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이란 늘 뜻대로 되는 것은 아니다. 그게 재미지다.
- 고기에 소금과 후추, 바질 등으로 밑간을 한 후 30분 정도 재운다.
- 잘 달궈진 무쇠 팬에 고기를 얹고 4-5분 굽고 뒤집는다.
- 불 끈 채로 내부의 육즙을 안정화시키기 위해 2분 정도 그냥 둔다.
퇴근길에 운전하면서 레시피를 외운다. 그다지 어려울 것은 없어 보인다. 나흘째 혼자 집을 지키는 마지막 목요일, 나 혼자 근사한 저녁을 챙겨 먹고 싶어 졌다. 날도 더운데 맥주나 한 잔 하자는 친구의 유혹도 뿌리친 채 집 근처 마트에 들렀다. 280 그램은 너무 많을 것 같고, 240 그램? 저녁인데 너무 많이 먹지는 말자... 그래. 213 그램. 깔끔하게 포장된 안심 세 덩어리 팩을 들고 집으로 향했다.
덩그러니 냉장고를 지키고 있던 수박이 떠올랐다. 수박으로 소스를 만들어 볼까? 좀 달착지근하게 스테이크를 먹는 것도 나쁘지 않겠다. 마늘을 미리 식용유로 볶다가 노르스름해질 때쯤, 미리 갈아 놓은 수박을 넣어 뭉근하게 졸이고, 굴소스로 간을 하면 어떨까? 얼추 그림이 나온다. 어차피 혼자 먹을 건데 망하면 어때. 스테이크 썰어서 참기름장에 찍어 먹음 되지.
내가 좋아하는 미디엄 레어로 하려면 2-3분만 굽고 뒤집어야 할 거고, 독거 첫날 돼지고기 구워 먹으면서 남겼던 파무침을 활용할 방법은 없을까? 뒤집고 나서 고기 위에 얹어 놓아 볼까? 파닭 대신 파스테이크도 괜찮겠다. 룸미러로 이 더위에 집 떠나서 고생하고 있을 가족들은 까맣게 잊고 스테이크 구워 먹을 생각에 몰두하고 있는 가장의 모습이 보인다. 이래도 되는 거냐 싶기도 했지만 성공하면 이 레시피로 아내와 두 딸에게 맛난 스테이크를 맛보게 해 주면 되는 거 아닌가?
한 녀석은 학교에 일이 있다며 방학인데도 자취방에 머물고 있고, 한 녀석은 신입사원 연수로 합숙 들어가 있다. 아내는 아이들이 없는 틈을 타서 월요일부터 혼자 여행을 나섰다. 어제저녁 서산 어디쯤에서 주유한 문자가 온 걸 보면 '잘 지내고 있으니 걱정하지 마라'는 메시지일 테고. 하루쯤 나만의 성찬을 즐기는 것, 흔치 않은 기회로 삼자. 이 역시 가족들이 내게 준 선물이라 생각하자.
요리를 썩 잘하는 편은 아니지만 레시피를 보면서 따라 만드는 건 재미난 일이다. 한두 번 레시피대로 따라한 후에는 나름대로의 변형을 주는 것도 재밌다. 미리 대파와 양파를 큼직하게 썰어 넣어 육수를 우려내어 라면을 끓인다거나, 동그랑땡 반죽에 카레가루를 섞어 넣는다거나, 부대찌개에 굴소스를 부어 넣는다거나... 물론 모두 성공하는 것은 아니다. 아이들이 외면하는 바람에 아내와 둘이서 먹어치워야 하는 경우도 있으니. 되도록 혼자 먹을 기회가 있을 때 실험을 해 본다.
마트에서 구입한 고기 팩을 덜렁덜렁 들고 현관에 들어섰다.
어라? 이런... 아침에 출근하면서 거실 등을 깜빡 켜 놓고 나갔던 모양이다. 어라? 생각보다 선선하다. 어제 퇴근했을 때도 거실이 후덥지근했었는데... 에어컨 끄는 것도 깜빡했었나 보다. 그리 바쁘게 서둘러 출근한 것도 아닌데, 아마도 커피 내린 것 챙겨 나가느라 정신이 팔렸던 모양이다. 50대가 되니 덤벙거리는 건 더 심해진다. 누진제 폭탄에 아내의 잔소리 폭탄까지 생각하니 아찔해진다. 스테이크고 뭐고 라면이나 끓여 먹어야 할 건가 보다. 고기는 냉장실에 보관해야 하나, 냉동을 해야 하나...
"짜잔!"
아내의 목소리에 화들짝 놀랐다. 돌아온다는 연락도 없었고, 모처럼 혼자 휴가 가는 거 금요일까지 실컷 놀다 오라고 했었는데, 이 시간에 어쩐 일? 마누라 없는 집이라고 애인 손잡고 같이 들어왔었더라면 어마어마한 낭패였겠다. 어쩌면 아내는 이걸 노렸던 걸까?
213 그램의 안심 세 덩이 가지고 아내와 나누어 먹기엔 조금 부족하긴 했다. 하지만 들척지근한 정체불명의 수박 소스를 끼얹은, 너무 구워져 퍼석한 스테이크를 맛있게 먹어 주는 아내가 오늘따라 예뻐 보인다. 집밥이 먹고 싶어 하루 먼저 돌아왔다는 아내에게 나름대로는 그럭저럭 괜찮은 휴가 마지막 저녁을 먹게 해 준 것 같다. 가족들 걱정은 팽개친 채, 혼자 먹을 스테이크를 열심히 궁리했던 보람이 있다.