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란 돌-
짧은 행간 사이에 배어 있는 수많은 서사와 시인의 섬세한 사유를 놓치지 않고 천천히 따라가다 보면, 인간의 욕망이 무엇인지 이해하고 공감하며 그 욕망으로부터의 좌절과 상처를 희망과 아름다움으로 품어 낼 수 있게 된다.
죽음, 불안, 육체와 영혼, 피와 살, 빛과 그림자, 어둠, 상실, 고통 등 시 전반에 반복되는 시어들을 통해 한강 작가 특유의 문학적 정서를 느낄 수 있었던 시집이다. 침묵과 절제를 통해 인간 내면의 깊은 고통을 대면함으로써 탄생과 소멸, 상실과 회복이라는 인간 존재의 본질에 대한 근원적 고민을 던진다. 60 편의 작품 중 <파란 돌>을 감상해 본다.
<파란 돌>
십 년 전 꿈에 본
파란 돌
아직 그 냇물 아래 있을까
난 죽어 있었는데
죽어서 봄날의 냇가를 걷고 있었는데
아, 죽어서 좋았는데
환했는데 솜털처럼
가벼웠는데
투명한 물결 아래
희고 둥근
조약돌들 보았지
해맑아라,
하나, 둘, 셋
거기 있었네
파르스름해 더 고요하던
그 돌
나도 모르게 팔 뻗어 줍고 싶었지
그때 알았네
그러려면 다시 살아야 한다는 것
그때 처음 아팠네
그러려면 다시 살아야 한다는 것
난 눈을 떴고,
깊은 밤이었고,
꿈에 흘린 눈물이 아직 따뜻했네
십 년 전 꿈에 본 파란 돌
그동안 주운 적 있을까
놓친 적도 있을까
영영 잃은 적도 있을까
새벽이면 선잠 속에 스며들던 것
그 푸른 그림자였을까
십 년 전 꿈에 본
파란 돌
그 빛나는 내(川)로
돌아가 들여다보면
아직 거기
눈동자처럼 고요할까
십 년 전 꿈에 본 파란 돌이 아직 그 냇물 아래에 있는지 화자인 나는 궁금하다. ‘꿈’은 현실이 아닌 비현실, 무의식의 세계이다. 맑고 투명하고 고요한 냇물이 무의식의 흐름을 상징한다고 하면 냇물 아래에 있는 파란 돌은 무의식 속에 깊게 자리 잡고 있는 심리적인 이미지일 것이다.
칼 융의 ‘원형’ 이론에 의하면, 인간의 무의식은 개인 무의식과 집단 무의식으로 나뉘는데, 집단 무의식 속에 존재하는 보편적이고 원초적인 이미지를 ‘원형’이라고 한다. 무의식 속 집단 원형은 오랜 시간 동안 인류가 축적한 공통된 경험과 심리적 패턴이 반영된 것으로 보편성을 특징으로 하기 때문에 누구에게나 유사한 이미지를 떠오르게 한다. 모성을 상징하는 어머니, 생명과 소멸을 동시에 상징하는 불이 대표적인 예이다. ‘원형’이 무의식의 근간을 이루고 있는 만큼 ‘원형’에 대한 이해가 선행된다면 인간이 본능적으로 어떤 감정을 느끼고 생각하며 행동을 하는지 좀 더 통찰력 있게 접근할 수 있다. 이러한 ‘원형’은 개인이 경험하는 문화와 사회에 따라 다양한 모습으로 표출되는데 화자의 경우처럼 ‘꿈’을 통해 드러나기도 한다.
“난 죽어 있었는데” “죽어서 좋았는데” “솜털처럼 가벼웠는데”
죽어 있었다는 것은 육체에 얽매이지 않아 걸림 없이 자유로울 수 있었다는 의미일 것이다. 화자는 그런 자유로움에서 비롯된 기쁨을 '환하고' '가볍고' '투명하고' '희고' '해맑은'과 같은 감각적인 형용사들을 통해 명료하게 이미지화한다. 나른한 봄날, 강기슭이나 호수 변을 따라 걸어 본 적이 있다면 따스한 봄 햇살이 잔잔한 수면 위에 반사되어 반짝반짝 빛나는 풍경을 떠올릴 수 있을 것이다. 육체와 같이 속박을 상징하는 어떤 틀로부터 몸과 마음이 자유로워진 화자가 강물 위로 햇살이 부서져 내리는 냇가를 사뿐사뿐 걸어 다니는 모습이 그려진다. “솜털처럼 가벼워졌다”는 구절에서는 눈부신 강물 위를 자유롭게 날아다니는 이미지 마저 불러일으킨다. 그러다 문득 투명한 물결 아래 놓인 희고 둥근 조약돌들을 발견하고 팔을 뻗어 본다.
희고 둥근 조약돌.
이 시어가 지닌 함축적 이미지는 다양하다. 순수하고 때 묻지 않았던 유년시절의 기억 혹은 어릴 적 두고 온 꿈일 수도 있고 오랜 시간 거센 물결에 깎이고 다듬어지며 더욱 단단해진 내면의 자아를 상징하는 이미지일 수도 있다. 파란만장한 우리 삶 속에서 돌멩이처럼 꿋꿋이 견디고 인내하며 적응해 온 것, 오랫동안 간직해 온 꿈과 이상, 무의식의 깊고 고요한 심연 속에 가라앉아 있는 인간 본연의 영혼이자 원시(原始)의 에너지, 혹은 삶과 죽음이라는 근원적인 고통이자 원형의 그림자일 수도 있다.
그것이 무엇이든 작가는 우리에게 질문을 던지고 그 돌의 존재 의미를 환기시켜 준다.
“나도 모르게 팔 뻗어 줍고 싶었지, 그때 알았네, 그러려면 다시 살아야 한다는 것, 그때 처음 아팠네”
육체가 없으니 고통도 느낄 수 없는 상태이자 침묵 그 자체이다. 하지만 살아서 육체라는 고정된 틀을 갖게 된다면 또다시 육신의 고통을 느끼게 될 것이다. '희고 둥근 조약돌'이 무엇이길래 고통을 품어내면서까지 다시 살아야 한다고 깨달았을까, 특히 이 시에서 흰색과 파란색으로 응축된 시상이 주목된다.
작품에 색채를 상징적으로 사용함으로써 철학적 사유를 이끌어내는 한강 작가에게 흰색과 파란색은 삶과 죽음, 시작과 끝, 빛과 어둠, 상실과 회복, 침묵과 소통, 있음과 없음, 고독과 고요 등을 상징한다.
한강 작가의 소설 <흰>은 '희고 둥근 조약돌'이라는 시어를 이해하는 데에 많은 도움을 준다. 작가는 소설 <흰>에서 흰색은 “삶과 죽음이 소슬하게 함께 배어있는”(소설 <흰>-작가의 말-) 색깔이라고 말한다. <강보>와 <배내옷>에서 흰색은 어린 생명의 탄생과 죽음으로 표현되었다. 이 때문에 강물 속에 있는 흰 조약돌을 집어 꺼내려는 행위와 그때 처음 경험한 고통은 마치 엄마의 자궁 속에서 새 생명이 탄생하는 산고(産苦)의 순간을 표현한 것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희고 둥근 조약돌’이 침묵을 상징한다고 볼 수 있는 근거도 소설 <흰>에서 찾을 수 있다. 작가에게 흰돌은 ”침묵을 가장 작고 단단한 사물로 응축시킬 수 있는” (소설 <흰>-흰돌 p.87) 어떤 것이다. '침묵'이라는 단어에서 떠오르는 이미지 역시 진공, 우주, 여백, 내면, 사유, 소통, 무한, 無와 有 등으로 흰색의 상징과 흡사하다. 진공 상태의 우주공간에서는 소리가 전달되지 않는 것처럼 세상의 모든 소리들이 침묵 속으로 빨려 들어가 사라질 것만 같다. 내면의 목소리를 듣기 위해서는 불필요한 외부의 소음들을 차단해야 한다. 침묵은 내면의 소리에 귀 기울일 수 있게 함으로써 영원히 순환하는 것, 삶과 죽음, 있음과 없음, 상처와 치유라는 인간 존재의 본질적 의미를 성찰할 수 있게 해 준다. 침묵이 부재와 상실, 단절과 어둠을 상징하면서도 동시에 내적 소통과 희망의 가능성을 품고 있다는 사실에서 삶을 이어가는 강력한 도구가 되는 것이다. “침묵으로 말하는 작가”라는 타이틀처럼 한강 작가가 다시 살아서라도 줍고 싶었던 '희고 둥근 조약돌'은 내면의 소통을 통한 존재의 깨달음일까? 삶과 죽음이 끊임없이 순환하는 것, 고정되지 않아 무엇이든 품어낼 수 있는 것, 뚜렷한 경계를 넘어선 것들에 대한 성찰이 이루어지는 순간말이다.
“새벽이면 선잠 속에 스며들던 것 그 푸른 그림자였을까”
“어둠과 빛 사이에서만, 그 파르스름한 틈에서만 우리는 가까스로 얼굴을 마주 본다”(소설 <흰>-모든 흰)
꿈을 꾸는 시간은 동이 트기 전 푸르스름한 빛이 피어나는 새벽 시간이다. 어둠(밤)과 빛(아침)의 경계이자 현실과 비현실의 세계, 삶과 죽음의 경계가 교차되면서 가장 고요하면서도 가장 극적인 순간이다. 아주 작은 틈에서 가까스로 비집고 나오는 빛. 언제 있었는지 알아채지 못하다가 어느 순간 그 빛은 폭포처럼 쏟아져 내리며 환하게 동이 트는 순간. 삶에 대한 깨달음의 과정은 그렇게 힘겨운 여정임을 말해준다.
죽음은 無이지만 인생의 끝자락에서 만나 삶에 대한 욕망과 의지를 다시 갖게 만들어 준다. 죽어서 좋았지만 그래도 다시 살아서 고통을 직면해야 한다는 사실을 알게 된 화자 역시 죽음 앞에서 삶의 본질을 깨달았던 것이다. 삶은 고통 그 자체이기 때문에 그대로 살아냄으로써 내면을 마주하고 회복하는 것이 우리 삶의 본질이라고 말한다.
칼 융의 “그림자”개념을 다시 살펴보면 우리 무의식 속 원형의 한 형태인 ‘그림자’는 어린 시절 배우는 사회적 규범과 가치에 의해 형성되는 내면의 자아로서, 억눌린 감정과 행동들이 무의식으로 밀려나 그림자로 존재하게 된다고 말한다. 부모와 사회는 우리가 그들이 원하는 특정한 방식으로 행동하기를 기대하는데 만약 그 기대에 어긋나는 부적절한 행동을 할 경우 부모와 사회로부터 부정되고 억압받을 수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그림자는 억눌릴수록 무의식에서 더욱 강력해지기 때문에 의식적으로 받아들이고 통합함으로써 심리적인 성장을 이룰 수 있다고 설명한다.
시인은 사회적 규범과 가치 때문에 억눌린 고통을 직시하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억눌린 욕망과 고통, 좌절과 두려움은 외면한다고 해서 사라지는 것이 아니다. 그 파란 돌을, 잊고 있었던 꿈을, 무의식의 억압된 그림자를, 태초의 영혼을 붙잡으려면 죽은 몸을 한 채로는 불가능한 일이었기 때문에 다시 살아야 한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부정하고 회피하는 대신 현실로 돌아와 직접 마주 대하는 것만이 최선이라는 것을 인식하는 순간이다. 깊은 밤 꿈에서 깬 화자는 따뜻한 눈물을 흘린다. 차가운 강물의 감각적 이미지가 따뜻한 눈물의 감각적 이미지로 전환되면서 화자에게 내면의 변화가 찾아왔음을 알아챌 수 있다. 현실로 돌아와 십 년 전 꿈에 본 그 파란 돌을 다시 들여다본 화자의 심정은 후회와 아쉬움, 기대와 희망으로 복잡하기만 하다. 그동안 주운 적도 있었을 것이고, 놓친 적도 있었을 것이다. 또는 영영 잃어버렸을 수도 있으며 여전히 그곳에 눈동자처럼 고요히 기다리고 있을지도 모른다. 그것이 영혼이든 꿈이든 고통이든 인간 존재의 본질적인 부분이며 인생의 불가피한 현실이라는 깨달음을 통해 삶의 본질에 한 발자국 다가갈 수 있을 것이라는 시인의 목소리에 귀 기울이게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