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독교 세계관" 운동이 그 뿌리를 숨
여기저기서 <기독교세계관> 이야기는 많이 나오는데, 그때마다 아무리 꼼꼼히 살펴보아도 딜타이(Wilhelm Dilthey, 1833-1911) 이야기는 제대로 나오지 않는다. 물론 세계관(Weltanschauung)이란 용어는 칸트가 제일 먼저 사용하긴 했으나, 이를 철학사의 궤도에 올린 이는 딜타이인데.. 그리고 실제로 기독교세계관 운동을 전개했던 네덜란드의 개혁주의자 오어나 카이퍼 등이, 딜타이와 동시대적으로 공유된 지적 분위기(Zeitgeist) 속에서, 딜타이가 철학적으로 정초한 세계관 담론의 궤도 위에서 그들 운동의 외형이 형성된 것임에도 국내에서 기독교세계관 운운하는 이들은 애써 딜타이를 뒤로 숨긴다.
뭐 그럴 수밖에.. 딜타이는 실증주의와 자연과학이 전통적인 정신과학의 영역마저 잠식해 가는 상황에서 예의 '설명'과 '이해'라는 구분을 통해 정신과학의 숨통을 이어가고자 했다. 그가 취한 태도는 자연과학이 대상을 분석하고 설명하는 태도와 정신과학은 다를 수밖에 없음을 천명하는 거였다. 자연과학은 설명을 위해 관찰 대상을 특정 시공에 제한하여 그것을 화석화하고 표준화하여 일반화하는 것에 반해, 유기적 존재인 인간과 관련된 정신과학은 그렇게 대상을 화석화하여 표준화할 수 없고, 공리 화할 수 없었다. 칸트류의 이성중심주의로는 총체적 인간의 삶을 이해하거나 파악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인간은 지성-감성-의지가 통합된 존재이고, 따라서 이러한 인간과 그와 연루된 결과물을 관찰하기 위해서는 구체적인 생과 체험을 무시해서는 안된다.
이런 구도 하에 딜타이는 역사주의를 수용하여 자못 다원적인 '세계관'이라는 개념을 전면에 내세운다. 인간의 정신은 역사 속에서 '다양한' 형태로 드러나게 되는, 그 다양함의 뿌리가 바로 세계관이다. 인간이 세계를 이해하는 체계적인 관점이 곧 세계관이고, 이는 역사와 문화권 별로 다양할 수밖에 없는 것이기도 하다. 딜타이는 인간 정신이 세계를 파악하는 관점의 유형을 크게 3가지로 보았는데, 그것이 1) 자연주의 2) 자유의 이상주의 3) 객관적 이상주의이다.
그럼 기독교세계관을 주장하는 이들은 이러한 딜타이의 다원성을 전제로 수용한 것인가? 아니면 자신들의 주장을 좀 더 세련된 철학체계로 포장하기 위해 용어만 차용한 건가? 본질적으로 일원주의를 지향하지 않을 수 없는 신학자들이 목적을 위해선 다원주의적 용어도 과감히 가져올 수 있단 발상에서인가?
그들은 딜타이라는 다원주의적 토양에 어떤 씨앗을 뿌린 것인가? 아니면 그냥 간판만 갈아 끼운 건가?
아무튼 정작 원조격인 딜타이가 빠져버린 세계관 논쟁 자체가 내 눈에는 매우 허망한 궤변으로 읽힌다.
일원성을 주장하는 이들이 다원주의적 개념을 가지고 와 적극 활용하는 것 역시 내 보기엔 매우 혼란스럽다.
딜타이가 관에서 뒤돌아 누울 판이다.
그런데 왜 이런 일이 반복되고 있을까?
체험이 빠진 자리에 논리와 체계로 채우려 했기 때문이다. 정작 딜타이는 칸트를 까면서 무엇보다 중요한 것이 삶(Leben)과 체험(Erlebnis)이라 했거늘.. 그의 외양을 가져와 쓰는 이들은 딜타이의 알갱이는 도려내고, 주관 없이 객관의 절대화에만 집착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난 이 현상을 이렇게 적는다.
'신앙 없는 신앙인', 혹은 '고백 없는 신학자'들이 자행하는 자기만족적 논리행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