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실외로 나가 조금만 왔다 갔다 하면 올려 묶은 머리카락 속이 뜨끈뜨끈, 콧잔등에 땀이 송골송골, 골도 없는 가슴 사이를 타고 주르륵 땀이 흐른다. 온몸이 끈적끈적하다. 기상청 통계를 찾아보니 올 8월 들어 평균기온은 29.3도에서 31.8도에 달하고, 최고기온은 36.2도였다. 이런 날 최고 짜증 유발 요인은 내가 손수 입은 브래지어다. 여자들은 설명하지 않아도 알 것이다. 한여름 브라 감옥의 끔찍함을. 벗으면 되는데 벗을 수 없는, 나에게 가장 마지막 남은 코르셋, 브래지어.
나의 브라 역사가 있다. 브라를 하기 시작한 중학생 때부터 대학 때까지는 와이어가 가슴을 받쳐준다는 디자인이 대세였다. 가슴이 압박되는 게 불편하고 운동을 좋아하는 나에게 스포츠브라는 해방이었다. 중고 시절엔 가슴이 큰 게 부끄러운 분위기였는데 성인이 된 이후 어느 날부터는 섹시 심벌이 되고 섹시하다는 말이 칭찬인 분위기가 되면서 뽕브라가 유행이었다. 섹시하다고 하면 좋아서 웃는 연예인은 예능에서 주로 보았는데 그게 도무지 칭찬같이 생각되지 않았다. 75AA 사이즈 브라도 윗가슴 부분에 공간이 남는 나는 원더브라라는 이름의 브라를 알게 되어 평균 수준의 옷테를 유지하며 지냈다. 평균이 되는 건 중요한 나였나 보다.
패션은 얼어 죽을. 여름만 되면 가장 싫은 게 브라를 해야 한다는 사실이었다. 누가 억지로 하라고 하지 않았지만 하지 않기엔 스스로가 좀 민망하고 남의 시선이 신경 쓰이는 그것. 그것을 내가 갖고 있다는 게 너무 거추장스러웠다. 스포츠 브라의 해방 가지고는 성에 차지 않았다. 가슴이 납작해도 부끄러울 게 없었지만 젖꼭지가 튀어나와 보이는 게 문제였다. 신경이 쓰여 가리지 않을 수가 없었다. 스킨 브라, 유두 패치가 최근 그나마 대안이다.
하지 않기엔 신경 쓰이는 그것에는 화장도 있었다. 특히 직장에 갈 때 안 하면 예의가 아닌 느낌. 코로나 때 마스크를 매일 하게 되면서 화장을 하지 않고 출근하는 습관이 들었다. 맨 얼굴로 다니기 시작했더니 출근 준비시간도 줄어들고 홀가분하고 편했다. 그런데 왜 노브라만은 안 되는 것인가?
밥 먹다가 남편한테 내가 브라를 안 하고 다니면 어떨 거 같냐고 물었다. 남편은 별로일 거란다. 왜 그러냐니까 다른 여자가 그러고 있으면 자기는 민망해서 눈을 돌릴 거 같다고 했다. 왜 민망하냐고 더 꼬치꼬치 물었더니 ‘성기를 내놓고 있는 것 같다’는 거다. 충격이었다, 한 번도 그렇게 생각해보지 않았는데 보통의 남자들 생각인 거 같았고 나도 인식은 못했지만 비슷한 생각이 깔려 있어서 젖꼭지가 티 나게 옷을 입는 게 꺼려졌던 게 아닐까 싶었다.
노브라로 검색을 해봤다. 2018년에 불꽃페미액션이라는 여성단체에서 남성의 반라 사진은 삭제하지 않고, 여성의 반라 사진만을 음란물로 판단하여 사용자의 동의 없이 삭제한 것에 항의하여 한국 본사 앞에서 상의 탈의 시위를 한 기사가 눈에 띄었다. ‘여성의 신체 사진만 음란물로 규정되는 것은 여성을 성적 대상으로만 보는 것이기 때문에 명백한 여성혐오’라고 주장했고, 페이스북은 사과하고 사진을 다시 게시했다. 댓글 반응을 봤더니 내 남편처럼 여성의 가슴 노출이 성적으로 느껴진다는 말이 많았다. 불꽃페미액션의 용감한 여성들이 많아지면 해결되는 일인지는 모르겠다. 여성의 가슴을 성기로 느끼는 남자들이 같이 줄어들어야 한다. 최근에는 남자용 유두 패치도 나오고 많이 팔리는 걸로 알고 있다. 남녀 모두 젖꼭지를 가리는 흐름이라 하향 평준화된다는 생각에 찝찝하다.
오전 5시 반 경 종종 달리기를 한다. 브라 때문에 더워 죽겠다는 나에게 친구는 노브라로 있어도 아무도 안 본다고 했다. 시간이 일러 사람도 별로 없고 달리면서 휙 지나가는 데다 각자 자기 운동에 몰두하지 남에겐 관심이 없을 게 분명해서 하루는 노브라로 나가서 뛰어 보았다. 모든 게 예상대로였다. 나는 너무 시원했고 해방감이 느껴졌다. 소심한 해방감이지만 이런 기분 늘려보고 싶다. 사회적으로 형성된 시선을 개인만의 노력으로 극복할 수 있을 것 같진 않지만 남들의 시선이 아닌 내 욕망에 집중하려는 노력은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