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감은 틀리지 않는다> -by줄리언 반스-
영국 현대문학을 대표하는 작가 줄리언 반스.
최근 여든 번째 생일을 맞으며 신작 소설 <떠난 것은 돌아오지 않는다>를 출간했다. 40여 년간 작가로서 끊임없이 탐구해 온 주제는 사랑과 상실, 역사와 진실, 기억과 삶 등이다. 그는 이번 신작 소설에서도 자신만의 시선으로 기억의 불확실성과 삶에 대해 응시한다. 자신의 생전 마지막 책이 될 것이라 선언한 만큼, 그가 이전에 출간해 온 작품들을 경유하며 반복해 온 질문들이 이 작품 안에서 다시 소환될 것이라 짐작된다. 그의 대표작이자 2011년 맨부커상을 안겨준 <예감은 틀리지 않는다>를 지금 주목하는 이유이다.
줄리언 반스의 소설을 관통하는 문제의식은 기억과 시간 그 자체라기보다, 그 위에 세워진 이야기들이 과연 얼마나 신뢰할 수 있는가라는 질문에 가깝다. 그의 작품에서 과거는 결코 확정된 사실로 남아 있지 않다. 기억은 진실을 보존하기보다, 현재의 삶을 설명하기에 가장 적절한 형태로 선택되고 재구성된다. 반스는 이 불안정한 기억과 서사의 틈을 따라가며, 우리가 당연하게 믿어온 판단과 확신들이 얼마나 쉽게 흔들릴 수 있는 ㅣ것이 기반 위에 놓여 있는지를 끈질기게 드러낸다.
이러한 문제의식은 <예감은 틀리지 않는다>에서 가장 선명하게 드러난다. 이 소설의 진짜 놀라움은 기억이 왜곡된다는 사실 자체에 있지 않다. 그런 사실은 이미 널리 알려져 있다. 반스가 끝까지 밀어붙이는 질문은 다르다. 우리는 왜, 그리고 어떻게 그 불확실한 기억 위에서 스스로를 정당화하며 살아가는가. 이 작품은 기억의 불확실성을 지적하는 데서 멈추지 않고, 그 불확실성을 이용해 자신을 보호하는 인간의 태도, 다시 말해 자기기만이 작동하는 방식을 집요하게 추적한다는 점에서 한 단계 더 나아간다.
소설의 화자인 토니 웹스터는 처음부터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 그의 기억은 파편적이지만, 그 불완전함을 스스로 인정하는 태도를 유지한다. 그래서 그의 서사는 성실하고 일관되며 그럴듯해 보인다. 독자 역시 자연스럽게 그의 감정과 판단에 동조하게 된다. 문제는 바로 그 지점이다. 토니는 사실을 숨기지 않았을 뿐, 그 사실들을 자신에게 유리한 방식으로 배열하고 있다.
그는 이렇게 말한다.
“그땐 어렸고”, “오래된 일이고”, “의도는 없었고”, “베로니카와 그의 가족 탓이고”, “정확히 기억나지 않지만”, “몰랐다”.
책임을 미루고 자신을 보호하는 이야기, 곧 자기기만이다.
이 자기기만이 가능해지는 조건은 시간이다. 우리는 흔히 시간이 지나면 감정이 가라앉고 판단이 객관화되며 기억이 정리된다고 믿는다. 그러나 반스가 그리는 시간은 그렇지 않다. 시간은 선형적으로 흘러가며 진실을 정리해 주지 않는다. 기억은 되돌아오고, 덧붙여지고, 삭제되며 재배열된다. 어쩌면 인간이 스스로에게 유리한 이야기를 만들 수 있을 만큼 충분히 기다려 주는 것. 그래서 시간이란 망각의 원인이 아니라, 망각을 정당화하는 논리가 되며, 시간이 흐를수록 자기 합리화는 더 정교해진다.
토니의 기억 속에서 베로니카와 에이드리언은 이러한 자기기만을 유지하기 위해 배치된 인물들이다. 베로니카는 끝내 이해되지 않는 타자로 남는다. 그녀는 관계 실패의 책임을 떠맡는 존재가 된다. 토니가 베로니카를 설명하는 언어 안에는, 두 사람의 관계에서 해소되지 못한 좌절과 열등감이 고스란히 남아 있다. 이 소설은 타인을 말한다는 행위가 얼마나 쉽게 편견을 만들어내는지, 그리고 그 편견이 얼마나 그럴듯한 얼굴을 하고 있는지를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에이드리언의 경우는 조금 다르다. 토니는 그와 자신을 노골적으로 비교하지 않는 척하지만, 이미 구도는 분명하다. 에이드리언은 죽음을 선택한 사람이고, 자신은 살아남아 삶을 지속한 사람이다. 이 대비 속에서 토니는 은근한 비교우위를 확보한다. 에이드리언은 카뮈의 철학을 이해했지만 시지프가 되지 못했고, 설명되지 않는 방식으로 삶을 끝낸 인물로 남는다. 그에 비해 자신의 삶은 더 성숙하고, 더 현실적이며, 더 책임 있는 선택의 결과처럼 배치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토니는 끝내 하나의 감정을 해소하지 못한다. 바로 “전혀 감을 잡지 못한” 불편한 예감이다. ‘예감한다’는 말은 진실에 가까워지는 감각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알았다고도 몰랐다고도 말할 수 없는 중간지대에 머무는 상태다. 판단하지도, 행동하지도 않았기에 책임을 늦출 수 있는 자리. 토니가 반복해서 머무는 지점이다. 그는 예감이 틀리지 않을 것이라 믿어왔지만, 소설은 바로 그 믿음 자체가 자기기만이었음을 드러낸다.
여기서 등장하는 개념이 ‘축적’이다. 에이드리언의 메모에서 처음 등장하지만, 곧 소설 전체를 다시 조직하는 해석의 열쇠가 된다. 축적이란 말과 침묵, 선택과 방관이 시간 속에서 연쇄적으로 쌓여 만들어내는 책임의 총합이다. 삶이란 계산 가능한 총계이며, 되돌릴 수 없이 누적된 결과라고 생각한 에이드리언은 그 총계를 감당하지 못한 순간, 죽음을 선택했다.
문제는 토니가 이 축적의 범위를 자기 삶까지 포함해 이해하는 순간이다. 그때까지 유지되던 자기기만은 붕괴된다. 소설의 원제 the sense of an ending. 결말의 감각이란 결국 거대한 혼란이었던 것일까?
의도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늦게 알았다는 이유로 책임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 직접 가해하지는 않았지만, 완전히 무관하지도 않은 책임은 여전히 유효한가? 이 질문 앞에서 등장하는 것이 500파운드다. 그것은 배상이 아니라, 책임에 대한 비용이다. 그만큼의 책임에서 자유로울 수 없음을 증명하는 액수다.
이 소설은 독자를 토니의 자리에 앉힌다. “토니가 잘못했다”는 판단으로 끝나지 않는다. 대신 이렇게 묻는다. 나 역시 토니일 수 있지 않은가? 우리는 모두 그렇게 살아오지 않았는가?
소설 <예감은 틀리지 않는다>는 기억의 문제가 아니라, 기억을 대하는 인간의 윤리에 관한 소설이라고 말할 수 있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