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모 센시티부스’, 우주적 장과 공명하는 인간

by 이길용

되도 않게, 요즘 뉴턴, 아인슈타인, 칸트, 헤겔 등을 열심히 되새기고 있습니다. 특히 이들이 말하는 시간과 공간, 그리고 ‘우주적 장’ 등에 관한 고민과 숙고를 이어가고 있습니다.

뉴턴의 고적 물리학을 넘어 아인슈타인에 이르게 되면 중력의 개념이 새롭게 바뀌게 됩니다. 질량을 가진 물체의 잡아당기는 힘을 중력으로 보았던 뉴턴에서 질량때문에 '매체적 실재'인 시공간이 곡률로 휘어진 것이라 해석한 아인슈타인에 이르기까지 우리가 상식으로 알던 많은 것들은 늘 한시적 가치만 지녔다고 보겠습니다.

이런 고민의 결과로 작은 글 하나를 적어보았습니다. 이 결과물들은 요즘 집중하고 있는 [공명과 튜닝(Resonance and Tuning): 인공지능 시대 ‘호모 센시티부스(Homo Sensitivus)’를 위한 새로운 존재론과 윤리학]이란 책으로 펴낼 작정입니다. 대략 2년 안에는 출간할 다짐을 하고 있는데, 제 주전공인 종교뿐만 아니라, 철학, 과학, 역사 등을 망라하는 내용인지라 생각보다 진도가 더디네요. 연구하고 가르치고, 논문 지도하고, 성적 내고, 맡겨진 보직 수행하고, 또 이것저것 안팎의 요구에 응대하면서 이런 작지 않은 프로젝트를 진행하는 것이 쉽지는 않지만, 워낙 받은 스트레스 글 쓰는 것으로 풀어내는 사람인지라 꾸준히 작업을 이어가 볼까 합니다. 아래 문장은 그런 공부의 한 흔적입니다. 그래도 지금까지 제법 이런 유의 글을 뽑아내서 분량은 어느 정도 채워가는 중입니다. 관심 있는 분들의 물음은 늘 반깁니다~




‘우주적 장’(Cosmic Field)과 공명하는 ‘호모 센시티부스(Homo Sensitivus)’


우리는 오랫동안 우주를 물질들이 담겨 있는 거대한 상자로 상상해 왔습니다. 뉴턴의 고전적 역학 안에서 중력은 멀리 떨어진 물체들이 서로를 당기는 신비로운 ‘힘’이었고, 공간은 그 사건들이 일어나는 부동의 무대였습니다. 그러나 아인슈타인은 이 익숙한 풍경을 송두리째 뒤엎었습니다.


중력은 힘이 아니라 ‘시공간의 결’ 그 자체입니다. 거대한 질량은 주변의 시공간을 휘게 만들고, 모든 존재는 그 휘어진 결을 따라 흐릅니다. 여기서 시공간은 더 이상 텅 빈 그릇이 아니라, 물질과 에너지가 서로 관계를 맺으며 만들어내는 역동적인 ‘장(Field)’으로 재정의됩니다. 우주는 고정된 무대가 아니라, 에너지의 네트워킹이 빚어내는 거대한 출렁임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이 거대한 장을 어떻게 마주하고 있습니까? 칸트는 일찍이 인간의 인식이 대상을 있는 그대로 복사하는 것이 아니라, 시공간이라는 ‘선험적 형식’을 통해 재구성하는 과정임을 간파했습니다. 현대 뇌과학의 ‘베이지안 뇌 가설’은 이 고전적 통찰에 과학적 알고리듬을 부여합니다.

우리 뇌는 외부 정보를 수동적으로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대신 과거의 경험을 바탕으로 끊임없이 세계에 대한 가설을 세우고, 들어오는 신호와 대조하며 자신만의 ‘현상’을 발명해 냅니다. 즉, 우리가 보고 느끼는 시공간은 우주적 에너지의 네트워킹을 인간이라는 주체가 자신의 인식 체계에 맞게 번역해 낸 ‘구성주의적 명명’인 셈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새로운 인간의 정의에 도달합니다. 미르치아 엘리아데가 말한 ‘호모 렐리기오수스(Homo Religiosus, 종교적 인간)’가 특정 교리와 의례에 머물렀다면, 이제 우리는 우주적 에너지의 장에 직접 감응하는 ‘호모 센시티부스(Homo Sensitivus, 감응하는 인간)’로 나아가야 합니다.


호모 센시티부스에게 우주는 정복할 대상이나 무의미한 물질의 집합이 아닙니다. 그것은 끊임없이 신호를 보내고 전율하는 ‘거대한 공명판’입니다. 우리는 이 장의 바깥에 있는 관찰자가 아니라, 장의 일부로서 우주의 미세한 결을 느끼고(Sense), 그 리듬에 자신의 삶을 조율(Tuning)하는 존재입니다. 과학적 탐구는 지적인 감수성이 되고, 종교적 영성은 존재론적 감수성이 되어 이 지점에서 하나로 만납니다.


우리는 여기서 헤겔의 한계를 넘어섭니다. 절대정신이라는 원리에 매몰되어 물질과 객관적 구조물을 정신의 소외나 자유의 구속으로 보았던 근대 철학의 오만을 경계합니다. 에너지가 곧 물질이고 물질이 곧 장의 굴곡인 우주에서, 물질은 정신의 도구가 아니라 ‘에너지가 질서를 입고 나타난 거룩한 현현’입니다.


우주는 시작부터 지금까지 규모의 확장 속에서도 ‘힘의 균형’을 단 한 번도 잃지 않았습니다. 벽이 없는 상태에서도 정교하게 유지되는 이 ‘역동적 평형’은 우리에게 새로운 윤리를 제시합니다. 그것은 타자와 세계를 억압하는 구조가 아니라, 서로의 주파수를 존중하며 조화로운 장을 만들어가는 ‘공존의 기술’입니다.


지구가 태양으로 끊임없이 추락하면서도 궤도를 유지하는 ‘기적’은, 우주가 이미 완벽한 평형의 알고리듬 속에 있음을 웅변합니다. ‘호모 센시티부스’로서 우리는 이제 이 거대한 힘의 장이 보내는 신호에 귀를 기울여야 합니다.


우리는 홀로 존재하는 섬이 아니라, 우주라는 거대한 에너지의 바다 위에서 함께 출렁이는 파도입니다. 이 사실을 깊이 감각할 때, 비로소 우리는 기술의 소외와 실존의 고립을 넘어 참된 실재와의 합일에 도달할 수 있을 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