글대는 곳이었다. 나는 함정에 빠진 느낌이었다. 혁신학교라 배움의 공동체 수업을 한다며 책상은 학생들끼리 양쪽으로 마주보는 대형이었는데 원래는 서로의 의견을 주고 받으며 토론식으로 수업을 하라는 취지였지만 공부에 관심이 없던 아이들에겐 서로 얼굴 보며 떠들기 딱 좋은 구조였다. 실제로 교사인 나는 가운데에서 수업을 하고 있는데 왼쪽 끝의 아이가 오른쪽 끝의 아이에게 큰소리로 잡담을 하는 일이 예사였다. 제지를 시켜도 두더지잡기 게임처럼 돌아가며 떠들어서 결과적으로 계속 웅성대는 속에서 수업을 하는 셈이었다. 대체 이게 뭐지? 나는 어디서부터 손을 써야 할지 속수무책이었다. 야심찬 수업 준비는 허무하게 아이들 발아래 으깨졌다. 때리고 싸우는 남자아이들과 패를 갈라 감정싸움에 날이 선 여자애들을 번차례로 불러다 쉬는 시간에도 오줌을 참아가며 집단 상담을 하고, 갈등중재를 했고 끝나지 않았는데 종이 치기 마련이라 다음 시간에 다시 오라하고 후다닥 교실로 들어가 슬픈 얼굴로 두더지잡기 게임을 했다. 한 가지가 해결되기도 전에 다른 일이 꼬리를 물고 이어졌다. 그러는 사이 회의며, 연수며, 공문이며 몸을 거기 채워 넣어야 하는 일도 끊임이 없었다. 누워도 잠이 오지 않는 날이 많았으며 급기야 매일 꼬박꼬박 날이 밝는 게 무서워지기 시작했다. 월요병이 뭔지 몸으로 알았다. 일요일 오후가 되면 가슴이 답답하고 어지러웠고 실제로 일요일 밤 눈을 감아도 떠도, 앉아도 서도 어지러워 도저히 견딜 수가 없어서 응급실에 갔는데 이석증이라고 했다. 지난 주 수학 선생님은 병원에 갔더니 공황장애라고 했다던데. 이러다 전부 환자 되겠어. 다시 으스스해졌다. K중학교에 초빙교사로 신청하여 간 첫해, 정확하게는 거길 가기로 결정한 12월부터 3월 첫 주 목요일까지는 의욕과 자신감, 희망으로 부풀어 있었다. 3월 첫 주의 금요일 사건으로부터 밀려오던 파도는 나를 휩쓸었고, 밀려가며 내동댕이치고 다시 밀려오면서 정신없이 뒤집어 물 먹이고를 그해 내내 계속했다. 나는 폭풍우 속에 뛰어 들었던 쪽배였고 어쩌다 보니 난파선이 되고 말았다.


경력 16년이 될 동안 꾸준히 교과 모임하며 쌓은 각종 수업 방법과 노하우, 아이들을 있는 그대로 이해하고 마음을 움직인다는 상담을 배우면서 다져진 실력, 나름 중1부터 고3까지 두루 가르치면서 능숙하게 아이들을 다룰 수 있다고 자신했던 나는 철저히 무너져 좌절하고 수치심과 자괴감에 범벅이 되어 무기력해졌다. 교무실로 좀 오라고 아이를 부르면 선생님이 오시라고 되받고, 수업 마치는 종이 쳤지만 아직 끝내지 않았는데 그냥 일어서서 나가는 아이를 불러 세우니 쉬는 시간은 내 시간이니 내 맘이는 답변이 돌아왔다. 어디서부터가 아이들과 합의되는 상식선인지 흔들려 혼란스러웠다. 고통으로 몸부림치며 교사회의 때 불을 토하듯 아이들에 대해 성토하고 나면 교장 선생님은 ‘우리 학교는 적응하는데 1년이 걸려요.’ 하고 말했다. 모두가 똘똘 뭉쳐서 궁리를 해도 될까 말까 같은데 터져대는 사건으로 다들 내 발등의 불을 끄기 바빴다. 이렇게 하면서 사람이 어떻게 살지? 나는 고등학교에서 왔으니 중학교 부적응 내신을 내고 내년엔 다른 학교로 갈 거야. 힘들 때마다 나는 결심했다.


그해 3학년을 졸업시키고, 나는 다른 학교로 가지 못했다. 다음해 2학년에 올라온 애들을 우겨서 맡았다. 2, 3학년은 작년과 비슷했고 1학년은 좀 순했기 때문이다. 부장과 담임 겸임하던 것도 죽어도 못 한다 앓는 소리를 하여 담임만 맡았다. 다행히 교장급의 고경력자 선생님이 전입 오셔서 든든했다. 내 상식선에서 볼 때 어느 정도 정상적인 행동을 하는 애들이 많았고 내가 하는 수업과 학급 운영 방식이 긍정적으로 받아들여지는 경험을 통해 여유가 생겼으며, 그간 아이들로부터 상처받은 선생님들이 모여 마음을 풀어내는 정기적 공부모임을 만들어 숨통이 트였다.


사람이 죽으란 법은 없어서 아이들이 극악을 떨면 선생님들끼리는 사이가 좋거나 이도저도 아닐 땐 교장, 교감 선생님이라도 좋거나, 견딜 수 있도록 뭐 하나는 괜찮은 것이 학교가 굴러가는 비밀이다. 아이들이 워낙 세서 그랬는지 선생님들이 다들 착하고 사이가 좋았으며 교장, 교감 선생님도 꽤 민주적인 분들이었고 말이 합리적으로 통했다. 전국의 국어교사가 모인 모임에 가서 선생님들이 각자의 힘들었던 경험을 토로할 때 나는 불행인지 다행인지 꿀리지 않았다. 내 말에는 경험에서 나온 힘이 있었고 견디었던 과정에서 얻은 지혜를 나눌 수 있었다. 자신감이 차오르는 시기가 가장 오만해지는 위험한 순간임을 알았고 겸손의 미덕을 품었다. 방학에 나만의 시간이 생겼을 때는 아이들의 이해할 수 없는 행동 속에 담긴 깊은 상처와 인정과 사랑에 목마른 거친 아우성의 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아이들 자체가 문제의 핵심이 아니란 걸 알고 있었다. 동네는 경제적으로 힘든 가정이 많았고, 아이들은 정서적 안정감, 세심한 돌봄과 사랑에 결핍이 있었다. 하지만 최전선에서 매일 아이들을 마주 대하면 둘러싼 환경을 떠올려 아이들을 너그럽고 이해심 깊게 바라보기엔 나의 내공은 부족했다. 1년 만에 학교를 옮기려던 나는 어느새 학교 만기 5년을 채우고 올해 지역을 옮겨 새로 발령을 받았다. 5년간 내 몸부림의 세월은 다른 학교 선생님들에겐 공부거리가 되어 강의 요청이 종종 있었고, 나는 사는 동안 조금이라도 세상을 나아지게 하겠다는 사명서의 한 귀퉁이를 채운 거라고 스스로를 북돋을 수 있게 되었다. 함께 근무했다가 각자 학교를 떠나서도 매달 만나 독서토론을 이어가는 좋은 동료들을 얻었다.


이렇게 결국, 고통은 빛이 되고야 만다. ‘아픈 만큼 성숙해지’거나 ‘필사즉생 필생즉사’가 어쩔 수 없는 인생의 진리임을 살면 살수록 확인하게 되는 일이 많다. 굳이 고통이 빛이 되는 삶을 추구하고 싶지도 않고 나의 일이 아니길 바라는 마음, 더 솔직하게는 나만은 아니길 바라는 마음으로 살았다. 그러나 고통이 빛이 된다는 건 ‘비가 오고 눈이 내리는 일’처럼 내 의지와 무관한 경우가 더 많다. 나는 난파선이 되었다가 사이사이 수리를 해서 제법 튼튼한 배로 다시 바다에 나갔었다. 그러다 돌아와 지금은 항구에 잠시 배를 묶었다. 휴직을 하고는 여유가 생겨 소망을 품어 본다. ‘다음에 바다에 나갔을 때는 파도와 맞서지 않고 파도를 타 넘는 서퍼가 되고 싶다’고.

keyword
이전 05화수업 중 훅 들어왔다, 선생님 메갈이에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