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무 번째 줄 6712-6742번 서랍
엄마의 대답은 내 취기를 멈춰 세우는 역할을 했다. 새카만 물음 뒤엔, 내가 늘 두려워했던 ‘버려짐’에 대한 공포가 남는 게 아니라 오장육부가 뒤틀리는 듯한 ‘분노’가 자라났다. 수능 전 날까지 그 남자는 엄마에게 바람을 피우고 있다는 걸 알고 있다며 얼토당토않은 말로 수시로 위협을 당했다 말했다. 그러더니 엄마는 지금까지 내게 말 못 한 일들을 내게 들려주었다.
‘아버지’라는 이름의 그 남자는 대단한 인물이었다. 틈나면 이 집 저 집에 살림을 차리는, 술에 취해 집에 들어오면 항상 머리맡에 앉아 식도를 들고서 엄마를 위협하는 사람. 다마스에 우리 남매를 태운 날도 새살림을 차린 집에 우리를 데려가려던 날이라 말했다. 이 밖에도 내가 전혀 알지 못하는 일이 수도 없이 많았다.
엄마는 우리가 성인이 될 때까지만 참고 살자는 마음으로, 늘 그 남자를 받아주었다 한다. 그런데 집을 나가기 전 날, 나와 동생이 그 남자를 막아내는 걸 보고서야 비로소 집을 나설 용기가 생겼다고. 그날만큼은 네 아버지가 겁나지 않았으며, ‘정말 이 사람과 끝이구나’라는 마음이 들었다고 했다.
굉장히 평온하게 아무렇지 않게 말하는 엄마를 보며, 집에 소홀히 했던 내 모습을 떠올렸다. 엄마 혼자 힘들었겠다는 생각과, 죄송한 마음, 그리고 앞으로 엄마는 내가 지켜야겠다는 다짐을 끝으로 밤새 둘이 술을 마셨다.
거울을 보면 그 남자가 생각났다. 엄마가 말해준 그 남자의 일들과 행동들이 생각나서. 한 때는 내 온몸의 피를 빼서 새로 채우고 싶다는 마음이 어디 한 군데 자라곤 했다. 그 남자의 말투가 내 입에서 나올 때면 입술을 꽉 깨물거나, 어쩌다 연락이 오는 날엔 뒤틀린 분노가 이리저리 날뛰며 나 스스로를 괴롭혔다.
왜 나는 그 남자의 자식이어야만 하는지, 왜 나의 아버지인지 모든 게 원망스럽기만 했다. 엄마와의 술자리가 잦아질수록 분노는 점점 커져갔고, 분노는 언제든지 과녁을 향해 쏠 준비가 된 ‘장전된 총’이 되었다.
그들의 이혼 절차가 시작되고, 막냇동생의 친권 및 면접 교섭 등으로 합의가 잘 되지 않는 무렵에 엄마는 내게 “본가에 가거든, 네 아빠를 조금 설득해 봐”라는 말을 자주 했다. 그 남자와 말 한마디도 섞기 싫은 와중에 설득이라니. 정말 죽기보다 싫었다. 그러나 해야 했다. 엄마는 늘 막내를 그리워했으므로.
2주에 한 번 방문하던 본가는, 시간이 갈수록 엄마의 빈자리가 커져가는 듯했다. 정리 안된 어수선한 집과, 남자들만 사니 집이 이 꼴이라며 혼잣말을 중얼거리는 그 남자, 막냇동생은 울음의 빈도가 잦아졌다.
엄마가 부탁한 설득을 위해 나는 그 남자와 대화를 해야만 했다. 그러나 내 입에서 나온 말들은 하나같이 가시가 빼곡히 박힌 날 가로 운 말들 뿐이었다. 이제 슬 엄마랑 동생을 만나게 해줘야 하는 게 맞지 않냐며, 왜 만나지 못하게 막고 있으냐고, 아버지가 뭘 그렇게 잘했는지, 나는 본인이 무슨 짓을 해왔는지 다 들었다며, 사실 말이 아니라 악다구니를 썼다는 표현이 더 맞을 정도로 말을 쏟아냈다.
그때부터는 전쟁이었다. 서로를 죽일 듯이 노려보고, 말다툼을 하고, 끝끝내 그 남자는 내게 먹던 커피를 집어던졌다. 커피가 온 사방으로 튀는 걸 보자, 어릴 적 늘 두려워했던 모습들이 떠오르며 나는 잠시 주춤했다.
무언가 부부사이에 뜻대로 되지 않으면 집 안 곳곳을 박살 내던 모습, 달리던 차 안에서 고래고래 소리 지르며 엄마를 위협하던 모습, 분노에 못 이겨 방문을 부술 듯 닫던 모습 등 어릴 적 두려워했던 모습들이 서랍 속에서 물 밀듯 터져 나왔다. 몸이 덜덜 떨려왔지만, 어느 순간 내 손엔 총이 들렸다.
그는 본인이 무엇을 만들었는지 알까. 그는 세상에서 가장 각진 모서리를 만들어 낸 사람이었다. 당신을 부수기 위해 잘 다듬은 모서리를 세워야 했다. 평생을 품고 살아온 모서리를 이제 당신에게 꽂아야 한다.
이제 당신에게는 더 이상 때릴 아내도 없거니와, 당신의 행동으로 두려움을 느끼던 어린 딸은 없다.
“나는 당신이 너무 싫어, 내 아버지인 게 너무 싫어”
장전된 총을 들고 당신을 겨눈다.
“당신이 죽고서도 눈물 한 방울 안 흘릴 거야, 그렇게 알아”
당겨진 방아쇠는 당신에게 대못을 박았다.
“절대 울지 마라, 눈물 한 방울도 흘리지 마라 내가 원하는 바다.”
나와 그 남자의 싸움 이후로는 자연스럽게 막내가 격주로 한 번 엄마와 만날 수 있게 되었다.
그리고 그 남자는 새로운 여자를 만나 함께 살기 시작했다. 동생들에게 ‘엄마’라고 부르라 말하며.
동생들은 또다시 엄마가 둘인 인생을 살게 됐다. 엄마가 집을 나온 지 3개월 만에 벌어진 일이었다. 엄마는 아마 전부터 만나던 사이일 거라며, 밤이고 낮이고 누군가와 통화를 열심히 하더니 기어코 집에 데려왔다며 말했다.
또다시 분노가 치밀었다. 정말 진심으로 세상에서 사라져 버리길 기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