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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가 Dec 18. 2023

오노소보의 나날들

오노소보의 한 숙소에서 3일을 머무른 것은 이민국과 인도네시아 여행에서 마주치는 특유의 꼬움을 극복해야 했기 때문이었다. 빠빤다얀 산행을 마치고 들어온 족자카르타에서 우리가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은 비자를 연장하는 것이었다. 인도네시아는 입국 시 35달러 혹은 50만 리부 (대략 43000원 정도)의 입국 비자를 30일간 발행해 주는데 우리 여행 기간은 그보다 길었기 때문에 한 번은 거쳐야 할 일이었다. 처음의 이상한 자카르타 숙소에서도 반둥에서도 이번 여행이 줄 보상에 대한 확신이 없었기에 한 번씩은 이렇게 꼽다면 여차하면 현지 비자 연장 대신 잠시 말레이시아나 태국 싱가포르라도 다녀올까? 사실은 도망쳐 버리고 발리를 그저 거쳐가는 것은 어떨까 하는 생각을 내려놓지는 못하고 있었다. 하지만 렘방, 다시 반둥 그리고 빠빤다얀을 거치면서 여행신의 가호를 받았고 이 나라에서 여행을 마치기로 마음을 굳혔다. 조금 꼽기는 하지만 이곳에서의 무언가를 보고 느끼고 갈 수 있겠다는 확신이 들었기 때문이다.    

 

 사실 처음으로 비자 연장을 시도했던 것은 자카르타였다. 어찌 되었든 자카르타에 오래 머무를 계획이었기에 일주일 가량 걸린다는 비자 연장 절차를 여기서 마무리하려 했던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어디에선가 무조건적으로 일주일을 머물러야만 한다는 제약이 생겨버리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민국을 방문했을 때 나는 반바지를 입었다는 이유만으로 출입이 거절당했다. 당시 이상하게 격분했고 나는 이유를 권위적인 것에 대해 심한 거부감 가지고 있었던 것에서 에서 찾았던 것 같다. 하지만 지금 돌이켜 보면 그것도 사실이지만 인도네시아에서 더위에 갇힌 채 원하는 것을 얻을 수 없을 것 같은 가벼운 욕구불만 같은 것도 더해 있었던 것 같다. 다행히 족자카르타에서는 반바지를 입고도 별다른 문제없이 비자 연장을 신청할 수 있었다. 다만 예상대로 5 영업일이 걸렸고 화요일에 방문했던 우리는 다음날 사진을 찍고 다음 주 월요일에 비자를 받을 수 있었다.      


여행 전반부를 마무리한 긴 하루였던 빠빤다얀 화산 등산을 마치고 이코노미 야간 기차를 타고 도착한 족자카르타는 한국의 경주 같은 곳이라고 한다. 그리고 처음으로 도착한 숙소는 아늑한 홈스테이였다. 주인아저씨는 조용하고 배려가 있는 분이었고 체크인 전에 공용 공간에서 쉴 수 있게 해 주셨다. 더운 나라라 여기저기 바람구멍을 문양으로 내어 두었고 방바닥은 차가운 타일이라 앉아 있으면 시원했다. 난방 시설을 할 필요가 없기 때문에 가능한 구조였다. 아주 좁은 골목을 뚫고 들어온 이곳은 그냥 보통의 이 동네 집들과 다름없었지만 갤러리 엔드 홈스테이라는 이름에서 보듯 꽤 이것저것 잘 꾸며놓은 집이라는 것을 체크인을 하고 방안에 들어가서야 알게 되었다. 나중에 생각해 보면 이런 이름의 홈스테이들이 족자에는 꽤 있었고 한동안 꽤 유행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이곳은 bri 은행의 atm 부스를 atm gallery라고 표기하는 나라이기도하다. 



 우리는 아주 긴 1박 2일에 꽤 지쳐 있었고 2시까지 약 4시간을 바깥에서 보내느니 이곳에서 시간을 보내기로 결정했다. 조식 시간이었는지 좀 더 안에서 대기하고 있으라는 얘기를 들었고 좀 더 어둡지만 그들의 공간에 들어가 쉬어가기로 했다. L은 피곤했는지 이 집 아이의 작은 담요를 덮고 그 자리에서 바로 잠이 들었고 나는 30분 정도 모기를 쫓으며 인도네시아어 책을 집어 들었지만 눈에 잘 들어오지는 않았다. 잠시 후 이전 게스트가 조금 일찍 출발을 했는지 2시간 정도 일찍 체크인을 했다. 아저씨는 꽤 자주 enjoy it이라는 말을 그에 어울리지 않는 진중한 표정으로 이야기하셨다. 어쩌면 그 표현은 그 인테리어와 함께 같이 전달된 태도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도 들었다.      


온수가 없고 에어컨도 없었지만 깔끔한 홈스테이였다. 넓은 방에 넓은 매트리스 깔려 있고 층고가 높아 분위기는 다르지만 쿠바 하바나에서 처음으로 묵었던 숙소의 느낌도 났다. 생각해 보면 전혀 다른 느낌의 방이었지만 같은 느낌을 받았던 것은 한국을 포함해 어떤 나라를 돌아다녀도 어느 정도 표준화 되어 가는 숙소의 느낌이 있는데, 확실히 꽤 다르다는 느낌을 받았기 때문일 것이다. 하지만 우리는 다음날 예약을 잡지 못해 다른 숙소로 옮겨야만 했다. 하루 더 묵고 싶다는 생각이 있었지만 알게 모르게 더위를 완전히 피할 수 없다는 느낌 때문이었는지 예약이 힘들다는 얘기를 들었을 때 가벼운 안도를 하기도 했던 것 같다. 렘방과 반둥은 비교적 높은 곳에 있는 도시라 그렇게 덥지 않았는데 족자로 내려오는 순간 마치 자카르타에서처럼 다시 짧은 옷들을 모두 꺼내 들어야 했다.      


문제는 다음 숙소였다. 론니 플레닛의 추천으로 가게 된 이 오랜 명성의 숙소는 서양 배낭 여행자들이 좋아할 것 같은 쿨한 분위기의 숙소였는데 청소에 신경을 쓰지 않아서 꽤 지저분하고 투어를 파는 것에 좀 더 신경을 쓰고 있는 느낌이 드는 곳이었다. 한국 드라마를 꽤 본듯한 한 스탭 친구가 친근하게 이야기를 걸었지만 에어컨이 없는 도미토리를 그저 더블룸이라 부른 이 방에서 l이 좀 기분이 나빴던 모양이었다. 도시에 도착하면서부터 모든 기사님들의 관심사였던 보도부드르와 프롬바난의 입장료가 현지인의 열 배가 넘는 한탕 장사를 하고 있다는 것도 뭔가 이곳을 여행하는 것에 부담을 주고 있었다. 그리고 여행 안내소에서는 그 돈을 내고도 보도부드르는 이제 일출시간에 출입도 불가하며 탑 위로 올라갈 수도 없다는 것도 알려주었다. 그래도 안 갈 수 없겠지만. 그렇게 가고 싶지 않은 최고 유명한 관광지가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l은 어차피 일주일을 여기에 머물러야 한다면 차라리 디엥고원을 가 보는 것이 어떠냐고 말했다. 나는 사실 전혀 들어 본 적이 없었던 곳이었는데 족자 첫날 여행 안내소의 팸플릿에서 아주 먼 투어 상품으로 보았던 곳이었다. L은 처음부터 그곳에 관심이 있었던 차라 이럴 바에는 다음날 아침 바로 그곳으로 가자고 했다. 당장 어떻게 가야 할지 몰랐을 때, 자카르타 여행 안내소 직원이 소개해 주었던 트래블로까에서 디엥고원 직전의 배후 도시로 보이는 작은 소도시 오노소보까지 가는 셔틀버스를 찾을 수 있었다. 가격도 그다지 비싸지 않았다. 70000루삐아. 지금까지 경험으로 보았을 때 비용을 줄이고 여정을 만드는 데에는 목적지의 가장 가까운 지역, 도시로 이동하는 것이 가장 나았었고, 그렇게 그날 아침 여정은 급 변경되었다. 오노소보를 가기로 했다.      

숙소 바퀴벌레     


이렇게 갑자기 향한 오노소보까지의 여정은 꽤 흥겨웠다. 라마사키로 불렸던 현지 대중 셔틀버스 회사에서 직접 티켓을 사면서 트래블로까의 수수료만큼 아주 쪼끔 싼 가격에 티켓을 살 수 있었다. 사무실에는 아련할 정도로 살짝 시원했던 작은 승객 대기실이 있어 1시간 정도 편하게 짐을 두고 쉴 수 있었다. 웬만해서는 외국인이 잘 이용하지 않았는지 적당히 관심받으며 편하게 대기할 수 있었다. 여행지에서 적당히 호의적인 관심을 받는다는 것은 안전과도 밀접하게 연계되어 있기 때문이기에 꽤 마음이 편했다. 어쩌면 여행은 적당히 퇴행하기 위한 활동이기도 하다. 왜냐하면 현지인들이 만들어 놓은 인프라와 그들의 관심 없이는 성립 불가능한 것이라는 점에서 여행자들은 이 사회에서 아이와 같은 상태에 놓이는 것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서글하게 생기신 기사님도 섬세하게 짐과 행선지를 챙겨주셨다. 한두 명의 현지인이 타고 내렸고, BTS 팬이셨던 여자분과 이런저런 이야기도 나누다가 그분마저 내리자 작은 미니버스 안은 금세 어두워졌다. 차는 꼬불꼬불하고 어두운 길들을 지나고 있었지만 그다지 위협적인 느낌을 받지는 않았다. 기사님은 지금은 익숙해져 버린 인도네시아 dj 틱톡 리믹스를 틀며 졸음을 쫓으시는 것 같았다.           


문제는 이전 숙소에서 좋지 않았던 기억 때문에 비교적 숙소를 고르는 데 신중을 기했고 다른 때 보다 꽤 많은 돈을 주고(대략 한국돈으로 25천 원 내외) 괜찮은 호텔에 묵게 된 때였다. 우연히 알게 된 현지인들이 많이 쓰는 앱을 통해 예약한 숙소라 소통이 원할치는 않았지만 우리가 배우고 간 인니어와 그들의 영어 그리고 번역기를 통해 크게 무리 없이 이용할 수 있었다. 숙소는 다행히 아주 깨끗했고 특색 있었다. 마치 미국이나 캐나다에서 본듯한 드라이빙 모텔 같은 느낌이었는데 다행히 지금까지 숙소 중에서 가장 깨끗하고 쾌적해서 바로 1박을 더 연장하기도 했다. 그런데 문제는 그날 밤이었다. 갑자시 거대한 바퀴벌레 한 마리가 침대 옆을 스쳐 지나갔던 것이었다. 주변에 수풀이 있는 지형이라 바퀴벌레가 있을 수 있었고 사실 나는 만족하고 있는 L의 기분을 망치지 않기 위해 이미 녀석을 두어 시간 전에 보았지만 평화롭게 철수해 주기를 바라고 있었던 차였다. 큰 바퀴벌레는 집에서 사는 녀석은 아니라고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한바탕 놀라고 녀석을 잡기 위해 애를 썼지만 간발의 차로 놓쳐버렸다. 어떻게 해야 하나 망설이고 있었는데 우선 녀석을 잡기 위해 숙소의 도움을 받기로 했다. 하지만 야간이라 영어를 조금 하던 직원과 리셉션들은 모두 퇴근을 했고 야간을 전담하는 직원 한 분만 남아있었다. 인니의 많은 숙소에서는 노동력이 싸서 그런지 야간 숙소 전담 직원들이 있었고 그들은 대부분 그저 밤에 제한된 상황들을 캐어해 주는 역할을 했다. 이를테면 이젠 화산을 새벽에 등산하는 바뉴왕기 숙소에서는 새벽에 사람들을 깨워주거나 야간에 늦게 귀가하는 사람들을 위해 문을 열어주는 역할 등이 그것이다. 그런데 우리가 요청한 상황은 좀 다른 상황이었지만 다행히 번역기를 통해 소통은 가능했다. 바퀴벌레 약이나 스프레이 등이 있는지 물었지만 없었는데, 그분은 자기가 직접 잡아주면 안 되겠냐고 이야기했다. 미안했지만 좀 사이즈가 많이 큰 녀석 때문에 쉽게 잠들지 못할 것 같기도 했기 때문에 부탁하기로 했다. 겨우 찾은 평화를 다시 무너뜨리고 새로운 장소로 옮겨가는 것도 힘든 일이었다. 그분은 나와 같이 침대를 옮기고 커튼을 들춰내고 책상을 옮기며 녀석을 찾기 위해 안간힘을 썼다. 하지만 잘 찾아지지 않았다. 미안해서 더 부탁하기 힘들 정도의 시간이 흘렀을 때 다행히 녀석이 화장실에 등장했고 직원분은 단번에 때려잡고 우리의 스포츠 타월을 이용해 녀석을 잡아 나와 문밖으로 나왔다. 그리고 바로 그 문 앞에서 녀석을 버리고 쿨하게 떠나 버렸다. 그리고 5일을 머무르며 바퀴벌레의 침공은 더 이상 없었다. 죽은 시체 때문이었을까?

       

나의 의문은 그것이었다. 왜 녀석을 우리 문 앞에 1M 지점에 버렸을까 하는 점이다. 이유는 당연히 복합적이었을 것이다. 지형상 그들에게 썩 대단치 않은 벌레 경험이었을 것이었지만  연약해 보이는 외국인 관광객이 호들갑을 떠는데 호의로 도와주기로 한 정도였을 것이다. 하지만 인니 여러 곳을 오랜 시간 머물면서 내린 결론은 그게 아마 그의 일이 아니었기 때문일 것이다. 청소를 하는 사람의 일이 그 바퀴벌레를 최종적으로 치우는 것이었을 것이다. 인니에서는 작은 가게에서도 한국인 기준으로는 꽤 많은 사람들을 고용하고 있는 것을 보게 된다. L은 가끔 마무리를 대충 하는 인니인들에 대해 임금을 대충 줘서 대충 일하는 것은 아닐까?라는 통찰력 있는 말을 던지기도 했었다. 오노소보에 있는 한국보다 더 맛있는 핫도그 집은(쫀도그라 불리는) 손님은 별로 없었지만 3명의 사람이 동시에 일하고 있었다. 인구 2억 7천만 인 그들의 임금은 낮기에 기계를 이용해 효율화하는 것보다 사람을 이용하는 것이 더 싸게 먹힐 수도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렇게라도 사람을 더 고용하는 것이 사회 평화에도 도움이 될 것이다. 좁고 복잡하고 오토바이가 뒤엉킨 그들의 도로에는 수많은 자원 봉사자들이 유턴과 사거리 교통을 깃발을 들어 안내하고 팁으로 돈을 번다. 편의점 앞의 주차공간에 오토바이를 주차안내하며 벌어들이는 돈도 아마 생계로 이어질 것이다. 어두웠지만 대규모였던, 한국식으로는 창고형 식자재 마트에서 일하시는 많은 분들은 종종 아무렇지 않게 물건 진열대 근처 단층 계단에 둘러앉아 즐겁게 환담을 나누곤 했다. 어디를 가나 사람들은 많고 그 많은 사람들은 적은 돈을 받고 여유롭게 일하고 있었다. 그러니까 한국은행에서의 풍경은 정확히 그와는 반대의 어떤 것을 보여주고 있었다. 기술 발달과 인력의 효율화 그리고 +알파의 그것이다. 주 69시간이 다시 추진되고 있다는 한국의 그것 말이다. 인도네시아의 그것이 옳다는 낭만적인 이야기를 하고 싶은 것은 아니다. 그럴 리가... 다만 확실한 것은 인도네시아의 어느 곳에서도 아이들은 참 많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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