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생각보다 완벽한 저장 수단
어느 날, 고비 사막에 거대한 돌풍이 불고, 백두산, 후지산, 세이트엘모어산, 마우이산 등 온 지구의 화산이 분화해서 화산재가 전지구를 50미터 두께로 덮어버려서 인류는 순식간에 멸망했다. 몇 십만 년 후 새로운 문명이 화산재 아래의 고대 문명에 대해 탐사를 시작했다. 이들은 어느 거대한 건물을 발굴하기 시작했고, 몇 권의 책과 애플컴퓨터, 아이폰 등을 발굴해 냈다.
인류가 폼페이 유적을 발굴하기 시작했던 16세기 수준의 문명을 가진 이들은 책을 통해 고대의 문명에 대해 알아가기 시작한다.
프로그래머라 불리는 제사장들이 조그마한 버튼들을 통해 신과 소통하는 의식을 치른다. 신과 소통하는 제단은 까맣거나 흰색의 금속 재질 상자로 만들어진다. 신과의 원활한 소통을 위해 여기저기 구멍이 뚫려 있다. 반짝거리는 판때기 위에 납으로 녹여 이런저런 장식물을 붙여 각 부족들의 문장을 만들고 이를 상자 속에 넣어 정치적인 통합을 이루려는 시도를 했던 모양이다.
다시 현실로 돌아와서...
VHS, 8mm, 혹은 6mm, 어쩌다가 베타. 이 정도에서 어떤 물건을 떠올릴 수 있는 사람이라면 거의 95%의 확률로 집에 한 두 개의 비디오 테이프를 가지고 있을 거다. 그리고 그 테이프에 기록되어 있는 과거의 추억 때문에 버리지 못하고 간직하고 있지만 그 테이프를 볼 수 있는 기기들은 이미 고장 나서 처분한 지 오래일 터.
하드웨어만의 문제는 아니다. 이제는 사라져 버린 워드프로세서로 작성한 문서들은 어쩌란 말인가. 이름도 가물한 고려시스템의 명필 혹은 슈퍼명필로 작성한 문서를 지금 열어볼 수 있을까? 차라리 그냥 텍스트 파일로 저장했더라면 내용은 확인할 수 있을 텐데 나름대로 문단 나누고 표 만들어 넣고 했던 문서들은 이제는 열어보기 힘들다.
문서 작성 프로그램의 저장 기능 아이콘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지금의 10대들은 알 수 있을까? 3.5인치 플로피 디스크를 본 적도 없는 친구들이 아이콘으로 저장버튼을 찾아 누르는 것을 보면 이따금씩 놀랍다는 생각이 들 때도 있다.
비디오 테이프, 문서 파일, 플로피 디스크... 이 것들은 데이터를 저장하고 있는 미디어들이다. 스스로가 저장하는 데이터의 특성에 최적화된, 그래서 큰 범위로 데이터라고 볼 수 있겠다.
아무리 비디오 테이프를 들여다본 들 20여 년 전에 찍었던 딸내미의 돌잔치 영상이 보일 리 없다. 이러한 기록들을 열어 보기 위해서는 하드웨어이든 소프트웨어든 적절한 장치가 있어야 한다. 넓은 의미로 디바이스라고 부를 수 있겠다.
마지막으로 데이터와 디바이스가 갖춰져 있더라도 추가적인 에너지가 없다면 무용지물. 해외 나가서 콘센트가 맞지 않아 충전을 하는데 애를 먹어본 경험이 있다면 바로 이해할 수 있을 듯.
결국 디지털 시대에 기록을 저장하고 열람하기 위해서는 데이터, 디바이스, 에너지라는 세 가지 요소는 필수적이다.
인류는 이 세 가지 요소를 모두 하나로 엮어 놓은 물건을 2000년 전부터 사용해 왔다. 바로 책이라는 것. 책은 그 자체로 데이터이자 디바이스이다. 그 디바이스를 구동하는데 건전지도 필요 없고 콘센트도 필요 없다. 그냥 책장에서 꺼내어 책장을 넘기기만 하면 된다. 부팅시간조차 필요 없으니 나처럼 성격 급한 놈에겐 딱이다. 우리에게 책이 보배인 이유이다.
뚜껑을 여는 순간 홀로그램이 펼쳐지며 기록된 영상을 보여주는 장치가 나올 거다. 심지어 암흑에너지를 활용해서 몇 만년이고 영구히 사용할 수 있는 장치가 나올 수도 있겠지. 하지만 그전에 50미터의 화산재가 지구를 덮을 가능성이 더 높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